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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서편제> 소리를 죽이러 떠난 기억의 여정 [No.84]

글 |박병성 사진제공 |피앤피컴퍼니 2010-09-21 6,181

한국 영화로는 처음으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서편제>가 뮤지컬로 태어났다. 사라져가는 우리 소리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것을 지켜내려는 유봉의 장인정신이 돋보였던 영화였다. 그러나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소리꾼들의 이야기를 무대라는 한정된 공간으로 가져오는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다. 게다가 노래로 드라마를 풀어가는 뮤지컬이란 장르 속에 판소리를 포용해야 하는 구성이다. 이 난해한 작업을 위해 작가 겸 연출가 조광화가 극작을 맡고 ‘보고 싶다’ 등을 작곡한 대중가요 작곡가인 윤일상이 뮤지컬에 도전장을 내밀었으며, 판소리 구성은 젊은 소리꾼 이자람이 맡았다. 이자람은 송화 역으로도 참여한다. 유봉과 동호 그리고 송화, 단출한 세 명의 방랑기를 뮤지컬로 만드는 작업의 총 지휘는 연출가 이지나가 맡았다. 이지나 연출에게 뮤지컬 <서편제>에 대해 들어보았다.

 

 

무대 세트를 한지가 너풀거리는 벽(이지나 연출은 ‘지전’이라고 표현했다) 여섯 개로 고풍스러우면서도 모던한 느낌을 주었다. 영화를 뮤지컬로 옮길 때 공간은 항상 어려운 문제이다. 특히 <서편제>같이 유랑하는 작품일 경우 무대로 옮기기가 싶지 않다. 지금 무대는 추상적이면서도 효과적이었다. 무대에 고민이 많았을 것 같은데, 무대 컨셉은?
주인공은 두 명밖에 없지만 굉장히 긴 세월을 다루고 있다. 그 세월을 뛰어넘는 것을 표현하려면 공간이 예술의전당 토월극장 정도의 깊이가 필요하다. 연강홀은 <컴퍼니>나 <텔미 온어 선데이>처럼 고여 있는 작품을 할 때는 좋은 극장이지만 흘러가는 작품을 하기에는 너무 힘든 공간이다. 연강홀 무대에서는 흘러가는 시간을 표현하기도 힘들고 포켓이 없어서 대형 세트가 들어올 수도 없다. 박동우 선생님이 고민을 많이 해서 지전의 움직임에 따라 공간을 나타내고 장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찾았다.


중앙에는 회전 무대를 두고 무대 뒤편에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해 영화처럼 두 장면이 교차하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마치 영화 편집처럼 빠른 전개가 가능하게 했다.
상수에 등장해서 연기하고 하수로 퇴장하는 방식을 많은 작품에서 반복하는데 이게 너무 촌스러워 보였다. 그런 브로킹을 깨고 싶었다. 이번에 새롭게 시도해봤는데 앞으로 내 작품에서 더 많이 시도할 것이다. 새로운 등퇴장을 할 수 있는 방식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러티브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어느 정도 경륜이 쌓이면 연출가의 고민은 달라진다. 좋은 스토리텔러의 짜여진 극본이나 배우의 대사만으로도 감동을 줄 수 있지만 연출가는 그것과는 별개의 지점에서 매력을 느끼는 시기가 온다. 연출가로서 할 수 있는 테스트를 다양하게 해보고 있다.


등장인물을 소개하고 앞으로 사건의 배경을 제시하는 도입부가 굉장히 복잡해, 명확하지 않게 전개되고 있다. 이를 테면 어린 동호와 청년 동호, 그리고 송화를 찾아가는 노년의 동호가 마구 뒤섞여서 등장한다.
노년의 동호가 송화의 소식을 듣고 길을 떠나는 이후의 과정은 모두 동호의 기억의 여정이다. 노년의 동호가 기억 속에서 어린 송화와 엄마를 만나고 어렸을 때의 자신을 그림자를 통해 보고 있는 것이다. 노년의 동호에게 분장을 하게 하면 굉장히 쉽게 설명된다. 그런 식이라면 작품 전체가 사실주의로 가야 한다. 이 작품의 컨셉과 맞지 않다. 동호의 기억의 여정이기 때문에 동호와 연관되지 않은 기억은 없다. 송화가 눈이 먼 장면은 동호의 기억에 없는 장면이지만 작위적으로 동호의 기억과 얽어매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판소리가 생명력을 잃어가는 현상은 한국의 시대적 배경이 구체적으로 보여질 때 힘을 받는다. 영화에서는 유봉이 전통이 무시되는 시대에서 끝까지 사라져가는 판소리를 지켜내려는 의지가 감동적이었다. 뮤지컬에서는 무대나 작품 전체에서 시대적 배경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판소리 이야기를 하려고 하진 않았다. 영화에서는 유봉이 판소리를 지키는 인물이었다면 뮤지컬에서는 송화다. 뮤지컬의 송화는 판소리를 상징한다. 송화 대사에는 다 그런 것이 담겨 있다. 왠지 모르겠지만 떠나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송화라든가, “자네 소리 들을 수 있나? / 저는 항상 제자리에 있습니다”와 같은 대사들, 또 “잊혀져 가고 있지만 나 항상 여기 있어줄게 혹시 기억나면 나 찾아주오” 같은 송화의 노래에서 그녀가 판소리를 상징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판소리는 늘 우리 곁에 있었는데 우리가 정신없이 살다보니 잊고 지낸 것이다. 송화를 통해 판소리 너가 항상 거기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고 싶었다.


동호와 유봉은 대립하는 인물로 나온다. 대립의 축은 예술관인가, 아니면 어머니를 죽인 아버지에 대한 반항인가? ‘뜨거운 햇덩이’나 ‘묶여있다’는 가사가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굉장히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원작에서는 죽이고 싶은 아버지와의 갈등이다. 동호는 아버지가 싫어서 소리도 싫어진 아이다. 원작에서 유봉은 해를 상징한다. 유봉 때문에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돌로 찍어 죽이고 싶어 한다. 우리가 추구한 것은 유봉이 지키려는 판소리와 대립하는 인물로 동호를 설정한 것이다. 악단이 지나가는 장면에서 유봉은 짜증을 내지만 동호는 관심을 가지고 바라본다. 길을 걸을 때도 라디오를 들으면서 간다. 동호는 아버지가 싫어서 판소리도 싫어하게 되고 내가 하고 싶은 소리를 찾겠다고 떠난다. 평상 위에서 유봉이 판소리를 하고 동호는 외면한 채 노래하는 장면은 판소리와 서양 음악이 충돌하는 장면을 만든 것이다.


송화의 소리가 무르익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어야 하는 구조다. 영화에서도 오정해 이외에도 안숙선, 김소희 명창의 소리를 사용했다.
뮤지컬에서는 배우들의 역량에 맡긴다. 송화의 소리가 점점 무르익어서 마지막 장면에서 ‘심청가’를 부를 때 소리를 찾은 것을 보여준다.


그 노래를 부르기 전에 동호와 송화가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송화가 동호에게 “그 소리를 죽였소?”라고 묻고, 동호도 송화에게 “그래서 그 소리를 죽였소?”라고 똑같이 묻는다. 송화에게는 ‘찾았소’가 맞지 않나?
‘극복했느냐’는 뜻이다. ‘찾던 소리를 너의 혼으로 극복했냐.’ 송화를 사로잡던 소리에서 이제 벗어났냐는 의미이기도 하고 ‘인생 모두를 뒤흔들던 소리를 없앴느냐’고 묻는 것이다. 원작에서도 ‘죽였소’라고 나온다. ‘찾았소’보다 더 강렬한 의미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송화와 동호가 똑같은 질문을 하니까 송화가 소리를 죽였다는 의미가 반감된다.
우리도 고민하는 지점이다. 그런 지적이 있었고 그 부분은 고민 중이다. ‘죽였소’를 다른 표현으로 바꾸고 싶지는 않고 동호 부분을 빼고 송화에게만 ‘죽였소’ 하고 물을 수도 있다.


판소리와 서양 음악이 사용된다. 음악의 컨셉은 무엇이었나?
‘국악과 양악이 만났을 때 효과가 없다면 섞어 사용하지 말자’는 게 컨셉이었다. 한때 퓨전이라고 해서 재즈와 국악의 만남 같은 음악이 유행했다. 그런 것은 피하고 싶었다. 서로의 개성을 죽이는 것은 하지 말고 공생하는 선에서 사용했다.

윤일상 작곡가의 노래는 멜로디가 쉬우면서도 귀에 잘 들리고 아름답다. 그런데 대부분 개인의 감정을 토로하는 곡이다. 음악의 드라마성이 약하다.
윤일상의 첫 작품이다. 20년의 작업이 하루아침에 변하기는 힘들다. 초연이고 지금은 다양한 시도를 한 것이다. 지금까지 창작뮤지컬을 제작해오면서 드라마가 강하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음악을 만들었는데 대중이 반응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대중을 아는 사람에게 곡을 맡겨본 것이다. 앞으로 3개월 동안 대중들에게 어떤 반응이 나오게 될지 지켜볼 것이다. 결국 대중이 판단해줄 것이다. 비범한 작곡가이니 그 결과에 따라 앙코르 공연을 하게 된다면 스스로 새로운 것을 찾지 않겠나.


작품의 전체 톤은 현대적이고 상징적이다.
<서편제>라고 하면 처음부터 고리타분하다고 여긴다. 사람들이 판소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깨고 싶었다. 판소리를 보여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서편제>는 판소리 하는 여자애의 삶을 다룬 뮤지컬이다.


유봉이 굉장히 사연이 많은 인물인데 뮤지컬에서 유봉은 고통이 한이 되어 소리가 된다는 예술관만을 고집하는 굉장히 평면적인 인물로 느껴진다.
그런 굴곡을 전부 보여주기 위해서는 6시간짜리 작품이 나온다. 송화 이야기도 더 있어야 하고 보여주어야 할 것이 많다. 내 특기는 선택과 집중이다. 내가 작품할 때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린다. 난 유봉에게 이야기를 충분히 주었다고 본다.

초반부는 판소리를 끝까지 지켜나가려 하는 유봉이, 중반부는 그 뜻을 이어받아 가려는 대모 같은 송화가 그리고 마지막은 동호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데, 전체적인 극 구성은 동호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이 작품은 누구의 어떤 이야기인가?
동호의 시점이지만 결국 동호의 기억 속에 있는 송화의 이야기이다.

 


유봉의 죽음 이후 동호와 송화가 만나 판소리를 하기 전까지 등장하는 장면에서 자꾸 동호에 대해 설명하려는 인상을 받는다.
동호가 아내와 소파에 앉아 있는 장면은 해금이의 아버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정보를 주는 장면이다. 그다음 나이트 장면에 대마초를 하면서 굉장히 선정적인 춤을 춘다. 마약을 한 동호의 기억 속에 송화가 성적인 이미지로 나타난다. 이제 몸도 마음도 가질 수 없는 송화와 동호의 관계를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아들인 해금이와 부르는 노래에서 동호가 젊은 시절 기타를 매고 송화를 찾아 헤맸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것은 동호를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호를 통해 송화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게는 여전히 송화보다는 동호를 설명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이 작품은 마지막 동호와 송화가 만나는 장면으로 향해 가는 작품이다. 마지막 장면의 판소리가 많은 것들을 해결해준다. 그런데 마지막 판소리 장면 직전에 송화가 계속 등장하면 무슨 임팩트가 있겠나. 마지막 장면에 힘을 모아주어야 했다. 송화의 판소리가 강하게 남기 위해서는 그전에 송화의 의식은 남겨두되 직접적인 출연은 자제해야 강조될 수 있다. 마지막 장면을 위해서 동호의 이야기지만 결국 모든 것이 송화와 연결되어 있는 이야기를 통해 송화의 흔적만 남겨 두었다. 이 작품은 결국 모든 것이 마지막 판소리를 향해 달려간다. 그것을 위해서 송화가 전면에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4호 2010년 9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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