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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리걸리 블론드> 정은지 [No.110]

글 |배경희 사진 |김호근 2012-11-27 5,651


그녀가 사랑스러운 이유

 

예쁜 척하지 않아서 더없이 예뻐 보였던 <응답하라 1997>의 성시원은 확실히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캐릭터였다. 성시원을 맡은 아이돌 가수 정은지는 싱크로율 100퍼센트의 살아있는 연기를 선보여 그야말로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아직 성시원에 대한 사람들의 사랑은 식지 않았지만, 정은지는 성시원에게 아쉬움의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옷을 입을 준비를 하고 있다. 이번에 그녀가 맡은 인물은 “표준어로 예쁜 척해야 하는 엘 우즈”다. 
 

 

은지 씨만큼 드라마틱한 변화를 겪은 아이돌이 또 있을까요. 보컬 트레이너를 꿈꾸다 아이돌로 데뷔하고 배우라는 타이틀까지 얻었는데, 이 모든 일이 2년 사이에 다 벌어졌잖아요.

‘노래하는 걸 좋아하니까 노래 부르는 직업을 가져야겠다, 근데 가수는 적성에 안 맞을 것 같고, 그럼 뭐하지?’ 고민하다 알게 된 직업이 보컬 트레이너였어요. 가수란 직업이 화려하고 좋지만 제가 워낙에 ‘척’하는 걸 못해서요. 앞에 나와서 예쁜 척하고 있을 생각만 해도 너무 어색한 거예요. 그래서 저도 제가 가수가 될 줄 몰랐어요. 연기를 하게 될 거라곤 아예 생각지도 못했고요. 그러니까 데뷔하고도 사투리를 안 고쳤죠. 사투리를 써도 노래 부르는 데 지장 없고, 팬 분들도 그 자체를 캐릭터로 좋아해 주시니까 굳이 안 바꿔도 되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회사에서 캐릭터가 너랑 좀 비슷하니까 한번 읽어보라고 시놉시스를 줬는데, 너무 재미있는 거예요.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오디션 보기 전까지 진짜 열심히 연습했어요. 면접 보러 가서도 “저 완전 잘할 수 있습니다, 시켜만 주세요!” 이랬어요. 근데 막상 맡고 나서는 부담이 너무 컸어요. 한동안은 말 그대로 ‘멘붕’이었어요.


연기를 하게 될 거란 생각도 못했고, 아직 연기자라는 호칭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수줍게 웃으며) 아니, 좋아요. 아! 신나는 변화가 하나 생겼어요. 인터넷에 정은지를 치면 가수, 그리고 탤런트라고 나와요. 지식 백과인가 거기 설명도 정은지는 그룹 에이핑크의 멤버이자 연기자이다, 이렇게 돼있어요. 그게 너무 신기했어요. 투잡, 투잡!

 

하하. 촬영 첫날 NG를 냈을 때, 주눅 든다든가 하지 않았어요?

주눅 들었지만 주눅 든 티를 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기가 진짜 많이 죽었어요. 연기도 처음 하는 데다, 저를 중심으로 상황이 돌아가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 전까진 항상 팀으로 움직였고, 가수들은 보통 다른 그룹하고 같이 방송에 출연하잖아요. 그러니까 저 하나를 위해 엄청나게 많은 스태프 분들이 대기하고, 또 저만 지켜보고 있는 그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문득 여기서 내가 자신감 없이 쪼그라들어 있으면 그것만큼 민폐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끌어 나가는 사람이 자신이 없으면 보는 사람은 얼마나 힘 빠지겠어요.


물론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특별히 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어요? 카메라 테스트를 하던 날 발연기만 안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촬영장에 갔거든요. 근데 그날 제가 어땠냐면 사투리만 말하는 기계 같았어요. 평소 말투인데도 잔뜩 얼어서 ‘버벅버벅’ 난리가 났어요. 그때 스태프 분들 표정이…, 어우! 한숨 쉬는 분도 있고, 피식피식 웃는 분도 있고, 걱정스럽게 보는 분들도 있고, 와, 이대로는 안 되겠는 거예요.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딱 들더라고요. 아, 그리고 처음에는 카메라 앵글이 엄청 신경 쓰였거든요. 내가 어떻게 나올까 걱정 반, 호기심 반이었어요. 근데 그런 거 신경 써봤자 달라지는 것도 없을 거 같고, 그냥 망가지든 말든 죽기 살기로 했어요. 예쁜 척 안 하길 백번 잘했던 것 같아요. (우는 시늉을 하면서) 그런데 지금 엘 우즈는 예쁜 척을 해야 한다고요.


부담감에서 좀 벗어나 촬영장에서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예요?

처음으로 눈물 연기를 찍었을 때가 너무 신기했어요. 제가 평소에 눈물이 많은 편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캐스팅되고 나서 첫 번째로 들었던 생각이 ‘눈물 연기 있으면 어떡하지?’ 였어요. 미리 우는 연습을 해둬야겠다 생각해서 혼자 가만히 있다가도 울어보고 그랬는데, 눈물 한 방울 똑 떨어지는 게 전부인 거예요. 촬영날 현장에서 연습할 때도 눈물이 고이는 거밖에 안 됐어요. 큰일 났다, 오늘 촬영 하루 종일 걸리거나 다른 날로 미뤄지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리허설 때 수술복을 입고 나오는 성동일 선배님(극 중 아빠)을 보니까 제 속에서 무언가 뭉글뭉글 피어오르면서 눈물이 나는 거예요. 처음 느끼는 감정이다 보니 주체가 안 돼서 고개를 숙이면서 우는 제 습관이 나와 버렸어요. 그게 스스로도 진짜 놀랍고 신기했어요. 촬영이 끝나고 차에 앉았는데 ‘와, 이 재미로 연기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고, 제 스스로 뭔가 하나를 깼다는 생각에 엄청 뿌듯했어요. 그날 했던 게 처음으로 와 닿게 연기한 신이었어요.

 

방송에 대한 사람들 반응도 모니터링하고 그랬겠네요?

첫 방송을 지방 행사 갔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봤거든요. 한 손에는 DMB폰을, 다른 손으로는 아이패드를, 두 개를 번갈아 가면서 봤어요. 근데 반응이 실시간으로 안 올라오더라고요. 어어, 많이 안 보시나? 일단 인터넷을 끄고 방송을 봤죠. 방송을 보고 나서 저는 완전 쇼크 먹었어요. ‘아, 이거 좀 아인데 나 큰일 났네’ 걱정이 앞서는 거예요. “야이 개새야” 같은 욕을 거침없이 하는 여고생 캐릭터는 별로 없었잖아요. 내가 한 연기가 맞나 싶기도 했고요. 그런데 ‘빠순이 빙의’ 이런 기사가 뜨니까 당황스러운 거예요. 사람들 반응이 너무 뜨거워서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당황스러웠지만요.

 


사람들의 관심에 비례해 부담감도 커질 텐데, 이번엔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네요.

저한테는 뮤지컬 자체도 도전이지만, 엘 우즈라는 캐릭터도 큰 도전이에요. 시원이가 그냥 ‘된장’녀였다면 엘 우즈는 진짜 ‘된장녀’잖아요. 저는 물론 시원이에 가깝죠. 여중, 여고에 보면 남자애처럼 하고 다니는 애들이 꼭 있잖아요, 그게 저였어요. 치마도 스무 살이 돼서 입고 다니기 시작한 걸요. 그래서 엘 할 때 제 자신을 많이 버리고 있어요. 그리고 표준어로 하는 첫 연기잖아요! 표준어로 예쁜 척을 해야 해서 엄청 신경이 쓰여요. 얼마 전까진 뮤지컬 연습할 때만 표준어를 썼는데, 안 되겠더라고요. 평소에도 표준어를 쓰자 해서 지금도 연습 중인 거예요. (은근한 말투로) 괜찮아요?


그러게 엘 우즈는 여고생 정은지가 봤을 때 ‘어머 쟤 뭐야’ 싶은 캐릭터였겠어요.

재수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거예요. 드라마 전체로 보면 그런 애가 아니거든요. 그냥 ‘나랑 반대인 애, 귀엽긴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애’ 이렇게 생각했을 거예요. 어쨌든 지금은 제가 엘이니까.

 

은지 씨가 생각하기에 엘 우즈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뭐인 것 같아요?

순수한 거요. 사람들 앞에서 남자 친구한테 “기억나니, 작년 여름방학 짜릿했던 밤들” 이런 표현을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애들이 많지 않거든요. 저는 엘이 순수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 같아요. 혼자 속아서 바비 걸 복장으로 파티에 갔다 망신당하는 장면도 그래요. 사실 코스튬 파티를 한다고 하면 누구나 한번쯤은 의심할 법하잖아요. 저 같으면 옷을 챙겨서 갔을 거거든요. 영리하지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영리하게 머리를 안 쓰고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그 마음이 너무 예쁜 것 같아요.

 

뮤지컬을 하게 될 거란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재미있겠다 싶었던 점은 뭐예요?

일단 노랫말로 감정을 주고받는다는 거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었어요. 뮤지컬 재미있겠다, 하고 싶다, 막연하게 생각만 했는데 이렇게 큰 역할을 하게 될 줄 몰랐어요. 엘이 거의 상황을 끌고 가는 역할이잖아요. 이번에도 정신 바짝 차리고 폐 끼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해야겠더라고요. 아, 조금 전에 인터뷰하면서 작은 목표가 하나 생겼어요. 첫 공연 커튼콜 때 웃기 싫은데 웃는 게 아니라 진짜 재미있어서 이번 공연 잘했다는 생각으로 웃고 싶어요.

 

뮤지컬이기 때문에 특별히 신경을 쓰고 있는 점도 있어요?

어제 연습 중에 제가 다리 모양을 신경 안 쓰고 편하게 앉아 있었어요. 그랬더니 조연출님이 “얘, 너 똑바로 앉아” 이러시는 거예요. 그때 아, 맞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게 뮤지컬이라는 걸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됐어요. 작은 행동 하나하나도 관객들에게는 그대로 다 보이는 거잖아요. 공연이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끊김 없이 ‘다이렉트’로 가야 하는 거고. 대사 실수를 하더라도 그 안에서 어떻게든 해야 하니까 정신 제대로 차리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앞으로 어떤 무대에 서든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있어요?

사람은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니까 거기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는 주의는 아니에요. 하지만 의무적으로, 내 직업이 가수니까 노래를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니까 노래하는 거지, 이 생각은 안 변했으면 좋겠어요. 일이 마냥 재미있을 순 없지만, 노래나 연기를 하는 순간만큼은 그 상황에 집중해서 즐겁게 하고 싶어요. 

 

어디서든 오래오래 활동하는 정은지를 볼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생기는데요?

네, 안 되면 집에서라도 활동할 거예요. 나중에 아이돌 가수로서의 삶이 끝나도 집에서 노래하고 그래야지. 하하.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10호 2012년 11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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