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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TAFF] <어쩌면 해피엔딩> 박천휴 작가·윌 애런슨 작곡가 [No.159]

글 |배경희 사진 |표기식 2017-01-02 6,184

백 퍼센트의
동업자를
만난다는 것에 대하여


지난 2012년, 무비컬 <번지점프를 하다>로 관객들에게 이름을 알린 박천휴와 윌 애런슨. 단 한편의 공동 작업으로 국내 뮤지컬 신에서 누구보다 애정 어린 지지를 받는 창작자가 된 이들이 둘만의 아날로그 감성이 빛나는 따뜻한 로맨스 뮤지컬로 돌아왔다. 올 연말 사랑스러운 두 콤비의 첫 번째 순수 창작품 <어쩌면 해피엔딩>을 보고 나면, 미국 소설가 토니 모리슨이 남긴 이 말이 떠오를 것이다. “당신이 정말로 읽고 싶은 책이 있는데, 아직 그런 책이 없다면, 당신이 직접 써야 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창작 동반자

  

옛날 얘기를 먼저 해보자. 박천휴 작가의 경우 문예창작과를 나와 가요 작사가로 짧게 활동하다 현대 미술을 공부하러 뉴욕에 간 걸로 아는데, 좀 독특한 이력이 아닌가 싶다.
박천휴  원래 어렸을 때부터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대학도 문창과를 갈지, 미대를 갈지 고민하다 입시 미술을 하기가 싫어서 문창과를 택한 거다. 막상 학교에 들어가선 수업도 잘 안 나가고 뮤직 큐브라는 회사에 소속돼 가요 가사를 썼는데, 경쟁이 정말 치열했다. 무수히 많은 퇴짜를 맞고 거의 4년 만에 내가 쓴 가사가 노래로 나왔다. 나름 어렵게 작사가 데뷔를 하게 됐는데, 그땐 이미 미술을 공부하겠다고 유학 준비를 마친 상태라 뉴욕으로 떠나게 된 거다. 처음 뉴욕에 갔을 때만 해도 뮤지컬 곡을 쓸 거라곤 생각 못했지만,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공연을 볼 기회가 많았다.


NYU 재학 시절 만나 친구가 됐는데, 윌 애런슨이 먼저 협업을 제안했다더라. 맞나?
윌 애런슨
  워낙 좋아하는 게 비슷해 우린 쉽게 친해졌다. 서로 처음 알았을 때 당시 둘 다 벤 폴즈나 존 브리온 같은 음악가들을 좋아했고, 마이크 밀스와 미란다 줄라이 감독의 팬이었다. 예술 취향도 비슷하고, 천휴가 한국에서 가사를 썼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종종 재미 삼아 함께 곡을 쓰곤 했는데, 마침 <번지점프를 하다> 곡 작업을 의뢰 받아 이 기회에 정식으로 협업을 시도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창작 파트너로 서로 잘 맞는지 확인해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실제 함께 작업해 보는 거니까.
박천휴  윌한테 뮤지컬 노래를 같이 쓰자는 얘기를 듣고 처음엔 꽤 망설였다. 거의 반 년 정도 고민했던 것 같다. 진지한 태도로 데뷔를 준비하는 창작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잘 아는데, 작곡가하고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덥석 작품을 하는 게 마음에 걸렸다. 지름길을 택하는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런데 윌이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를 굉장히 좋아해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나누다 보니, 한번 작업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나는 <번지점프를 하다>를 동성애를 소재로 한 독특한 영화 정도로 생각했는데, 윌은 모든 것을 포기할 만큼 자기 사랑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는 오페라스러운 거대한 드라마로 해석했다. 드라마틱한 가사라면 가요 가사를 썼던 경험을 바탕으로 한번 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첫 작업인 <번지점프를 하다>를 통해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하나.
윌 애런슨  우리가 쓴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 과정 자체가 값진 성취였다. 막연히 머릿속으로 상상하던 것들이 실제 무대에서 구현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이 성공했고 무엇이 실패했는지 알아가는 것도 소중한 경험이었다.
박천휴  당연한 얘기지만, 우리끼리 재미로 곡을 쓰는 것과 오랜 시간을 들여 한 작품의 뮤지컬 넘버를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공동 작업을 통해 친구가 아닌 창작자로서 서로의 장단점을 알게 됐는데, 그게 가장 큰 소득이 아니었나 싶다. 함께 무언가를 쓸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됐으니까. 그리고 같은 계통의 사람들을 알게 된 것도 소득이라고 생각한다. 뮤지컬이라는 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협업해야 하는 작업인데, 사실 나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작업하는 게 두렵고 싫어서 시나 가사 쓰는 일을 택했을 만큼 뼛속까지 개인적인 인간이다. (웃음) 그런데 혼자가 아닌 팀으로 총대를 메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게 재밌더라. 그게 일종의 성장이었다. 


첫 작품 이후 바로 두 번째 작품 구상에 들어갔나?
박천휴  훌륭한 작업 파트너를 만나는 건 모든 창작자들이 꿈꾸는 일인데, 소울메이트처럼 잘 맞는 사람을 만나기가 정말 어렵다. 그런데 윌과 나는 취향도 잘 맞고, 세계관도 비슷하다. 첫 작업 결과물이 나름 만족스러웠기 때문에 <번지점프를 하다> 초연이 끝나자마자 바로 다음 작품 아이디어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번지점프를 하다>는 원작이 있는 작품이고, 제작사에서 판을 다 짠 상태에서 우리를 작사, 작곡가로 고용했던 것이기 때문에, 다음엔 우리가 진짜 잘할 수 있는 작품을 쓰고 싶다는 열정이 마음속에서 부글부글 끓었다. 그런데 마침 <번지점프를 하다>를 좋게 봐주셨던 우란문화재단의 피디님이 우리의 다음 작품에 관심을 보이셔서 빠르게 새 작품을 개발할 수 있었다. 사실 <어쩌면 해피엔딩>보다 먼저 트리트먼트를 쓴 작품이 있는데, 그건 아마 내년쯤 리딩으로 선보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계획으론 그렇다. (웃음)



진심을 담은 우리의 이야기


차기작으로 먼저 구상하던 작품이 아닌 <어쩌면 해피엔딩>을 택한 것은 이 이야기가 그만큼 강렬하게 다가왔던 걸까.
박천휴  먼저 쓰고 있던 작품은 제법 규모가 있는 시대극이라 준비하는 데 시간이 꽤 필요하다. 그런데 솔직히 작가로선 아직 검증이 안 됐다 보니, 큰 규모보다는 작은 규모의 작품을 써야 더 금방 무대에 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공연계가 어렵다는 이야기가 멀리까지 자꾸 들리다 보니 그런 계산을 안 할 수가 없더라. 하루는 카페에 있다 우연히 데이먼 알반의 신곡 ‘Everyday Robot’을 듣고 <어쩌면 해피엔딩>의 소재가 된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우리 정서를 백 퍼센트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여서 써가는 과정이 정말 좋았다.



대본에 아날로그적인 정서가 물씬 느껴지는 소소한 설정도 많고, 특정 뮤지션들도 많이 언급돼서 나란 사람의 취향을 어필하고 싶다는 인상이 들더라.
박천휴  맞다, 우리 둘의 정서를 잘 표현하는 작품을 쓰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일부러라도 좋아하는 요소들을 작품에 넣고 싶었다. 극 중 주인공 올리버가 화분에 애착이 있는 것도 내 실제적인 일면이다. (웃음) 집에서 작은 화분 네 개를 키우고 있는데, 어쩌다 물 주는 걸 깜빡하면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다. 여행갈 때도 친구들한테 집 열쇠를 주고 화분에 물 좀 주라고 부탁한다. (웃음) 또 작품에서 언급되는 뮤지션들, 예를 들면 듀크 엘링턴이나 빌 에반스, 존 콜트레인 모두 실제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우리의 좋은 취향을 알아주세요’라고 어필하고 싶었다기보다, 작품은 어느 정도 창작자의 분신 같은 거니까 우리 자신을 담고 싶었다.
윌 애런슨  뉴욕에서 활동하면서 한국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작품을 쓸 때 솔직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에 얽혀 있는 사람들이 내 작품을 못 보니까, 오히려 나라는 사람을 좀 더 드러낼 수 있고 좀 더 진심을 얘기할 수 있다. (웃음) 이번 작품도 그렇다. 그리고 작품에서 언급되는 재즈 뮤지션들은 좋아해서 넣은 것이기도 하지만, 옛것에 대한 향수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세상을 떠난 뮤지션들처럼 올리버도 낡아서 버려진 로봇이고, 올리버의 화분도 언젠간 시들 거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우리의 존재도 그렇다는 걸 알기 때문에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애착이 있다.


로봇을 주인공으로 하면서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미래로 배경을 정한 점이나, 두 로봇의 버전을 달리 설정한 이유가 있을까?
윌 애런슨 
로봇이 주인공인 작품을 썼지만, 우리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건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미래에 사람과 비슷한 외모에 감정을 지닌 로봇을 주인공으로 했을 때,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더 쉽고 솔직하게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올리버와 클레어의 버전에 차이를 둔 이유는 보통 관계에서 어느 한쪽이 우위에 있지 않나. 지적 수준이나 여러 면에서. 물론 스스로는 각자 자기가 좀 더 나은 최신 버전이라고 믿지만. (웃음)
박천휴  내 주위를 보면, 남녀 사이에서 늘 좀 더 성숙한 쪽은 여자인 것 같다. 특히 시작 단계에서 남자들은 당장의 설렘이나 흥분에 빠져 다른 생각은 잘 안 하는데(웃음), 여자들은 관계의 의미를 찾으면서 성숙하게 관계를 리드해 간다. 그러다 보니 여자 로봇을 더 높은 버전으로 설정하게 됐다.



사랑에 수반되는 고통을 감당하고서라도 사랑은 할 만한 것인가 하는 질문을 통해 사랑의 가치를 역설하는 데서 두 사람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엿보인다.
박천휴  <어쩌면 해피엔딩>을 쓰기 일 년 전쯤에 꽤 길게 교제했던 사람과 헤어졌던 터라, 당시 사랑에 대해 굉장히 냉소적이었다. 앞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한들 내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뭘까.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하는 게 정말 가능한 일일까. 그런 치기 어린 생각을 한참 했다. 하지만 설령 가슴 아픈 이별을 반복해야 할지라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지는 게 사람인 듯싶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자체가 가장 인간다운 일이기도 하고. 개인적으론, 내 자신보다 더 좋아할 수 있는 상대가 생겼을 때 내 본연의 모습을 알게 됐는데, 심지어 헤어졌을 때조차 그 이별에 반응하고 극복해 가는 과정을 통해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됐다.
윌 애런슨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두려움은 비단 연애뿐 아니라 내가 가장 흔하게 느끼는 감정이다. 무언가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그걸 잃을까봐 걱정하는 스타일이라고 할까. 감정적으로 평온한 삶을 살려면 처음부터 아예 상처받을 일을 안 만들면 되겠지만, 그렇게 살 수 있다고 해도 그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다. 이론적으론 말이 안 될지 몰라도, 평생토록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만큼 나를 사랑해 줄 사람을 찾는 게 결국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인 것 같다.


개막을 앞둔 소감은 어떤가.
박천휴
  프리뷰 공연이 빠르게 매진됐다고 해서 놀랍고 부담스럽다. 물론 캐스팅의 힘이 컸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우리를 기다려주신 분들이 있구나 싶어 기분이 좋더라. 그런데 워낙 욕심이 많은 성격이라 자꾸 다음 걸 생각하게 된다. (웃음) <어쩌면 해피엔딩>이 잘돼서 이걸 발판 삼아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윌 애런슨  부디 <번지점프를 하다>를 좋아해 준 팬들이 실망하는 일만 없었으면 좋겠다. (웃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9호 2016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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