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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MUSICAL INSIDE] <보이첵> 연출가 인터뷰 [NO.134]

글 |박병성 사진제공 | LG아트센터 2014-12-08 5,787
운명의 굴레 속에서 파멸하는 인간€



게오르고 뷔히너의 미완성 희곡 <보이첵>은 열린 구조와 한정하기 힘든 형식으로 섣불리 규정짓기 어려운 작품이지만, 그런 열린 형식으로 인해 후대의 표현주의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불합리한 시대의 구조적인 폭력 속에서 죽음을 선택해야 했던 보이체크는, 사회 시스템에 파멸하는 개인을 상징하기도 한다. 근현대 연극사에 중요한 작품으로 기록되며, 현대 수많은 연출가들에게 사랑받는 <보이첵>이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제일 궁금한 것은 왜 <보이첵>을 선택했느냐 하는 점이었다. 윤호진 연출에게 뮤지컬 <보이첵>에 대해 들어보았다.

 




에이콤의 새로운 뮤지컬로 <보이첵>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보이첵>은 내게 연극이 이런 것이구나를 느끼게 해준 작품이다. 1970년대에 국내에서 독일 극단의 <보이첵>을 올린 적이 있다. 세트라고 해야 헝겊 쪼가리가 덕지덕지 붙은 간이 무대였는데, 보이체크의 갈등 구조라든가 배우들의 에너지가 대단해서 충격을 받았다. 그 이후로도 다양한 <보이첵>을 보면서 언젠가 한번 연출해야겠다고 계속 생각해왔다. <보이첵>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다가, 보이체크와 마리의 갈등이 대사보다는 음악으로 표현될 때 더 가슴에 와닿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뮤지컬 작업을 시작한 거다. <보이첵>을 만든다고 하니까 영국의 프로듀서가 굉장히 어두운 작품인데 뮤지컬에 어울릴지 모르겠다며 우려를 하더라. <블러드 브라더스>는 형제들끼리 죽이는 내용이고, 셰익스피어의 이야기도 이보다 더 어두운 것들이 많지만 뮤지컬로 만들어졌다. 그런 진한 것이 있어야 가슴을 파고드는 거라고 하니 이해했다.

<보이첵>은 이전의 작품들, <명성황후>와  <영웅>과는 확연히 다른데 연습 과정에서 차이가 있는가?


작품마다 최선을 다하지만, <명성황후>와   <영웅>은 스케일이 커서 장면별로 컨셉만 확실하다면 어떤 장면들은 내가 관여하지 않아도 진행된다. 그런데 <보이첵>은 디테일한 감정선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관객들의 생각을 치밀하게 계산하면서 진행해야 하니까 연습하는 동안에도 온 신경을 쏟아부어야 한다. 연습을 두 번 하고 나면 탈진이 될 정도다.

원작은 부조리한 사회에 파멸하는 인간의 모습을 표현적인 방식으로 접근했다면, 뮤지컬 <보이첵>은 사실적으로 접근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음악이 들어가니까 표현주의 방식으로 가는 것이 쉽지 않다. 표현주의라는 게 진실을 굉장히 과장하거나 왜곡해서 보여주는 거다. 내가 이 작품의 본질이라고 본 것은 보이체크나 마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죽음 이외에는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동양적인 개념에서 마지막 장면에 고통의 세상에서 아파하지 말고, 저 세상에서 행복하라는 의미로 제의 형식을 덧붙였다. 장례식 뒤편에선 가해자들이 아무 의식 없이 지나간다. 이런 마무리도 우리 작품이 처음일 것이다.

1막에서 할머니가 부르는 곡 ‘갈대의 노래’는 이국적인 음색이 귀에 남았는데, 상황과 잘 연결되지는 않았다.


‘갈대의 노래’는 한국에서 새롭게 작곡했다. 원래 크리스가 작곡한 곡은 굉장히 차분했다. 음악감독이 이 장면에서는 에너지가 표현되었으면 해서, 남자들이 전쟁에 나가고 없는 상황이고, 앞선 상황(마리의 외도 장면)과 연관지어서 마을 과부들의 성적 에너지를 담았다. 2막에서 할머니가 ‘슬픔에 잠긴 소년(Inconsolable Boy)’을 부르는데, 이 노래는 운명의 윤회를 담고 있다. 어떻게 보면 보이체크도 아들인 알렉스 같은 상황에서 자랐을 것이다. 하층민 계급에서 태어나 창녀를 엄마로 두었을지도 모른다. 운명의 시계는 바뀌지 않는다는 게 비극이지 않나. 루저들의 운명이 어디 쉽게 바뀌겠나. 그런 윤회를 전해주는 노래다.

‘슬픔에 잠긴 소년’도 그렇지만 붉은 달이라든가, 도입부의 호수의 전설 등 작품 전체적으로 운명을 암시하는 장치가 많다


1막 엔딩에서 말하지 않나. 달이 양귀비꽃처럼 붉어지면 인간들은 광기에 젖는다. 음기가 가장 강할 때는 살인이 벌어진다. 보이체크가 운명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호수가 아름답기도 하지만 쉽게 생명을 던지는 곳이기도 하다. 운명의 블랙홀 같은 곳이다. 원작에서는 귀걸이를 주는데, 우리 작품에서는 군악대장이 루비 목걸이를 준다. 군악대장은 실제 루비 목걸이를 주지만, 보이체크는 피의 목걸이를 준다. ‘루비 목걸이’라는 노래는 목에 칼을 그으면 피가 흐르는데, 그걸 루비 목걸이로 표현한 거다.



죽음에 이를 운명이 강조되다 보니까, 원작에서 표현된 부조리한 세상 때문에 파멸되는 인간보다는, 운명적인 죽음에 이르는 개인이 감성적으로 다가왔다.


음악이 들어가서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다. 음악으로 사회의 부조리함을 담기는 어렵다. 이 작품에서는 중대장이나 박사 같은 특권층이 분명히 존재한다. 군인들이 행진할 때 부르는 ‘전진하라’에서 ‘민주주의를 위하여’라는 가사가 나온다. 민주주의든, 사회주의든 어느 제도이든 결국 특권층이 생기고, 밑바닥에 있는 이들은 구원될 수 없다. 그런 놀라운 발견을 담은 것이다.

마리의 캐릭터는 후반부를 보면 순종적인 인물 같은데, 전반부 보이체크가 집에 오자 유혹하는 장면부터, 군악대장과 섹스하는 장면까지는 성적 불만이 가득한 여자로만 보인다.


섹스라는 게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귀족들이야 말도 타고, 오페라도 보고 할 일이 많다. 가난한 이들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할 게 뭐가 있겠나. 게다가 마리는 창녀였다. 남자를 아는 여자다. 근데 보이체크는 실험 대상이 되면서 3개월째 완두콩만 먹었다. 제대로 만족시켜주지 못한 거다. 그런 상황에서 건장하고 괜찮은 남자가 나타나면 눈이 가는 게 자연스럽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시종 나쁜 여자라면 이해가 갔을 텐데, 후반부에 오면 자신의 일을 후회하고 죽음까지 받아들일 정도로 순종적인 여자가 된다.


죽을 정도로 사랑했던 여자가 바람을 피웠다고 해도 버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용서하고 살기에는 마음이 허락하지 않고, 그렇다고 훌훌 버릴 수도 없고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결국 죽음밖에 없다. 두 번째 버전까지 마리의 노래가 없었다. 그녀의 입장을 밝힐 필요가 있었다. 마리의 솔로가 필요하다고 보고 죽기 전에 보이체크에 대한 마음을 표현한 ‘사랑한다면’을 넣었다.

해외 아티스트들을 기용해 해외에서 먼저 프리 프로덕션을 꾸리고 제작을 진행했다. 해외 시장을 염두에 둔 방식인데, 이러한 방식이 효과적이라고 보는가?


그 시장의 정서를 다루려면 글로벌 프로젝트가 적당하다. 꼭 우리 스태프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장의 소재로 글로벌한 아티스트들과 협업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보이첵>은 원작이 유럽 작품이다. 영어권도 영어권이지만, 독일어권이나 유럽권을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 작품은 유럽에서 관심이 많은 연극이다. 처음에는 해외 아티스들이 나름대로 창의적으로 작업해 보라고 관여를 안 했다. 해외 공연 때도 그 나라의 연출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좀 더 참여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재공연 때 보완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운명 체계가 더 확실히 느껴지도록 만들고 싶다. 카니발 장면은 새로운 구성이 떠오른다. 주술사가 쓰는 커다란 구슬 같은 게 있지 않나. 주술사가 나와서 운명을 바꾸고 싶은 사람들은 배팅을 하라고 한다. 보이체크와 마리, 거기 있는 사람들이 있는 돈을 다 털어서 운명 배팅을 한다. 모든 사람들이 사라진 후 ‘너희들은 안 돼, 오늘 커다란 운명의 블랙홀에 빠질 거야’라고 말한다. 마리가 싸구려 루비 목걸이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인 순환 고리 때문에 빠져버리게 되는 거다. 그러면 마리가 귀걸이 하나로 유혹당하는 원작의 문제도 해결된다. 지금은 인간의 본능을 설교하기 위해 말이 등장하는데, 그것보다는 주술적인 기구로 본능에 충실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면 비주얼적으로도 나아질 것이다.

관객들이 이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이기를 바라나?


극장에 온다는 행위는 현실 공간의 모든 것을 던지고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래야 새로운 것을 얻어갈 수 있다. 그래서 공연 관람은 하나의 의식이고, 그것이 공연이 지닌 의미이다. 마음을 열고 새로운 세상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4호 2014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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