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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스칼렛 핌퍼넬> 멋진 허당이 되지 못한 허술한 영웅 활극 [No.119]

글 |정수연(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CJ E&M 2013-08-30 4,990

멋진 허당의 조건

 

예능 프로그램이 한글을 망치는 주범이라고들 비판하지만 예능이 발견하게 해준 단어도 있으니 ‘허당’이라는 말이 그렇다. 원래 이 말은 충청도 사투리로 ‘진지하지 않고 철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지만 요즘에는 조금 다른 의미로 진화한 것 같다. 사람들이 허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떠올려 보시라.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고 모자란 데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완벽함 가운데서 어이없는 빈틈이 보일 때 허당이라고들 하더라. 이런 의외성이 주는 유쾌함은 친숙함이라는 덕목으로 이어진다. 완벽함의 틈새로 배어나오는 악의적이지 않은 의외성은 완벽해 보이는 사람도 평범한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친근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쯤 되면 허당끼야말로 멋진 인간미의 필수품이라 해도 과언은 아닌 셈이다.

 

 

허당 기질이 다분한 영웅 캐릭터가 더 멋져 보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영웅이란 인격이나 재능이나 선에 대한 의지 모든 면에서 뛰어난 캐릭터이니만큼 사실 비현실적이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인물이지만, 이들에게서 발견하는 인간적인 빈틈은 그들이 활약하는 이야기에 현실성을 덧붙이는 촉매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부류의 영웅이야말로 대중서사가 만들어낸 최고의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이런 캐릭터가 주인공인 작품은 당연히 유쾌하고 발랄해야 맞다. 인물과 사건의 설정에서 다소 말이 안 되는 과잉과 비약이 있다손 치더라도 영웅 활극의 매력, 즉 캐릭터와 사건이 만화적인 개연성에 충실하도록 어우러진다면 이 작품은 충분히 재미있는 공연이 될 수 있다. 진지함보다는 능청맞음이 돋보이고 논리적 사실성보다는 보기에 그럴듯함이 극을 주도할 때 영웅 활극은 품위 있는 오락으로서 완성될 터. 완성도 있는 가벼움이 주는 재미만큼 신선한 것도 없다. 이런 재미 위에서 서사와 인물의 허술함은 빈틈이 아니라 의도된 매력이 될 수도 있다.      

 

영웅 활극 <스칼렛 핌퍼넬>


<스칼렛 핌퍼넬>은 딱 그런 소재의 작품이다. 흔히들 이 작품의 배경이 프랑스 혁명이고 영국 귀족인 주인공이 영국과 프랑스를 오가며 활약하기 때문에 <두 도시 이야기>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들 보던데 천만의 말씀이다. 혁명의 폭압에 짓눌린 프랑스 민중을 구원하는 영국 귀족 비밀결사대라. 설정 자체가 유치하지 않나? 이건 그냥 영국산 영웅 판타지로 보는 게 맞다. 판타지에서 시공간적 배경은, 그것이 아무리 실제 역사라고 하더라도, 극적인 면모를 강조하기 위해 동원된 괜히 비장한 배경막일 뿐이다. 영웅 판타지다운 만화적 상상력을 성실하게 구현할 때 이 작품은 비로소 영웅 활극으로서의 오락적 완성도를 뽐낼 수 있는 거다. 

 

 

작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고갱이는 바로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사건을 어떻게 그럴 듯하게 만들어낼지의 여부에 있을 터. 일례로 멋쟁이에 유머 감각까지 가진 유쾌한 귀족이면서 동시에 비밀결사대 ‘스칼렛 핌퍼넬’의 수장이기도 한 주인공은 경박하도록 가벼운 얼굴과 악을 응징하는 멋진 영웅의 얼굴을 한꺼번에 가져야 할 것이다. 이건 주인공의 의리 있는 친구들, 그러니까 ‘스칼렛 핌퍼넬’ 구성원 전체에게도 적용되어야 할 조건이다.

 

이들의 생활이 가면 속의 이중생활이니만큼 사건의 전개는 정체 숨기기와 가면 벗기기의 긴장감으로 이어질 때 더없이 재미있을 텐데, 이렇게 되려면 긴장의 포인트에서 이야기의 개연성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신출귀몰하는 ‘스칼렛 핌퍼넬’의 활약이 무대에서 얼마나 역동적으로 시각화되는지의 여부도 이 작품의 완성도에 중요한 관건이 될 거다. 전형적인 장르의 공식이야말로 이 작품의 왕도를 위한 가이드인 셈이다.

 

멋진 허당이라기엔 그저 허술한

 

그런데 말이다. <스칼렛 핌퍼넬>이 영웅 활극다운 완성도를 갖추기에 넘어야 할 산은 적지 않아 보인다. 일단 대본부터 마음에 걸린다. 앞서 말했듯이 영국 귀족이 프랑스 민중을 구한다는 설정 자체의 무리수는 유치하지만 어차피 오락물인 거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정체가 탄로날 위기를 그려내는 극작의 허술함이란. ‘스칼렛 핌퍼넬’의 구성원을 알아내기 위해 주인공의 아내가 쓰는 묘책은? 그냥 본인들에게 직접 물어보면 된다. “당신이 스칼렛 핌퍼넬인가요?” 악당 소블랑에게 퍼시의 정체가 밝혀지는 것도 허무할 만큼 쉽고 간단하다. 이럴 거면 뭐 하러 정체를 숨긴 건지.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정체를 숨긴 영웅 이야기에서 정체 탄로는 가장 극적인 포인트일 텐데 이 지점에서 대본은 극적 개연성을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이 작품을 살리는 관건은 연출에 있어 보인다. 하지만 대본의 허술함을 연출이 성공적으로 메운 것 같지는 않다. 일단 8명의 스칼렛 핌퍼넬 멤버들이 전혀 멋있지 않다. 영웅 활극에서 영웅들이 멋있지 않다니. 이건 반칙이다. 이들에게 한량다움은 바보스러움과 구분되지 않으니, 스칼렛 핌퍼넬의 의도된 허당 노릇이 그냥 허술해 보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즉 희화화의 코드를 잘못 잡은 셈인데 이렇듯 미묘한 묘사의 차이는 이 작품의 생동감을 감소시킨다. 대사로는 분명 ‘깊은 철학적 지식과 높은 예술적 안목을 지닌, 머리로 싸울 줄 아는’ 멋쟁이들이라고 하지만 무대 위에서의 그들은 두서없이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스칼렛 핌퍼넬의 활약이 한눈에 담겨야 할 단두대 구출 장면은 활극다운 매력을 함빡 보여주도록 역동적이었음 좋겠건만 그저 엉성한 듯 아기자기하더라. 장면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그럴듯함은 잘 보이지 않는다. 단두대에서 목이 잘린 주인공이 다시 멀쩡하게 살아나오는 장면도 그렇다. 나름 반전이라면 반전일 텐데 어떠한 연출적 눈속임도 없이 그냥 옆에서 걸어 나오더라. 연출적 상상력이 가미되지 않은 정직한 장면 연출은 신기하지도 흥미롭지도 않다. 오히려 무대 위에서 볼 만한 것은 의상이다. 시대극을 표방하는 여러 공연 중에서도 이 작품의 의상은 돋보인다. 예쁘고 화려하고 그럴 듯한 것이 보기에 즐겁다.

 

이제 믿을 건 배우밖에 없다. 한지상과 김선영의 ‘케미’가 그리 좋아보이진 않아도 안정적인 연기라는 점에서 두 배우가 차지하는 몫이 크고, 악당 쇼블랑을 연기하는 양준모의 연기도 극에 잘 어울린다. 때때로 그들의 지나친 몰입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건 배우 탓이라기보다는 음악의 영향이 커 보인다. 이 작품의 진지함과 경쾌함은 정체 바꾸기라는 극적 설정에 따라 번갈아 나타나는데, 작품의 가벼운 색채와는 동떨어진 듯 과도하게 진지한 음악은 때로 분위기에 안 맞는 감정의 과잉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노래가 귀에 꽂히지 않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는 셈이다.


<스칼렛 핌퍼넬>은, <조로>를 비롯해 지금까지 공연돼왔던 작품들에 비교해볼 때, 특별히 모자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돋보이지도 않은 공연이다. 이 작품의 곳곳에서 발견하는 허술함을 뮤지컬의 오락적인 품위를 증명하는 의도된 가벼움으로 보기엔 아직 한참 모자라 보인다. 이건 비단 이 공연만의 문제는 아니다. 비슷한 부류의 많은 공연이 공통적으로 극복하지 못한 문제인 셈이다. 적지 않은 공연이 올라감에도 불구하고 오락물로서의 완성도를 갖춘 영웅 활극이 지금껏 나오지 않는 것은 더없이 아쉽다. 더 가벼워지고 더 들떠 있어도 된다. 하지만 들뜬 가운데서도 이야기의 이음새는 그럴 듯해야 하고 가벼움 가운데서도 연출적 형식에 대한 고민은 이어져야 한다. 그럴 때 뮤지컬의 가벼움은 연극적 빈틈이 아니라 뮤지컬만의 능청스런 미덕이 될 수 있는 거다. 배우의 개인적 매력이 아니라 작품 자체의 힘이 돋보이는 공연, 그것도 오락적인 공연을 꼭 보고 싶다. 그런 공연이 있다면 기꺼이 회전문을 돌게 될 것 같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9호 2013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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