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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NOW IN NEW YORK] 리바이벌을 넘어 재탄생한 명작 <피핀> [No.119]

글 |정예경(뉴욕 통신원) 사진 |Joan Marcus 2013-09-06 4,780

이번 달 소개할 작품은 2013 토니상에서 베스트 리바이벌상을 거머쥔 <피핀>이다. <위키드>의 슈테판 슈월츠가 가사와 음악을 쓰고, 전설의 천재 안무가 겸 연출가 밥 포시가 ‘재즈 핸즈’를 선보였던 뮤지컬계의 기념비적인 작품 <피핀>. 무려 40년 전의 브로드웨이 작품이지만 당시 영상을 보면 도무지 옛날 작품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혁신적이고 작품성이 돋보인다. 특히 당대 사조와 스타일을 반영할 수밖에 없는 음악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대를 뛰어넘는 세련미를 보여주는 슈월츠의 저력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 작품을 다시 리바이벌했다고 해서 찾아간 극장. 그리고 거기서 목격한 것은 리바이벌 그 이상, 혁신을 깨뜨린 혁신, 자신의 최고 기록을 다시금 넘어선 세계 챔피언의 감동적인 승리였다.

 

 

 

평범한 삶의 소중함                                                          

막이 오르면 여자 리딩 플레이어가 나와 배우들에게 이것저것을 지시하며 ‘피핀’이란 이야기를 보여주고, 자신이 극을 이끌어갈 것임을 예고한다. 이윽고 등장한 피핀. 프랑크 왕국의 왕자 피핀은 의욕에 넘치고, 자신의 인생을 뭔가 특별하고 의미 있는 것으로 채우길 갈망한다. 큰 공을 세운 영웅이 되기 위해 전쟁에 참여해보지만 그 참상과 허무함에 용사는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실망한다. 
공허한 마음을 달래려 할머니를 찾아간 피핀. 할머니는 피핀에게 인생의 소소한 즐거움을 모두 만끽하라고 조언한다. 여기서 관객 모두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즐거운 후렴구를 함께 부르자 피핀은 행복을 느낀다. 피핀은 순간의 쾌락을 좇으며 성에 탐닉하기 시작하지만 이내 질리고 만다. 이후 그는 폭정을 일삼던 아버지 찰스 대제를 대신해 세상을 구하는 큰일을 하고자 혁명을 계획한다. 그리하여 아버지를 암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세상을 통치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통스럽고 복잡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폭군처럼 보이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자신도 그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피핀은 왕이라는 자리에 환멸을 느낀다.
막중한 책임감이 싫어진 피핀은 극의 사회자 역할을 하고 있던 리딩 플레이어에게 그동안의 설정을 바꿔 아버지를 살려내 달라고 부탁한다. 리딩 플레이어는 흔쾌히 그 말을 들어주어 아버지는 되살아나고 왕좌에서 물러난 피핀은 농장으로 가서 평범한 시골 생활을 시작한다. 피핀은 그곳에서 만난 연상의 미망인과 시간을 보내며 그녀의 아들에게 잘해주려 노력하는 등 보통 사람들의 생활을 알아간다. 그러나 세계를 누비며 살아온 자유로운 영혼인 그에게 시골 생활은 금세 따분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꿈꾸었던 삶과 평범한 생활의 괴리로 고민하던 피핀에게 리딩 플레이어는 독사처럼 달콤하게 말한다. 이 세상에 네가 찾던 특별함이란 없으니, 이제 마지막으로 죽음을 맞이하여 세상에 기억되라는 주문이다. 불타오르는 링을 향해 뛰어들라고 부추기는 리딩 플레이어와 사람들. 피핀은 뛰어들지 않고 결국 물러선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미망인과 양아들의 손을 잡는다. 죽음에서도 그가 찾던 특별함은 없으며, 모든 경험이 인생의 일부분이란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피핀의 의외의 행동으로 자신이 진행하던 인생극장을 망친 리딩 플레이어는 분노한다. 장엄한 피날레를 망쳤다고 모든 출연진들은 피핀을 비난하며 퇴장한다. 극적인 피날레를 만들려 했던 리딩 플레이어는 그간의 노력이 헛수고가 됐지만 피핀을 대신해 더 화려하게 인생의 막을 내릴 사람을 반드시 찾겠노라 다짐한다. 암흑 같은 무대에 남겨진 피핀과 미망인 모자는 가발도 벗고 분장도 많이 지워졌지만 삶의 특별함을 노래한다(양아들이 노래할 때는 질풍노도 시기의 세상 모든 젊은이, 즉 제2의 피핀의 탄생이 예고되는 듯 보인다). 

 

                                   

 

 

연출의 의미 있는 승리                                                     

흔히 크게 성공한 영화나 소설의 속편은 99% 망하거나, 1편의 아성을 결국 넘지 못한다. 하지만 대작의 속편을 만들어보고 싶다는 제작자나 연출가의 마약 같은 욕망과 희망은 늘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 리바이벌 무대를 만든 연출가 다이앤 파울루스는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반드시 그 통설을 깨겠노라 단단히 작정했던 모양이다. 무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연출가의 강한 다짐과 야망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 야망은 이번 토니상에서 <킨키 부츠>, <마틸다> 같은 새로운 대작들을 제치고 당당히 ‘베스트 디렉션’(연출상)을 받음으로써 실현되었다. <킨키 부츠>가 작품상을 가져갔음에도 불구하고, 연출상을 리바이벌작 <피핀>이 가져갔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선 다이앤 파울루스는 밥 포시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자신의 새 영역을 만드는 것에서 해석을 시작했다. 사실 기존 <피핀>에는 ‘인간의 욕망과 인생의 의미, 그리고 그것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다소 철학적인 주제를 뮤지컬이란 장르에 무겁지 않게 녹여내기 위한 메타포들이 많이 쓰였다. 가령 깜깜한 무대 공중에서 촛불처럼 아른거리며 유혹의 손길을 상징했던 ‘재즈 핸즈’가 그렇다. 우선 연출가는 <피핀>의 트레이드마크 같았던 리딩 플레이어의 기존 이미지를 뒤엎었다. 일단 리딩 플레이어를 여자로 교체하는 파격을 시도했는데, 이 계산은 적중했다. 파워풀한 소울 보컬의 흑인 여성 리딩 플레이어는 섹시하면서도 카리스마가 넘쳤고, 필요할 때는 중성적 매력을 가감 없이 선보였다. 그녀 역시 이번에 토니상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원작을 올렸을 당시에서 40년이 흐른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여성의 파워가 강해져 사회에서 남성의 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남성들의 외모나 성격은 모든 면에서 오히려 여성성을 표방하고 있다. 이런 시대 흐름을 읽어 섹시미와 남성성을 고루 갖춘 여성으로 리딩 플레이어를 바꾸니, 예쁘장한 외모에 꿈은 많지만 책임감은 없고 평생 방황하는 여린 이미지의 피핀과 밸런스가 훨씬 잘 맞았다.  
또 연출가는 세상 모든 사람이 인생이란 극 안에서 각자 역할을 다하며 하루하루 살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새로운 컨셉을 도입했다. 그것은 ‘서커스’다. 컨셉만 서커스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진짜 서커스였다. 게다가 그 서커스의 난이도가 상상을 초월한다. 태양의 서커스가 간단한 스토리에 곡예를 물 흐르듯 보여주는 형식이라면, 이 극은 서커스를 보여주는 이유가 극 안에 잘 녹아있고 이야기의 몰입을 전혀 방해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훨씬 뛰어났다. 배우들의 애크러배틱한 움직임은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불쇼는 물론, 구와 삼각뿔을 몇 개씩 수직으로 쌓고 그 위에 올라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극장 천장에서 순식간에 바닥으로 떨어진다거나 하는 ‘말도 안 되는’ 곡예를 ‘뮤지컬’에서 보여주었다.
더 신기한 건 무대 위 모든 사람이 각자 위치에서 쉴 새 없이 계속하는 안무였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인생은 서커스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주연들 뒤에서 계속 곡예 같은 행동을 하며 배경을 만들어주었다. 배우, 연출가, 안무가 누구 하나 독하지 않은 사람이 없구나 하는 생각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어찌나 ‘열심히’ 공연을 하는지, 감동적이기까지 한 그 신체 에너지와 노력이 토니상으로 이어진 건 지금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무대에서는 키치적인 분위기가 풍겼다. ‘인생의 의미를 찾겠다’라는 거창한 모토로 온갖 경험을 하는 주인공도 사실은 그런 흐름의 일부일 뿐이며, 남들의 구경거리, 이야깃거리의 한 부분일 뿐이라는 것을 보여주듯 무대 전체는 아예 원형 서커스 천막 모양으로 설계되어 있었다. 모든 출연자는 우스꽝스러울 만큼 동화적이고 과장된 색깔의 의상을 입었다. 피핀만 현대 의상인 하얀 셔츠와 워커 차림으로 그 우스꽝스런 세상에 섞이지 못하고 겉돌았다. 그의 주변을 맴돌며 계속적으로 유혹을 하는 여러 무리의 손길들은 무대 천장부터 바닥까지 전체를 사용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                                                        

피핀의 ‘할머니’가 등장하여, 자신이 생각하는 인생의 의미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할머니 역할을 맡은 66세 여배우 역시 이번에 토니상에서 여우조연상을 받았다. 이 수상엔 그 누구도 이견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배우는 여전히 행복함을 만끽할 줄 아는 할머니 역할을 위해, ‘공중 후프’ 연기를 선보였다. 드레스를 입고 공중 후프에서 남자 배우와 성적 메타포가 담긴 애크러배틱 연기를 하며 노래까지 완벽하게 소화했다. 관객들은 그녀에게 너무 감동받은 나머지 극을 멈추고 찬사의 박수를 보내며 경의를 표했다. 배우의 프로 정신, 나아가 연출가의 신뢰를 넘어서 존경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배우의 귀감’이라 할 만했다. 이 배우는 ‘마음을 움직이는 배우’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밑바닥부터 관객에게 다 줘버리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줬다.

 

훌륭한 작곡가의 덕목                                                      

<피핀>은 <위키드>를 통해 세계를 점령한 스테판 슈월츠가 그 이전에도 이미 훌륭한 뮤지컬 작곡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작품이다. 슈월츠의 작품에서는 ‘쓰는 즐거움’이 느껴지고, 공동 작업의 낙이 보인다. 노래는 분명히 재미있고 간단하며 대중적인 멜로디를 이용하고 있다. 그의 음악은 파트너가 나설 시간을 준다. 극작가에 대한 신뢰와 연출가가 연출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미가 살아있는 계산된 여백에, 그의 파트너들은 자신의 재능을 칠하여 더욱 화려한 그림을 만든다.
지난달,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미국 저작권협회와 마빈 햄리시 재단 주최의 ‘브로드웨이 음악감독 워크숍’에 필자가 선발되어 참가한 바 있다. <위키드> 오케스트라를 직접 지휘해보며 필자의 멘토였던 <라이온 킹>과 <위키드>의 음악감독에게 코멘트를 듣는 유익한 시간이었는데, 그때 필자는 <위키드>의 오케스트라 피트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됐다. 피트 안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위키드>의 오케스트라 스코어를 읽고 공연을 보니, 스테판 슈월츠란 작곡가가 왜 대단한지 더욱 분명해졌다. 개인적으로 담소를 나누었을 때도 느꼈지만, ‘남의 말을 경청할 줄 아는’ 성격이 스코어에 그대로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그가 극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만든 브리지에는 자신의 재능을 좀 더 드러내기보다 눈 질끈 감고 참은 흔적들이 역력했다. 그 덕에 연출은 좀 더 보이는 것에 집중하고, 안무는 화려한 볼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간단해 보이는 그의 멜로디 뒤에는 이처럼 뮤지컬 작곡가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덕목, ‘할 줄 알지만 안 하는, 또는 작가를 믿어줄 수 있는 믿음과 파트너십’이 숨어 있다.
<피핀>이 리바이벌임에도 이 정도로 잘 나올 수 있었던 건, 극의 특수한 구조를 잘 이해하고, 음악으로 모든 걸 다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철학적인 주제가 극에 영향을 끼쳐 분위기가 무거워지지 않도록 배우들이 더 활약할 수 있는 부분들을 효과적으로 잘 만들어준 슈월츠는 한 발짝 뒤에서 웃음 짓는, 공동 작업에 강한 작곡가였다.    

 

 

맺는말                                                                          

새로운 <피핀>을 창조한 브로드웨이 프로덕션에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기존의 성공, 40년 전의 아름다웠던 추억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을 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이런 ‘열린 마음’이야 말로 우리가 공연을 만들고 또 보면서 추구하는 궁극의 자세가 아닐까. 이 작품은 그걸 잘 실현해준 좋은 예다.
단 1초도 눈속임은 없었다. 배우들 전신에 쉴 새 없이 맺히는 땀방울은 ‘진짜’였다. 리바이벌을 하려면 이 정도 각오는 있어야 하나보다. 관객에게 거짓말하거나, 과거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쉽게 돈을 벌어보겠다고 구태를 답습하는 이들에게 많은 걸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번 토니상에서 <피핀>이 가져간 부문의 상들은 매우 의미가 있다. 배울 점도 많고, 초심도 떠올리게 했던 ‘감사한’ 공연이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19호 2013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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