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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cene Scope] 상상의 공간 <블랙메리포핀스> 무대 [NO.106]

사진제공 |황수연(무대 디자이너) 정리 | 배경희 2012-07-10 4,833

<블랙메리포핀스>의 주요 공간은 붉은 대저택이다. 하지만 대저택을 묘사하는 설정은 무대 위 어디에도 없다. 대신 모호한 상징만 있을 뿐이다. 관객들이 <블랙메리포핀스>의 무대 디자인에 대해 저마다의 해석을 내놓으며 숨은 의미를 추리하는 즐거움에 빠져있는 이유는 그래서다. <블랙메리포핀스> 무대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 황수연 무대디자이너에게 구한 힌트로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완성해 보자. * 이 글은 공연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각 데크(Deck)로 아이들만의 공간을 만들어야겠다.’ 앉은 자리에서 대본을 다 읽고 고개를 들자, 카페에 있던 더치커피 기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기막힌 우연이 또 있을까. 네 개의 기둥 안에 유리병이 들어간 모양이 꼭 실험 도구 같았는데, 그걸 본 순간 ‘실험 기구를 상징화한 무대, 이거다!’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오른 것이다. 한스, 헤르만, 안나, 요나스, 네 사람은 어린 시절 그라첸 박사의 실험 대상이었고, 실험 기구로 둘러싸인 공간이 곧 네 아이들의 머릿속, 다시 말해 기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과거 회상 장면이 모두 중앙의 마름모꼴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 모두 머릿속에 기억의 방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무대 어디에 실험 도구가 있느냐고? 많은 관객들이 궁금해 하는 기둥의 의미가 바로 실험 도구의 상징이다.


친부처럼 믿고 따랐던 양아버지와 유모에게 최면 실험을 당했던 네 아이들. 아이들은 12년이 지난 후에야 자신들이 나치당의 실험 대상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니, 기억하게 됐다는 표현이 맞다. 12년 전, 유모의 최면에 의해 지워진 줄 알았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억지로 잊고 싶을 만큼 가슴 아픈 기억이지만, 내가 살아온 기억의 일부이기 때문에 지울 수 없는 소중한 고통도 있기 마련. 현재 시점의 주인공들이 기억 저장소인 중앙 무대의 바깥 테두리를 계속 맴도는 이유는 그래서다. 네 사람 모두 무의식적으로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억은 시간이 흐를수록 복잡하게 얽히고 또 편집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뒤죽박죽 엇갈려 있는 기억의 속성을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싶었는데, 이를 위해 사용한 장치가 턴테이블(회전 무대)이다. 또 턴테이블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시점 변화를 보여주기에도 좋다. 예를 들어 작품의 화자인 한스가 기둥을 돌려 턴테이블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시간이 과거로 돌아간다는 의미다.


<블랙메리포핀스>는 디자이너로서 좋아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장면마다 명확하게 공간을 나타낼 필요가 없으므로 신을 그려 나가는 재미가 있다. 무대가 모던하고 단순할수록 작품의 배경이나 시대를 나타내는 좋은 방법은 시대성이 드러나는 소품을 활용하는 거다. 가령 무대 위에 테이블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고 해도, 잘 만든 테이블이라면 디테일이 그 시대를 설명해 줄 수 있다. 이때 가장 효과적인 소품이 등이다. 등은 시대에 따라 디자인이 명확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시대성을 나타내기에 아주 효과적이다. <블랙메리포핀스>에도 등이 등장하지만, 이 작품에서 등은 시대를 드러낸다기보다는 디자인적인 측면을 더 고려했다. 세트와 어우러지는 요소 말이다. 또 최면 요법에는 등이 빠지지 않으니까.

 

 

 

 

기둥이 세 개인 이유는 뭘까? 기둥의 길이를 각각 다르게 한 데는 어떤 의도가 있는 걸까? 기둥을 하나 없앤 건 탈출을 위한 통로를 남겨둔 것이다. 기둥이 비스듬하게 세워져 있는 건 아이들의 불안한 심리를 나타낸다. <블랙메리포핀스> 무대를 둘러싼 갖가지의 질문과 해석들. 답은 관객 몫으로 남겨두고 각자 풀이한 해석이 모두 정답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하나의 정답만 있으란 법은 없으니까. 다만 디자이너로서 관객들이 무대 디자인에 대해 한번씩 의미를 생각해 준다는 사실에 행복할 뿐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05호 2012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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