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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ZOOM IN] <글루미데이>, <아가사>, <라스트 로얄 패밀리>, 창작뮤지컬의 새로운 트렌드 역사 판타지 [No.126]

글 |박병성 2014-04-07 5,938

뮤지컬에서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은 많았다.
그러나 최근 역사 소재의 뮤지컬은 기존의 역사를 재해석하거나
고증하기보다는 놀이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 같다.
가벼운 역사를 지향하는 일종의 탈이데올로기적인
분위기가 읽힌다. 그것은 비단 뮤지컬뿐만 아니다.
드라마와 영화 같은 대중예술에서 역사의 빈틈을 찾아
상상력을 극대화한 작품들이 인기다. 영화 <광해>나
<왕의 남자>, 드라마 <바람의 화원>, <뿌리 깊은 나무>가
그런 예일 것이다. 최근 역사 왜곡 논란의 와중에도
인기를 끌고 있는 <기황후> 역시 같은 부류의 드라마다.
뮤지컬에서도 최근 역사 판타지 뮤지컬이 주요한 트렌드로
등장하고 있다. <글루미데이>와 <아가사>는 역사의 빈틈에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한 경우이고, <라스트 로얄 패밀리>는
역사를 전복시키는 힘이 강한 작품이다.
세 작품의 성종완, 한지안, 전미현 작가와
역사 판타지 뮤지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역사와 상상력의 결합

기   자     최근 역사 판타지 뮤지컬이 유행이다. 각 작품은 어떻게 시작한 것인가?
성종완     이헌재 프로듀서가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하는 <글루미 선데이> 같은 끈적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고 싶어했고, <옥탑방 고양이>의 박은혜 작가가 김우진과 윤심덕의 이야기를 추천했다. 이 작품을 써보자고 해서 그때부터 시중에 나와 있는 책이나 논문을 찾아봤다. 김우진은 무슨 생각을 했기에 이런 글들을 쓸 수 있었을까, 김우진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윤심덕도 기록으로 남겨진 행적이나 말들을 보면 굉장히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한지안     우리는 창작 팀이 먼저 꾸려진 경우다. 추정화 선배가 김태형 연출가, 허수현 작곡가와 나를 한 팀으로 엮어 주었다. 먼저 추리물을 해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루팡이나 셜록은 이미 만들어졌고 남은 것은 아가사 크리스티인데 자료를 조사하다가 한 문장에 꽂혔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실종되었다.’ 그녀의 소설 말고 그녀 자체를 다루자는 데 일치를 봤다.
전미현     기존의 사극 뮤지컬은 역사에 치중한 것들이 많았다. 그것과는 다른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다. 또 하나는 역사물이지만 현대의 문제를 담으려고 했다. 내 주요 관심사가 교육열과 가족사인데, 구한말 왕족에서 현대 가족사의 모습을 봤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하고 픽션을 강조하면 기존 사극 뮤지컬과 다른 결이 나올 것이라고 판단했다.


기   자     역사적 사실이 아무리 흥미가 있더라도 그것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가공해야 작품이 된다. 어떻게 접근했나?
성종완     처음에는 김우진과 윤심덕의 매력에 끌렸지만 시의성을 생각해야 했다. 두 인물이 이 시대 관객들에게 어떤 메시지로 전달될 수 있을까. 이 공연을 해야 하는 이유를 찾는 데 고심했다. 사람들은 꿈을 꾸는데 그것을 이루기가 어려워지면 염세주의에 빠진다. 요즘의 젊은이처럼 많은 실패와 좌절을 맛보는 이들도 없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도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삶에서도 그런 모습이 보이더라. 이들의 고통이 오늘날 젊은이들의 고통과 맞닿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비관적인 이야기보다 죽음이나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 할지라도 좀 더 희망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들이 선택한 것이 죽음이 아니라 삶이라는 걸 이야기하려고 했다. 김우진과 윤심덕이 배에서 뛰어내린 사실은 바꿀 수 없지만 행동의 동기를 새롭게 창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한지안     아가사 크리스티는 늘 신의 입장에서 살인 사건을 기획하고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런 그녀가 살인 사건의 대상이 된다면 어떨까? 그녀를 살인 사건의 중심에 세우자는 것이 처음의 컨셉이었다. <아가사>같이 내면의 분열을 일으키는 작품은 많다. <지킬 앤 하이드>나 <잭 더 리퍼>도 그렇고. 이들 작품과 차이라면 아가사는 실존 인물이고 일련의 과정을 거쳐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점이다. 죽거나 자기 자신을 해하지 않고 승리하고 돌아왔다. 승리했다는 데에 포인트를 두려고 했다.

 

 

역사적 사실, 그 매력과 족쇄

 

기   자     <라스트 로얄 패밀리>는 두 작품과 좀 다른 노선을 택했다. 시대를 고증하지 않고 일탈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전미현     초고가 나온 지 3년이 지났다. 지금은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많이 다듬어졌다. 초기에는 이 컨셉을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했다. 컨셉도 명확하지 않았고, 모니터링을 받아보면 여러 의견에 흔들릴 때가 많았다. 명성황후를 그런 식으로 다루면 안 된다고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초고는 지금처럼 완전히 픽션으로 간 것이 아니라 픽션과 팩션 사이에 있었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들이 오히려 단점으로 드러나더라. 그렇다면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꾸며보자고 한 것이다.

기   자     그렇다면 <왕세자 실종사건>처럼 고종이나 순종 등 역사적 인물 대신 왕과 왕비, 세자만 내세우는 시대물로 꾸밀 수도 있지 않았나?
전미현     지금은 그렇게 볼 수도 있는데, 구한말이라는 시대적 배경이 인물 말고도 음악이나 다른 요소에 반영되어 있었다.
기   자     역사적 배경과 인물을 소재로 삼고 있다. 전복을 컨셉으로 했지만 그래도 역사적 사실에서 기인한 것이 있나?
전미현     명성황후가 순종의 교육에 관심이 많은, 오늘날로 보면 극성맞은 엄마였다. 그리고 고종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무능력한 임금에서 최근에는 나라를 지키려고 다양한 노력을 했던 인물로 재평가되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작품 후반부 고종의 모습은 그러한 면이 반영된 것이다. 당시 남사당패가 해체되는 시기였고, 꼭두와 꼭지는 그런 시대적 배경을 근거로 한다.
성종완     창작 초반에는 역사적 인물을 다룬다는 게 너무 조심스러워서 바꾸는 게 죄스럽더라. 사실에 기인해서 빈틈만 메우려고 했다. 그런데 작품에서는 극 중 진실이 더 중요하지 않나. 극 중 진실에 중심을 두다 보니 나중엔 뭐가 사실이고 뭐가 허구인지 모르겠더라. 윤심덕이 순회공연을 한 것은 사실이다. 연기는 안 하고 노래만 하겠다고 해서 순회공연에서 노래만 불렀다. 윤심덕은 연기도 잘했다고 한다. 졸업 공연에서 <인형의 집>의 노라를 연기했는데 굉장히 잘해서 대학 총장이 배우를 하라고 했을 정도였다. 김우진이 그 공연을 봤다는 기록이 있다.
한지안     아가사 크리스티를 존경하기 때문에 오마주로 풀어내려고 했다. 처음 뜨개질을 하는 장면에선 그녀의 소설에 등장하는 미스 마플의 느낌을 주고 싶었다. 레이몬드는 미스 마플의 조카이다. 벨기에 범죄 전문가는 괴짜 탐정 포와로를 오마주한 것이다. 독이 든 커피 잔을 바꾸는 장면은 내가 좋아하는 아가사의 작품에서 차용했다. 이런 식으로 아가사의 작품에 나오는 소소한 트릭들을 참고했다. 그리고 아가사의 작품을 열심히 읽었는데 일정한 패턴이 있더라.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다양한 용의자들의 동기를 파헤쳐 간다. 그런데 범인은 항상 의외의 인물이다. 반전은 항상 다르지만 이러한 패턴이 유지된다. 아가사 자신을 그 패턴 속에 넣어보고 싶었다. 아가사에 대한 오마주를 최대한 반영했더니 팬들이 나도 모르는 부분까지 찾아내 주더라.


기   자     역사적 인물뿐만 아니라 가상의 인물을 창조해서 작가의 의도에 맞게 역할을 부여하기도 한다.
성종완     사내라는 인물을 창조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관계가 애매했다. 친구도 아니고, 연인으로 보기에도 어려웠다. 둘을 이어주는 것이 시대이고 운명인데, 사내는 그것을 인물로 만든 것이다. 비이성적이긴 하지만 어딘가에 살고 있을지도 모를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관념을 인물화한 것이지만 배우를 만나고 관객을 만나면서 실존 인물로 살아나고 있다. 작가의 손을 떠난 상태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그것을 지켜보는 일이 즐겁더라.


기   자     작품에서 김우진과 윤심덕은 염세주의에서 벗어나 삶의 의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그 반대에 있는 인물로 사내를 등장시켰다. 일종의 죽음으로 이끄는 악마 같은 인물이다. 그래서 김우진과 윤심덕 이전에 동반 자살을 하는 사람들 곁에 늘 사내가 있었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성종완     작자 미상으로 남아 있는 ‘사의 찬미’를 사내가 썼다고 설정한 것도 그런 이유다. 죽음을 찬미하는 인물.
한지안     <아가사>에서는 남편과 내연녀만 실재했던 인물이다. 아가사는 언론의 공격을 받기도 했고, 어머니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았다. 그런 압박이 그녀를 뛰쳐나가게 했다. 기자와 유모는 아가사가 집을 뛰쳐나가도록 압박할 수 있는 인물들이다. 꼬마 탐정이었다가 작가가 되는 레이몬드는 아가사를 살인 사건의 당사자로 만들고 그러한 이야기로 안내하는 인물로 설정했다. 그리고 미스터리한 인물 로이는 정의로운 신의 입장에 있던 아가사와 대립되는 위치에 있는 살의에 들끓는 인물이다.
전미현     고종, 순종, 명성황후, 에케르트, 폴 매카트니 등 실재했던 인물들이 많이 등장하지만 그러한 인물들조차도 창조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작품의 컨셉을 가장 잘 반영하는 인물은 해설자이다. 팩션이라기보다 완전 픽션인데 그런 컨셉을 유지하면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도 하고, 비논리적인 상황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발랄한 상상력으로 가득 찬

 

기   자     역사적 판타지일지라도 처음 작업은 자료 조사일 것이다.
한지안     아가사 크리스티가 실종된 사건을 소재로 가져왔고 그녀에게 집중해야 해서, 관련된 책들이나 그녀의 소설을 늘 쌓아놓고 읽었다. 국내 책 중에도 이 사건을 언급한 도서가 10권 정도 된다. 절판된 책들이 많아 도서관을 전전해야 했다. 더스틴 호프만과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주연의 1979년 영화 <아가사>라는 작품도 있다. 딱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영화는 로맨스에 집중한다. 아가사가 트릭을 써서 내연녀가 자신을 죽이게 한다. <닥터 후>의 한 에피소드에서도 아가사의 실종 사건이 소재로 사용되었다. 참 많은 참고 자료가 있었지만 방점을 찍는 위치가 다 달랐기 때문에, 오히려 자신이 생겼다. 나도 나만의 방점을 찍으면 되겠구나, 하고.
전미현     <라스트 로얄 패밀리>는 철저히 고증을 회피했지만, 그래서 더욱 자료 조사를 철저히 했다. 충분히 그 시대를 공부해야 판타지로 가더라도 상대 주장을 반박할 수 있으니까.
성종완     김우진과 윤심덕을 살펴보면서 그들의 절망감이 피부에 와닿았다. 당시 한국 청년들에게 염세주의는 1919년 3·1운동에서부터 비롯된다. 거국적인 만세 운동을 벌였지만 결국 실패하고 일제 강점기로 접어든다. 희망도 없고 술과 담배로 연연하는 삶이 시작된다. 편부 슬하에서 자란 김우진은 가족에 대한 굴레가 강해 3·1운동에도 참여하지 못한 인물이다. 성격적 결함 때문에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안으로 삭여야만 했다. 윤심덕도 우리나라 최초의 오페라 가수로 혜성처럼 나타났지만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계속 나락으로 떨어져 대중가요를 부르게 되고 동생들을 위해 몸을 팔아야 했다. 코를 높이는 융비수술을 받았다고 되어 있는데, 오늘날 성형수술일 것 같다. 얼굴이 얼마나 망가졌겠나. 스캔들로 세상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하얼빈으로 도피해서도 술과 담배로 나날을 보냈다. 그래서  「사의 찬미」 앨범에는 아주 어둡고 퇴폐적인 영혼이 느껴진다. 이 두 사람을 아우르는 것을 시대의 염세주의라고 봤고, 그것을 대표하는 인물로 사내를 내세웠던 것이다.


기   자     이야기를 들으니 김우진과 윤심덕에게 좀 더 관심이 가는데, 작품에서는 이들의 고민들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다.
성종완     인물의 정보를 주는 방법은 대화 속에 끼워 넣거나, 스스로 말하거나, 타인이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해봤는데 결국 설명적으로 보이는 것들은 다 들어냈다. 그러다보니 설명이 부족해졌다. 이번 공연에서는 조금 더 넣어보긴 했는데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낄 것이다.
기  자     그러고 보니 <아가사>와 <글루미데이> 모두 미스터리 구조를 띠고 있다. 비단 이 작품들뿐만 아니라 대중 예술에서 역사 판타지 형식을 띠는 작품 중에는 미스터리 형식을 취하는 작품들이 많다.
한지안     추리소설 작가를 다루니까 그런 선택을 한 것도 있지만, 역사적인 사실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를 상상하며 창조하는 것 자체가 추리인 것 같다.
전미현     관객의 입장에서 보자면 역사 판타지에서 추리 구조는 관객이 궁금해하는 것을 가장 증폭해서 보여주는 형식인 것 같다.
성종완     코미디 장르라 할지라도 서스펜스가 필요한 것 같다. <글루미데이>를 처음에는 일반적인 서사로 풀었는데 재미가 없었다. 김우진과 윤심덕의 첫 만남부터 투신까지 여정이 꽤 긴 기간이고 불필요한 요소들도 있었다. 긴 전사(前事)를 감추고 마지막 5시간을 보여주어서 서스펜스가 생긴 것 같다.


기   자     이런 유형의 뮤지컬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뭘까?
성종완     인물들이 대중들이 알 만한 유명한 브랜드이고, 흥미로운 사건에 연류되어 소재로서도 매력적이다. 게다가 그 역사적 사실들에 빈틈이 많아서 마음껏 상상할 수 있다. 관객들과 놀이가 성립하는 거지.
한지안     창작을 하면서도 빈틈을 채우는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책과 관련 자료들을 보면서 그녀의 입장이 되어 빈틈을 내 나름대로 채워 넣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기   자     대중들이 윤심덕, 김우진이란 이름을 한번쯤 들어봤을 것이고, 이들이 현해탄에 몸을 던진 정사도 꽤 알려진 이야기다. 하지만 이들 인물에 대해 깊이 아는 사람은 또 많지 않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보를 주면서 픽션을 통해 드라마적인 즐거움을 준다. 그래서 역사 판타지 장르를 언급할 때 인포테인먼트(Information+Entertainment)라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역사 뮤지컬은 지나치게 무겁고 진지했다. 그러나 최근 역사를 소재로 하는 뮤지컬들은 진지한 접근보다는 상상력이 가미된 판타지를 바탕으로 역사를 경쾌하고 발랄하게 다룬다. 이러한 방식이 시대적인 분위기하고도 잘 어울리는 것 같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26호 2014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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