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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AST VS CAST]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 <아가사> 레이몬드·아가사·로이 [No.125]

글 |송준호 사진제공 |아시아브릿지컨텐츠 2014-03-03 4,445

<셜록홈즈>나 <아르센 루팡>과 달리, <아가사>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표적 캐릭터인 에르큘 포와로나 미스 마플 대신 작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한 편의 추리소설처럼 미스터리하고 흥미로운 요소가 많았던 작가의 실제 삶은
그대로 극 속 설정으로 옮겨졌다. 그중 핵심은
‘아가사 크리스티 실종사건’이다. <아가사>는 이 사건으로부터 세 캐릭터를
파생시켜 이들 간의 상호작용을 원동력 삼아 진행된다. 특히 여덟 명의
배우가 나눠 맡은 세 캐릭터는 조합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
               (* 스포일러가 있으니 공연을 보지 않으신 분은 읽지 않기를 권합니다.)

 

 


레이몬드
박한근 vs 김지휘 vs 윤나무 

                                                                          

<아가사>에서 펼쳐지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레이몬드의 기억 속 사건들이다. 무명작가인 레이몬드는 어린 시절 아가사 크리스티와 맺었던 인연을 되살려 반등의 기회를 노린다. 그는 기억을 잃은(또는 감춘) 아가사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그녀에게 편지를 쓰고, 극은 자연스레 소년 레이몬드의 기억으로 전환된다. 즉 이 극은 아가사의 ‘잃어버린 시간’을 소년 레이몬드가 추리해가며 복구하는 이야기다. 때문에 여기서 탐정의 역할을 맡는 것은 아가사가 아니라 레이몬드다. 배우들의 개성도 이 ‘소년 탐정’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가장 잘 대비된다.
박한근은 세 명의 레이몬드 중 나이는 제일 많지만 열세 살 소년에 가장 가까운 체구를 지녔다. 반면 그런 외양에 걸맞지 않게 연기나 발성에서는 다소 과장된 모습을 보여준다. 불안해하는 느낌의 양소민 아가사와 만나면 이런 점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차분한 배해선 아가사와 만나면 작위적인 모습이 두드러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 일관된 과장은 연극적인 느낌의 극과 맞물려 대체로 잘 녹아들고 있다. 레이몬드가 사건의 열쇠를 쥐는 대목인 ‘열쇠 구멍’ 신에서는 박한근의 과장된 톤이 오히려 효과적으로 기능한다.
김지휘는 성인과 소년의 모습 모두 무난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소년 레이몬드에서는 과장되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돋보인다. 다만 레이몬드가 아가사와 로이에 비해 태생적으로 튈 수 없는 캐릭터인지라, 이런 모범적인 연기는 결국 존재감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극을 이끌어가야 할 ‘소년 탐정 레이몬드’보다는 그냥 ‘똘똘한 옆집 꼬마’에 가깝게 보인다.
윤나무의 레이몬드는 귀여운 소년보다는 삐쩍 마른 청소년이다. 성인일 때 자연스럽던 모습은 소년이 되면서 급격히 불편해진다. 큰 키의 핸디캡을 안은 만큼 ‘소년’을 표현하기 위해 과도하게 귀여움을 강조한다. 가령 아가사의 원고를 몰래 보다 들켰을 때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번쩍 들며 소년성을 과장하는 식이다. 윤나무는 이런 식으로 큰 동작을 활용하며 자신만의 소년을 표현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상대와 종종 불협화음을 만든다.


아가사
양소민 vs 배해선   
                             
        

아가사 캐릭터의 중심 키워드는 ‘혼란’이다. 그는 작가로서의 한계에 부딪힌 좌절감과 자신이 믿고 있던 존재(남편, 하녀)들에 대한 배신감이 뒤섞여 ‘멘탈 붕괴’를 일으킨다. 그래서 아가사는 기본적으로 작가와 여인의 두 가지 모습을 모두 보여줘야 한다. 극은 대부분 젊은 시절의 아가사를 비추지만, 당시에도 이미 명성 높은 작가였기 때문에 캐릭터의 근간에는 작가로서의 고민과 좌절이 전제되어야 한다.
배해선과 양소민의 가장 큰 차이는 이 복잡한 감정의 농도에 있다. 양소민의 아가사는 전반적으로 작가로서의 느낌이 옅다. 추리소설 작가의 치밀함을 표현하기에는 여리고 느슨해 보인다. 젊은 여인의 모습이 강조된 탓에 소년 레이몬드가 ‘작가 아가사’에게 열광하는 부분에서는 공감의 힘이 떨어진다. 혼란스러운 감정도 남편과 하녀에게 배신당해 슬퍼하는 ‘여인’에서만 나타난다. 반면 배해선의 연기는 철저히 ‘작가 아가사’를 근간으로 한다. 젊은 시절로 돌아가도 다부지고 안정된 모습이 상황의 설득력을 높인다. 특히 배해선 특유의 근심 있는 표정과 허스키한 목소리는 그런 작가의 모습을 표현하는 데 안성맞춤이다. 업무와 가정사에 소모되어 피곤한 아가사의 내면을 잘 묘사한다.
아가사의 다른 혼란은 자기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자아로 인한 것이다. 아가사가 인간성을 유지하려는 이성이라면, 다른 자아는 적들을 벌하고 싶어하는 욕망이다. <아가사>에서 가장 큰 갈등과 위기는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몰살하려 하는 그 다른 자아와의 싸움에 있다. 이 때문에 아가사는 ‘아가사 실종사건’의 피해자인 동시에 피의자가 된다.
그런데 양소민은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전혀 경계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기는 것 같다. 로이와의 만남을 통해 마음껏 일탈을 즐기는 탈선 주부 같기도 하다. 로이와 밀착해 춤을 출 때는 소녀의 설렘마저 느껴진다. 반면 배해선의 아가사는 로이와 함께하면서도 상체를 꼿꼿이 세운 채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 한다. 자신이 초래한 상황인 만큼, 스스로 꼬인 상황을 정리하고 극복하며 ‘아가사 크리스티’라는 작가의 정체성을 상기시킨다.


로이
김수용 vs 박인배 vs 진선규

                                    

이 극에서 가장 흥미롭고 신비한 인물은 로이다. 전반부의 아가사의 대사를 통해 그의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강으로 뛰어든 아가사의 차 앞에 나타난 그는 왠지 그녀와 비슷한 점이 많은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분주하게 등퇴장을 반복하고, 때로는 몰래 아가사를 지켜보며 궁금증을 유발한다. 과도한 붙임성과 화려한 복장, 반응을 개의치 않는 유머 감각이 묘한 위화감을 주는데, 이 점이 캐릭터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런 면에서 이국적인 인상과 금발 머리의 김수용은 로이라는 캐릭터를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전작 <푸른 눈 박연>에서의 이방인처럼 독특한 존재감으로 아가사와 극의 전개 사이를 누빈다. 그는 내내 과잉된 동작과 웃음을 보여주는데, 이런 가운데에서도 진심이 느껴지지 않고 공허하게 느껴진다는 점에서 소시오패스를 연상시킨다. 표정 없는 웃음을 지을 때 특히 그렇다. 붉은 옷을 입고 정체를 드러낼 때는 초현실적 캐릭터를 가장 잘 보여준다.
박인배는 ‘리마리오’ 같은 로이다. 다소 느끼한 외모와 말투를 보여주는 그는 나름 유머 감각을 보여주지만 성공률은 현저히 낮다. 시도할 때마다 폭소보다 실소를 자아낸다. 다부진 체격처럼 그의 로이는 흐트러짐이 없다. 단정하고 댄디하다. 하지만 그만큼 로이로서의 아우라는 상대적으로 옅다. 그의 존재감이 커지는 건 정체를 밝히는 장면이다. 큰 키의 그가 검붉은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서면 이전까지의 허세가 단숨에 설득력을 얻는다.
가장 현실적이고 실체가 느껴지는 로이는 진선규다. “지금은 내가 당신의 보호자에요” 뒤에 “호호호”를 붙이거나 총알 피하는 소리를 내는 등 썰렁한 애드리브를 하는 그는, 현실에 있을 법한 사람이다. 로이 중 가장 평범해 보이지만, 마지막에 내재된 광기를 표출할 때는 진선규가 독보적이다. 강한 개성을 지닌 김수용과 박인배의 로이가 마지막까지 아가사와는 별개의 캐릭터 같다면, 진선규는 아가사 내면에 있는 다른 자아로 존재하는 것 같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5호 2014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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