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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리뷰] 감각으로 완성된 긴장과 어둠의 아름다움 <레베카> [No.113]

글 |정수연(한양대 연극영화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EMK뮤지컬컴퍼니 2013-03-04 4,609

세 시간이 후딱 지나갔다!


각자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의 기준이란 게 있다. 누구는 대본의 짜임새, 또 누구는 음악의 완성도, 또 다른 누군가는 배우의 연기를 각각 뮤지컬의 고갱이로 삼을 것이다. 다 맞다.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룰 때 작품은 명작이 된다. 예전에는 이 가운데 어떤 요소가 ‘가장’ 기본이 되는 걸까, 이런 걸 많이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요즘에는 공연 내내 무대에 집중하게 하는 작품이야말로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관객의 시선을 붙들어두는 공연의 힘은 대본이든 음악이든 배우이든 개별적인 것에서 나온다기보다는 그것들이 어우러지는 맥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뮤지컬이야말로 개별의 완성도가 아니라 맥락의 일관성이 더 중요한 장르 아니던가. 뮤지컬은 혼융의 방식으로만 완성되는 멋진 장르이다.

 

<레베카>는 뮤지컬의 이러한 특성을 백퍼센트 증명하는 작품이다. 세 시간에 육박하는 시간이 후딱 지나가버리더라. 그것도 관객의 집중도를 흐트러뜨리지 않으면서 말이다. 뮤지컬 <레베카>의 미덕은 그 완성도의 밑그림이 대본이나 음악, 배우 등 어느 하나에 집중되어 있지 않다는 데 있다. 다소 성급한 이야기는 무대가 자아내는 분위기로 충분히 메워지고, 무대를 지배하는 어두운 색채는 음악을 통해 내면의 격정으로 이어지면서 그 아름다움의 층위를 넓힌다. 무대와 음악을 비롯한 <레베카>의 무대언어는 지금껏 봐왔던 어떤 작품보다도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기에 또한 감각적이다. 감각적 요소가 이야기를 압도한다는 점에서, 그러나 그러한 압도가 이야기를 해치기는커녕 훌륭히 보완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빛난다. 사실 스릴러라는 장르에서 이야기가 무대언어에 주도권을 내줬다는 게 그리 내세울 만한 얘긴 아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레베카>에서는 오히려 그게 맞다.

 

‘유령’이 헤집는 실재의 매혹

 

조금 더 생각해보자면, 이 작품에서 이야기가 아니라 무대와 음악의 분위기가 더 중요해질 수밖에 없는 까닭은 이미 작품 안에 배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미 죽어 사라진 ‘레베카’, 즉  ‘부재함으로 존재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레베카는 생물학적으로 분명 죽었지만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회귀하는 일종의 강박과도 같은 존재이다. ‘레베카’는 맨들리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유령인 셈이다. 실체가 없기에 감각할 수 없지만 바람소리만으로도 존재감을 드러내는 감각 가능한 존재. 두려움은 이 역설에서 비롯된다. 유령이란 존재는 우리의 시선에 포착되지 않는 반면 우리는 유령의 시선에 사로잡혀버리니, 유령으로서의 ‘레베카’는 맨들리의 사람들을 지배한다. 어떤 이에게는 죄책감과 증오를, 어떤 이에게는 사랑과 숭배를, 또 어떤 이에게는 열등감과 패배감을 불러일으키며 ‘레베카’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실체가 아니지만 그 어떤 실체보다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두려움과 매혹됨. <레베카>에서 이 두 가지의 기원은 같다. 

그래서 유령으로서의 ‘레베카’가 그려지는 1막의 분위기는 사뭇 음산하지만 그만큼 아름답다. 이 작품의 화자인 ‘나’의 사랑스러움이 사족같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물론 이렇게 보인 데는 ‘나’(임혜영)의 존재감이 레베카의 분신격인 ‘댄버스’(옥주현)에 확연히 밀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옥주현의 ‘댄버스’가 디테일한 반면 임혜영의 ‘나’는 전형적이라는 점도 또한 이유일 것이고. 하지만 ‘레베카’의 존재감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한 시청각적 무대언어가 도드라져야 하는 만큼 그러한 정서와 결을 같이 하는 인물인 댄버스가 강조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할 순 없을 게다. 그러니까 단순히 연기력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 그렇게 배치된 거라는 얘기다. 어차피 뮤지컬에서 ‘나’의 자격지심은 심리적 묘사의 바깥에 자리 잡고 있으니 말이다.    

 

1막에서 ‘레베카’의 존재감을 극대화시키는 것은 댄버스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이미지이다. 태양을 피하듯 음울함에 사로잡힌 맨덜리, 그 저택을 감싸는 거친 파도와 불길한 먹구름, 레베카의 화려함을 보여주는 듯한 강렬한 색채, 레베카의 목소리 같은 바람소리 등등. 이러한 이미지는 사건이라는 이야기의 질서보다 앞선 두려움과 경외심의 실재를 구성한다. 이 작품의 무대 디자인과 음악이 빛나는 부분이 바로 여기에서다. 음산함을 불러일으키는 먹구름과 파도의 영상은 이 작품의 공간을 물리적으로뿐 아니라 심리적인 영역까지 확장시킨다. 무대 위의 영상이 사족도 아니요 과잉도 아닌, 여러 의미의 극적 공간으로 파고든 예로 이만한 작품이 또 있을까. 이러한 영상의 활용은 무대 공간의 운용과 맞물려 그 효과가 극대화된다. 레베카의 방에서 발코니로 이어지는 무대 회전을 이용한 공간창출을 보시라. 정말 멋지다. 르베이의 음악이야 이미 여러 편의 작품을 통해 만끽한 바 있으니 따로 말할 필요 없을 거다. 특히나 넘버 ‘레베카’는 압권이다. 이 작품의 시청각적 이미지는 이야기를 압도한다. 

 

‘레베카’가 포착된 순간

하지만 이러한 압도는 ‘레베카’가 드러나는 직전까지이다. 2막의 사건전개는 빠르고 흥미진진하지만 1막이 자아낸 긴장을 따라오지 못하는 것은 ‘레베카’가 실체의 옷을 입기 때문이다. 물리적으로(시신이 발견된다), 그리고 도덕적으로(부도덕한 음탕함!) ‘레베카’의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극의 흐름은 추리극처럼 흘러간다. 추리란 눈에 보이는 단서를 따라가는 지적 싸움이니만큼 이제 ‘레베카’의 존재는 부재의 공백을 벗어날 수밖에 없다. ‘레베카’라는 유령이 사람들의 시선에 포획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 유령은 사라진다. 유령이 사라진 공간에 들어서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질서이다. 이제 죄책감은 정당한 복수로, 사랑과 숭배는 배신감으로, 패배감은 자신감으로 바뀐다. ‘레베카’가 지배했던 공간은 사라지고(불에 타버린 멘들리!) 그 폐허에는 지중해의 밝은 태양빛이 비친다. 유령 ‘레베카’와의 시선의 싸움에서 승리한 이는 다름 아닌 ‘나’이니, 질서와 명증함의 세계가 승리한 셈이다. 이야기는 다시 동화로 돌아간다. ‘둘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레베카>가 스릴러라는 장르의 이름을 온전히 덧입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르에 걸맞는 명쾌한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심리의 영역에서 사건의 영역으로 이야기의 축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노선을 바꾸는 극적 전략이 급작스러운 까닭도 이 때문일 게다. 그렇게도 감추고픈 비밀의 진상이 막심의 고백 한 방에 줄줄 드러나는 것도 그렇고, 갑작스레 등장한 불륜남의 통속적인 폭로도 그렇지만, 놀라운 존재감으로 가득했던 댄버스가 배신감에 자멸하는 모습까지도 느닷없이 싱거워 보이긴 마찬가지다. 사실 이 작품의 매력은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이미지와 분위기에 있지 실타래처럼 풀려나가는 이야기의 명쾌함에 있지는 않다. 그래서 본격적인 사건의 추리로 들어서면서 이 작품의 긴장감은 스르르 풀려버리는 거다.

 

성공적인 브랜드

 

그렇다고 해도 뮤지컬 <레베카>는 잘 만들어진 작품임에 틀림없다. 불필요해 보이는 인물의 배치나(베아트리체는 왜 나온 걸까?), 극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넘버에(음울한 집에서도 하인들은 해맑다!), 댄버스만 도드라지는 인물간의 불균형이 있다손 치더라도 작품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흔들기에는 그 틈이 미미하다. 작품의 반전이 살아나지 못한 것은 아쉬우나 그건 레베카의 죽음이 노래 한 곡으로 다소 허무하게 드러나는 순간부터 비롯된 것이니 뭐라 말할 게 못된다.
작품 자체도 재밌지만 작품을 만든 이들도 만만찮게 주목해볼 만하다. 배우들의 놀라운 기량에 한국 스태프들의 역량도 눈여겨볼 만하고, 무엇보다 연달아 완성도 있게 작품을 제작한 EMK뮤지컬컴퍼니의 뚝심이 놀랍다. 명실상부한 뮤지컬 브랜드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거다. 뮤지컬 <레베카>를 단순히 소개하는 데 급급하지 않고 한국 무대의 작품으로서 고급스럽고 완성도 있는 공연으로 이끈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그리고 아직 안 본 분들에게는 권유를. 보시라. 극장을 나서는 순간부터 ‘레베-카!’를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실 게다.

 

 

※외부 필자의 기고는 <더뮤지컬>의 편집 방침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3호 2013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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