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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기존 작품들과 비교해 본 <완득이> [No.112]

글 |박정환(공연 칼럼니스트) 사진제공 |에이콤 인터내셔널 2013-01-08 5,727

어느 영화와 소설, 뮤지컬이 하나의 뿌리로부터 비롯된다면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현재 공연하는 작품 중 원작 소설이 영화와 뮤지컬로 제작된 작품은 <레 미제라블>과 오늘 소개하는 <완득이>다. <레 미제라블>이 두 달여 사이에 출판가와 영화, 뮤지컬과 연극이라는 서로 다른 네 가지 장르로 포문을 연 반면, <완득이>는 출판과 영화, 뮤지컬이라는 세 장르에서 서로 시점이 다르게 소개되었다. 김려령 작가의 소설 『완득이』를 먼저 작품화한 건 영화다. 하지만 영화가 2011년 개봉하기 전인 2008년부터 뮤지컬은 이미 판권을 체결하고 무대에 올리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3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무대에 올라온 작품인 셈이다.


<완득이>를 관통하는 주된 정서는 주류의 정서가 아니다. 마이너리티, 소수자, 비주류의 정서가 <완득이>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가난과 외국인 노동자, 다문화라는 비주류의 정서가 하나도 아니고 동시다발적으로 형성된다.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뮤지컬 <빨래>와 접점을 갖는다. 경제적 소수자, 외국인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두각시킴으로써 한국의 다문화 가정 문제를 툭툭 건드리는 것처럼 <완득이>도 다문화 가정 혹은 외국인 노동자라는 마이너리티의 정서를 프리즘으로 적극 활용한다. 요즘 뮤지컬에서 배경으로 활용되는 투사 방식이나 미니멀리즘, 모더니즘한 무대가 아니라 투박하리만치 느껴지는 수작업으로 이뤄진 무대 배경만 보더라도 <완득이>는 <빨래>와 동일한 정서를 공유하고 있다. <빨래>와 <완득이>의 공통분모 중 또 다른 하나는, 외국인이라는 타자가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억압당하는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타자는 알지 못하는 이방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경계심을 초래하기 마련이지만 <완득이>와 <빨래>의 이방인은 경계해야 할 위험한 대상이 아니라 도리어 한국인에게 억압받고 고통당하는 피해자의 위치에 선다. <완득이>의 핫산은 불법 체류 감시 공무원에게 쫓기다가 결국에는 아내와 헤어져 본국으로 추방당한다. <빨래>의 솔롱고 역시 악덕 고용주에게 임금을 체불당한다.

 

 

<완득이>에서 특이한 건 도완득의 담임교사인 이동주가 자발적으로 비주류의 정서 가운데로 풍덩 뛰어드는 주류 세력이라는 점이다. 물론 비주류로 뛰어드는 주류 캐릭터가 동주 한 명만은 아니다. 퀸카 정윤하 역시 완득의 매니저를 자처하다가 완득이의 세계 안으로 빠져드는 주류 캐릭터니 말이다. 동주는 아버지에 대한 ‘반감’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로부터 탈출해서 옥탑방에 세 들어 사는 캐릭터다. 손가락이 세 개나 잘린 외국인 노동자를 변변한 치료 하나 하지 않은 채 본국으로 내쫓는 아버지의 비인간적인 처사에 반기를 들어서다. 프롤레타리아 완득이의 입장에서는 부르주아 아버지의 권력에 반기를 드는 동주가 순수하게 보인다기보다는, 프롤레타리아인 척하는 부르주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2막에서 밝혀지는 동주와 아버지 사이에 형성되는 냉전 기류는 아버지를 향한 동주의 정신적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읽을 수 있고, 동시에 왜 동주가 외국인 노동자 핫산에게 그토록 감정이입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는 창작뮤지컬에서 흔히 드러나는 증상인 ‘개연성 결핍’을 극복하는 플롯으로 작용한다.

 

성장담이라는 프리즘으로 조망하면 <완득이>는 <굿 윌 헌팅> 혹은 <파인딩 포레스터>와 궤를 같이 한다. 멘토로 말미암아 제자가 온전한 방향으로 성장하는 성장담 말이다. 그런데 완득이의 성장담을 <파인딩 포레스터>에서 발견되는 ‘은둔자 끌어내기’라는 프리즘으로 바라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관찰된다. 동주가 완득이를 부를 땐 그냥 부르지 않는다. 항상 “얌마! 도완득!”이라며 육두문자가 입가에서 떠나질 않는다. 완득이 역시 이런 동주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다. 오죽하면 “제발 똥주 좀 죽여주세요!”라는 기도문을 입에 달고 살까. <파인딩 포레스터>의 윌리엄 포레스터는 멘토이면서 동시에 세상으로부터 숨어 지내는 은둔자다. 세상을 회피하는 은둔자 스타일의 멘토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건 제자가 아닌 악역인 로버트 크로포드다. <완득이> 속 동주가 완득이를 향해 육두문자를 내뱉고 거칠게 훈육한다는 건, 세상을 회피하고 살다가 마침내는 조폭이 되고 말 팔자를 걷게 될 제자 도완득을 세상으로 끄집어내기 위한 ‘가장된’ 멘토링이다. 선생이 제자에게 스스로 ‘밉상’이 되는 길을 택한 셈이다. <완득이>는 스승이 제자를 세상으로 이끄는 방법으로 자신이 ‘악역이라는 가면’을 쓴다. <파인딩 포레스터>는 ‘악역’이, <완득이>는 ‘악역을 가장한 멘토’가 은둔자를 세상으로 이끈다.

 

 

완득이의 세상을 향한 분노, 혼혈이라는 정서적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해 멘토 동주가 이끄는 세상으로의 인도는 킥복싱이라는 링의 방식을 통해서다. 이 부분은 영화 <록키> 시리즈 혹은 연극 <이기동 체육관>과 궤를 같이 한다. ‘흘린 땀방울만큼 체력이 되고 근육으로 붙는’ 링의 세계만큼은 가난 혹은 다문화 가정에 대한 편견이라는 중력이 작용하지 않는다.  세상을 향한 분노를 맘껏 발산할 수 있기에 질풍노도 시기의 완득이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득도의 장소’가 된다. 링이라는 득도의 장소를 스승 동주로부터 제공받지 못했다면 완득이는 윤하를 여친으로 둘 수도 없었을 테고 마침내는 조폭 똘마니로 감방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운명에 처하고 말 것이다. 제자를 향한 스승의 변형된 멘토링은 사제지간의 정을 넘어 제자로 하여금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 학업 성취는 과외선생의 몫이 되어버리고, 인성교육은 학교 현실에서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이데아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동주의 제자를 향한 따뜻한 시선은 완득이로 하여금 더 이상 세상을 삐딱한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않도록 만들어준다. 동주와 완득이가 형성하는 온정주의 및 진한 페이소스는 관객에게 따스함으로 다가오기에 충분하다.

 

올해는 라이선스 뮤지컬이 강세를 떨친 해이자 동시에 우수한 창작뮤지컬이 봇물처럼 쏟아진 해이기도 하다. 기존 창작뮤지컬의 강자인 <셜록홈즈>나 <식구를 찾아서>는 물론이고, 초연보다 세련된 모습으로 진일보한 <모비딕>, 그리고 <번지점프를 하다>처럼 귀가 호강하는 주옥같은 창작뮤지컬이 쏟아진 한 해였다. 여기에 한 편을 더 추가해야겠다. <완득이>다.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고 관람했지만 작품의 완성도와 음악의 감미로움이 필자의 비판력을 무디게 만든 뮤지컬이다. 윤하의 매력을 부각하기 위해 여학생 캐릭터에는 어울릴 법하지 않은 과도한 섹슈얼리티를 부각한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을, 페이소스를 불러일으키는 연출, 관객의 감수성을 증폭하는 호소력 충만한 넘버의 장점은 저렴한 티켓 가격과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외부 필자의 기고는 <더뮤지컬>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2호 2013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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