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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AST VS CAST] 근거 있는 담백함과 낯선 달콤함 사이, <베르테르> 베르테르·롯데·알베르트 [No.124]

글 |송준호 사진제공 |CJ E&M 2014-02-03 4,590

<베르테르> 베르테르·롯데·알베르트

현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꾸며진 무대와
초연 당시로 돌아간 제목 등 <베르테르>는 이번에도 개막 전부터
팬들의 기대감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목을
끌었던 건 역시 ‘대표 베르테르’ 엄기준의 복귀와 임태경의 합류였다.
태생적으로 우울한 기질의 소유자 베르테르는 두 사람을 통해
어떻게 재현되고 바뀌었을까. 이를 중심으로 각각 두 배우들이
연기 경합을 펼친 롯데와 알베르트도 비교해봤다.

 

 


베르테르
엄기준 vs 임태경
  
                                                                              

큰 키에 근육 없는 호리호리한 체형의 엄기준은 감성적이고 순정적인 피터팬 콤플렉스 청년의 모습을 육화해서 보여준다. 그는 그냥 가만히 서 있어도 그림이 된다. ‘그림’이라는 표현은 이번 <베르테르>의 무대 컨셉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조광화 연출이 새로 다듬은 발하임은 전체적으로 수채화 느낌이 나는 세계다. 명도가 높지 않다는 뜻이다. 엄기준의 베르테르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모든 서사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도 종종 흐릿하게 보인다. 이 흐릿한 존재감엔 우울하고 슬픈 원작의 정서가 녹아 있다. 그것이 잘 드러나는 장면이 알베르트와의 첫 만남이다. 알베르트의 초대를 체념적이고 슬픈 시선으로 응수하는 몇 초간의 정적은 엄기준 베르테르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정지 화면처럼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는 것만으로도 복잡 미묘한 감정의 덩어리들이 아우성치는 것을 느끼게 한다.
임태경의 베르테르는 상대적으로 밝고 적극적이다. 노래할 때는 임태경 특유의 감미로움까지 있다. 엄기준에게서 소년의 어설픔이 느껴진다면, 임태경에게서는 처음부터 성인 남자 같은 노련함이 풍긴다. 또 그는 극의 전체 분위기에서 홀로 두드러져 보일 때가 많다. 특히 연기와 노래 양면에서 잔 움직임이 많은 점이 엄기준과 가장 큰 차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베르테르의 전형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베르테르’보다는 ‘실연해서 상심한 귀족’에 가깝게 느껴진다. 그래서 그는 전혀 자살할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제까지 한 번도 안 넘어지고 사셨나”라는 오르카의 대사는 그를 정확히 담는 표현 같다.
이런 두 사람의 캐릭터를 단적으로 대조하는 것이 정적(靜寂)을 활용하는 방식에 있다. 롯데와 알베르트의 관계를 알게 된 베르테르가 만취한 상태에서 갑자기 “아악!” 하고 단발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장면이 좋은 예다. 자신이 우유부단해 타이밍을 놓친 것처럼 보이는 엄기준의 베르테르는 절규에 뒤따르는 정적에서 그 고통을 더욱 생생하게 전달한다. 이런 정적을 잘 활용하는 엄기준의 테크닉은 뮤지컬이라기보다 연극적인 냄새를 풍긴다. 충격을 떨치고 돌아온 베르테르가 롯데의 결혼 사실을 알고 또 한번 좌절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이때 그가 드러내는 눈빛의 온도는 작품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낮다. 무대 밖에서도 베르테르로 고민하며 살아온 엄기준만의 디테일이 빛나는 장면이다.
반면 어쩌다 유부녀를 사랑한 불운아처럼 보이는 임태경의 베르테르는 그 정적에서 고통과 좌절, 슬픔 같은 감정보다는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데 대한 분노를 표출한다. 그래서 화가 어느 정도 풀리면 금세 상처를 떨치고 일어나 감미로운 아리아를 들려줄 것만 같다. 그가 돋보이는 것은 말을 안 할 때보다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상황을 주도하는 장면이다. 가령 민중을 이끌고 알베르트에 맞서 카인즈를 구명하는 과감함에서는 엄기준의 것보다 쉽게 설득력을 얻는다. 마치 자베르와 대립하는 장 발장처럼 의기로운 베르테르를 보여준다.

 

 


롯데
이지혜 vs 전미도  
                          
               

롯데는 밝고 꾸밈없는 성정을 지닌, 곱게 자란 아가씨다. 그러다 베르테르를 만나 의도치 않게 ‘내 마음 나도 몰라’ 식의 행동으로 여성 관객들에게는 ‘어장관리녀’라는 비난도 받는 캐릭터다. 사건의 진행에 따라 전반부와 후반부의 감정 표현이 크게 달라지는데, 그런 격앙된 감정을 얼마나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여기서는 노련한 전미도의 감정의 증폭이 훨씬 크다. 불안, 초조, 혼란스러움의 감정이 전미도에게서 더 잘 드러난다.
전반부의 이지혜 롯데는 크리스틴(오페라의 유령)과 엠마(지킬 앤 하이드)의 친구 같다. 낙천적이고 건강한 에너지가 마을 사람들과 베르테르 모두에게 구석구석 스며든다. 반면 전미도의 롯데는 다소 말괄량이 같은 느낌이 있다. 캐릭터의 정형에 갇히지 않고 끊임없이 디테일을 보태는 적극성이 요조숙녀의 이미지에서 멀어지게 한다.
이지혜 롯데는 후반부부터 자신만의 색이 급격히 옅어진다. 물론 어린 음색과 연기는 예쁘게 들리고 보이지만, 이번 공연의 베르테르와 알베르트들이 한결같이 완숙함을 자랑하는 ‘아저씨 배우’들이어서, 그에 상응하는 ‘여인’으로서의 복잡한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표적인 것이 “당분간 찾지 말아달라”고 하면서도 “지나치지 않게 만나달라”고 갈팡질팡하는 ‘다만 지나치지 않게’ 부분이다. 여인의 혼란스러운 내면이 담긴 이 부분에서 전미도가 그 변덕스러운 심리를 그대로 표현한다면, 이지혜는 베르테르를 거부하는 뉘앙스에 가깝게 넘버를 소화한다.


알베르트
양준모 vs 이상현

                                        

양준모의 알베르트는 그의 외모처럼 다부지다. 이성적이고 강직한 성품이 외모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첫 등장 신에서 베르테르의 상대 캐릭터로서 양준모의 이런 확실한 이미지는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부드럽고 유약한 서생 같은 베르테르와는 달리, 법무관이라는 신분 그대로 그를 둘러싼 공기는 단단하고 단호하다. 그가 내뿜는 압도적인 공기는 롯데를 스스로 달려오게 하고 베르테르를 위축시키며, 순식간에 상황의 주도권을 가져오는 힘이 된다. 사실 양준모의 출연에서 이런 ‘상남자’ 알베르트의 모습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조그마한 체구의 롯데를 번쩍 들어 안는 알베르트의 과감한 모습은 그이기에 더 잘 어울린다.
반면 큰 키에 전체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이상현의 알베르트는 롯데와의 호흡을 살려 안정된 부부의 느낌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눈빛이나 손짓에 ‘남자’보다는 ‘신사’의 느낌이 강해 롯데와의 로맨스를 자연스럽게 이끈다. 다만 성악 발성이 다소 강해 대사 톤과 노래 톤이 갑자기 달라지는 특징이 있다. 노래가 시작되면 갑자기 음악극으로 전환되는 느낌이다. 그의 알베르트는 이성적 캐릭터보다는 낭만적 캐릭터에 방점이 찍힌 것 같다. 양준모가 강인한 남성상을 구축하며 베르테르의 반대편에 서고자 한다면, 이상현은 단지 한 가정을 지키려는 신사적인 남편의 모습을 유지하며 롯데의 옆에 서 있으려고 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4호 2014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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