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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브로드웨이 42번가> 박상원·남경주, 무대에서 배운 인생 [No.116]

글 |이민선 사진 |김호근 2013-05-27 5,767

박상원과 남경주, 두 사람은 연기를 시작한 지 30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TV와 무대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30년간 일에 매진해 온 그들의 일상은 배우라는 직업에 매몰돼버린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웬걸, 그들은 충실한 일상이 연기에 반영할 풍부한 재료를 제공한다고 입을 모았다.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는 박상원, 악기를 배우고 책을 읽는 남경주.
자연인으로서의 삶도 배우로서의 삶도 이보다 더 열정적일 순 없다.
오랜 연륜의 두 배우가 들려주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누군가의 미래.

 

 

스타일리스트 | 김하늘 메이크업 | 차윤경 헤어 | 김홍민

 


앞으로도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주리라는 확신, 박상원                                                                           

촬영을 준비하며 스튜디오 한가운데 서 있는 박상원을 보며 멀찍이 서 있던 스타일리스트가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릴 때 정말 정말 좋아했던 배우인데! 강우석 검사님! 너네 강우석 검사님 모르니?” 스타일리스트보다 한참 어린 어시스턴트들은 그 유명했던 TV 드라마 <모래시계>를 모르는 모양이었다. 18년 전에 방영했던 것이라 20대 초반에게는 생소하겠지만, 30대 이상이라면 ‘본방사수’에 사명감을 갖게 만들었던 ‘퇴근시계’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여명의 눈동자>와 <첫사랑>, <모래시계>를 비롯한 많은 히트작들을 통해 박상원은 지적이고 착실한 신사의 대명사가 되었다. 20년이 지났지만, 그는 과거의 인상 그대로 여전히 교양 있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남아있다. 촬영장에서도 그는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으며 한결같이 점잖은 태도로 인터뷰에 응했다. 조금은 가식이 아닐까 폄하해보려 해도, 그토록 오랜 시간 유지해온 모습이라면 그것은 진짜가 되고도 남았으리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0년 전 장하림과 강우석을 기억하는 팬들을 결코 배반하지 않는 모습 덕에 이 중견 배우는 더욱 폭넓은 신뢰를 얻고 있는 듯하다.
브라운관 속 배우로 더욱 익숙하지만 박상원은 1979년 현대극장 제작으로 초연했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에서 배우로 데뷔했다. 1986년 MBC 공채 탤런트로 뽑힌 후 TV 드라마에서 오랜 전성기를 누렸지만, 그는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와 <에비타> 등 연기의 고향이었던 무대에도 종종 모습을 드러냈다. 5월에 막을 올리는 <브로드웨이 42번가>는 벌써 세 번째 출연이다. 그가 맡은 줄리안 마쉬 역은 1930년대 브로드웨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연출가. 인지도로 보나 존재감으로 보나, 박상원 역시 줄리안 마쉬 못지않다. 게다가 <브로드웨이 42번가>는 한 편의 뮤지컬을 준비하고 무대에 올리는 내용을 담고 있어, 박상원은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작품”이라 말했다. 무대 위에 선 배우들과 무대 아래의 스태프들을 주인공으로 한, 바로 그와 그 주변의 이야기라 좀 더 몰입이 잘되고, 좋은 공연을 위한 그들의 노력과 애환을 보여줄 수 있어 더욱 남다르게 느껴진다고. 박상원과 줄리안 마쉬의 교집합은 이게 다가 아니다. 베테랑 연출가인 줄리안 마쉬는 배우들에게 브로드웨이에서 빛나고 싶다면 겸손하고 성실하게, 열심히 땀 흘리라고 조언한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기본 중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다. “마쉬가 (신인 배우인) 페기에게 하는 이야기가, 내가 처음 연기를 배울 때 스승님께 들었던 것과 같다. 이젠 내가 줄리안 마쉬가 되어 후배 또는 동료들에게 하는 조언이기도 해서 무척 공감이 간다. 뿐만 아니라 줄리안 마쉬를 연기하는 내가 나 자신에게 되새기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 빅밴드가 연주하는 음악과 경쾌한 탭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굉장히 유쾌하고 흥겨운 작품이지만, 그 안의 대사들은 무척 가슴에 와 닿는다.”
35년 전, 박상원은 갑작스레 공연 출연이 어려워진 선배 유인촌을 대신해 며칠 만에 대사와 연기를 익히고 연습해 빌라도 역으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무대에 올랐다. 그야말로 남자 페기 소여였던 셈. 그런 그가 지금은 줄리안 마쉬와 같은 위치에 올랐다. 그가 과거에 꿈꾸었던 모습과 현재의 모습에는 얼마만큼의 간극이 있을까. “지금의 모습 그대로를 바랐던 것은 아니지만, 현재 나 자신이 내가 그렸던 배우의 궤도를 이탈하지 않고 내 꿈의 윤곽 안에 있는 것 같아 무척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30년간 변함없는 열정으로 막연했던 꿈을 점점 더 선명한 현실로 바꿔놓았다. 그가 이렇듯 만족스러운 자평을 할 수 있는 이유는 흐트러지지 않고 늘 긴장감을 유지하는 태도, 그렇지만 결코 조급해하지 않는 마음에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해보았다. “나는 아주 우수한 기록으로 골인하길 바라지 않는다. 뒤에 있던 사람이 나를 앞서가든, 앞서가던 사람이 나보다 뒤처지든 상관없이, 난 그저 내 페이스대로 뛰어서 건강하게 완주하고 싶다. 완주한 후에도 트랙 위로 쓰러지지 않고 편안하게 경주를 마치는 것, 그것을 바랄 뿐이다.”

 

                            

 

 

몸소 부딪히고  땀 흘리며 살아있음을 느끼는 기쁨, 남경주                                              

처음 무대에 선 후 30여 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많은 작품에서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고 있는 남경주를 ‘한국 대표 뮤지컬 배우’라 칭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있을까. 여느 젊은 인기 배우들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그는 여전히 새로 올라오는 화제작에 캐스팅되고 세간의 관심을 받는다. 국내에서 오랫동안 공연된 작품이라면 웬만한 주역은 다 맡아봤을 것 같은데, 그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고전이라 할 수 있는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줄리안 마쉬를 연기하는 건 의외로 이번이 처음이다. 줄리안 마쉬와 남경주, 가장 무난한 매치인데 말이다. 하지만 <브로드웨이 42번가> 출연이 처음은 아니다. 그는 국내 초연 때 앤디 역할을 맡았노라 말하며, 인터뷰 직전까지도 들여다보고 있던 대본의 첫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한진섭 연출의 손 글씨로 적힌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경주에게. 줄리안 마쉬를 할 때가 왔네. 네가 와서 마음이 정말 편하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내가 작은 배역에서 큰 배역으로 발전한 게 흐뭇하고, 이런 게 다 역사인 것 같아서 재미있다”는 그의 소감에 절대적으로 공감하게 된다. 젊은 안무 감독에서 중견의 유명 연출가로 배역이 바뀌기까지, 그는 나이만 먹은 게 아니라 공연계에서 입지도 높였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에겐 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처음 배우를 시작했을 땐 빨리 유명해지고 싶었다. 스타가 되고픈 꿈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지. 막연히 그런 바람을 갖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동료들과 함께 구르고 부딪히고 땀 흘리며 무언가를 찾아가는 일이 정말 즐거워서 계속하다 보니, 젊은 시절이 다 흘러버렸더라. 지금은 자연스러운 연기, 즉 배역에게 주어진 상황에 적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하지만 적당한 감정이란 것도 수만 가지일 테고, 그건 나의 상식과 인식의 정도에 따라 표현될 거다. 막연한 꿈이 아니라 명확한 신념을 지닌 배우가 되고 싶은데, 그런 신념을 얻기 위해선 지식이 필요하고 지식은 훈련을 통해서 얻어진다고 생각한다.” 그가 했던 이야기 중 많은 부분이 배움과 탐구에 관한 것이었다. 단순한 연기의 기술이 아닌, 다소 현학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삶과 우주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예전에는 공부랑 담쌓았는데, 적성에 맞는 일을 해서인지 내 일에 대한 지식을 많이 쌓고 싶더라. 전문 지식 외에 인접 영역에 대해서도 많이 알 필요성을 느낀다.” 기자의 질문에 답하면서 그는 언젠가 책에서 읽었던 인상적인 글귀를 종종 인용하곤 했는데, 그것은 그의 고민의 흔적을 멋있게 포장해주기도 했지만 포장 속 내용을 들여다볼 수 있게 돕는 것이기도 했다.
“내 인생관 같은 건데,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책에서 ‘그런데 이상하게도, 불확실성의 선택이 더 안전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라는 문장을 봤다. 그게 내 가슴을 완전히 뻥 때린 거다. 이후 그 화두로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그에게 ‘새로움’과 ‘도전’은 삶의 활력과 자극 이상의 동력이라는 것. 그는 낯선 작품을 접하고 낯선 환경에서 낯선 동료들을 만났을 때 더욱 뜨겁게 도전 의식이 생기고,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더욱 열정적으로 작업에 임하게 된다고 했다. 낯선 작품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는 끊임없이 탐구하고, 새로운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신선한 화학반응을 경험하는 일들이 그에게 살아있다는 기쁨을 주는 것이다. 그가 공연의 결과에 상관없이 과정 자체를 즐기는 이유다. 베테랑 배우가 이제와 공연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일은 없다. 순간순간을 즐기고 진실하게 임하면 그뿐. 이제 그에게 연기는 목표 지점이 아니라 존재 이유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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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6호 2013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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