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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TRAVEL] 일본 <미스 사이공> 킴 김수하가 보내온 편지 [No.160]

글.사진제공 | 김수하 2017-02-01 8,271

2015년 웨스트엔드의 <미스 사이공>에서 앙상블과 킴 커버로 뮤지컬에 데뷔한 김수하가 당당히 일본 <미스 사이공>의 킴으로 무대에 섰다. 대학 4학년 재학 중인 그녀는 웨스트엔드와 일본 무대에 연이어 올랐다. 스승인 배우 양준모는 2015년 토호의 대표 레퍼토리인 <레 미제라블>에 일본 활동을 하지 않은 한국인 배우로는 최초로 주연으로 참여했다. 양준모의 뒤를 이어 이번에는 제자인 김수하가 <미스 사이공>에서 한국 뮤지컬 배우의 기량을 뽐낸 것이다. 지난 10월에 시작해 올 1월까지 이어질 공연을 마치면 지방 투어 공연에 돌입할 김수하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일본 무대에 선 경험을 들려주었다. - 편집자




오겡끼데스까?      
난 잘 지내. 좋아하는 일본 음식들도 매일 먹고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면서 감사하게 생활하고 있어. 내가 일본에 왔을 땐 정말 더운 8월 여름이었는데, 벌써 눈이 오는 겨울이 되었네. 시간 참 빠르다. 많이 궁금했을 내 일본 이야기를 써볼까 해.




따뜻한 환대

내가 일본에 와서 처음 배운 말이 뭔 줄 알아? 바로, ‘덥다’였어. 얼마나 더웠으면 우리들의 연습실 출근 인사가 ‘스고이 아쯔이네(정말 덥다)’였을 정도였다니까. 사실 처음엔 ‘함께 무대에 설 배우나 스태프와 말도 안 통하고 또 한국 사람이라 나를 싫어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 때문에 긴장한 채로 그들을 만났어. 하지만 그들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미안할 정도로 나를 따뜻하게 가족으로 맞아주었어. 정말 감동받았지. 우리 팀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양준모’라는 배우를 알고 있었어. 내 선생님이라고 소개하니까 그들은 깜짝 놀라면서 선생님의 실력과 인성에 대해 칭찬했어. 나도 꼭 언젠간 선생님처럼 일본에서도 인정받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 연습실은 도쿄의 아사쿠사와 스카이트리가 있는 킨시쵸라는 동네에 있었어. 이 연습실은 일본에서 공연되는 유명한 연극, 뮤지컬을 주로 연습하는 곳이고, 또 그 작품에 사용하는 세트, 의상을 만드는 곳으로 유명해. 공기 좋고 한적한 곳이라 연습실에 갈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어. 연습실에 들어갈 때는 경비실 앞에 마련된 종이에 연습실 번호와 이름, 들어간 시간을 적고 출입증을 받아야만 들어 갈 수 있고, 연습을 마치고 나올 땐 그 출입증을 반납한 시간을 적어야 해. 지진이나 불이 났을 때 건물 안에 누가 있는지 빠르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지진, 쓰나미 등 다양한 자연재해에 노출된 일본인들이 얼마나 이것을 진지하고 예민하게 느끼는지 알 수 있었어.




일본 <미스 사이공> 연습 과정

첫 음악 연습 날, 나는 일본 배우들이 얼마나 뮤지컬을 사랑하고 또 <미스 사이공>을 사랑하는지 잘 느낄 수 있었어. 자신이 드러나기보단 배역의 캐릭터가 잘 보이길 바라고, 한 사람의 목소리보단 ‘우리’의 목소리가 전달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해 연습하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감동을 받았어. 첫 음악 연습 날까지 일본어로 된 모든 가사와 대사를 외웠어. 먼저 일본 무대를 경험한 준모 선생님께서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거든. 그들에게 피해가 되면 안 된다고. 근데 정말로 선생님 말씀을 듣길 잘한 것 같아. 내가 다 외워서 부르니까 음악감독 선생님의 코멘트도 바로 적용할 수 있었고, 가사를 표현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더라고. 첫 연습이 끝나고 배우들이 다가와 일본어로 외워 부른 것이 대단하다며 칭찬해 주어서 좋았지만 한편으로는 많은 부담감이 느껴지더군. 그래서 더 진지하게 연습에 임해야겠다고 생각했어.


연습은 8월부터 10월까지 두 달 동안 진행됐어. 나는 아무래도 일본인들보다 훨씬 발음이 안 좋으니까 발음 위주로 연습했어. 감독님들께 내 발음을 지적받을 때마다 ‘내가 과연 세 시간 동안 공연을 해낼 수 있을까?’ 의심이 들었고 그럴수록 자신감은 점점 더 사라져갔어. 그렇게 슬럼프가 찾아왔어. 같은 노래를 영어로 부를 때는 잘 올라가던 음도 일본어로 부르려니 음이 안 올라가는 거야. 우리 일본 <미스 사이공> 공연의 크리에이티브 연출가이자 일본 오디션에서 나를 보고 영국 공연의 오디션 기회를 주었던 영국 연출님께 바로 이런 고민을 말씀드렸어. 영국에서부터 내가 아빠처럼 의지했는데 부족한 나를 많이 도와주셨던 분이거든. 그랬더니 연출님께서 나만을 위한 음악 연습 자리를 만들어주셨어. 일본인 조연출님, 음악감독님까지 모셔서 지금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을 이야기하시면서 함께 해결해 보자고 하셨어. 연출님은 내게 일본어 가사와 영어 가사는 어순도 다르고 강조해야 할 단어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고, 그 부분을 중심으로 몇 시간 동안 노래를 부르며 조금씩 수정해 갔어. 그 몇 시간의 레슨으로 내 노래의 문제는 물론이고 마음속 고민까지 깨끗이 해결됐어. 나 자신을 힘들게 했던 압박들이 사라지고 이제부턴 정말로 남은 시간을 즐기며 킴으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러기 위해선 우선 발음에서 자유로워져야 했어. 더욱더 발음 연습에 몰두했는데 전에는 괴롭기만 했던 발음 연습 시간이 놀랍게도 행복한 시간으로 바뀌는 거야. 그럴수록 발음이 자연스러워졌어. 사실 모든 배우, 스태프 그리고 특히 통역 선생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난 해낼 수 없었을 거야.


일주일 정도의 음악 연습이 끝나고 우리는 바로 연습실에 설치된 세트를 이용해 피지컬 연습을 시작했어. 이게 가장 놀랐던 점이야. 영국에서 함께 공연했고 이번에 지지 역으로 캐스팅되어 일본에 같이 오게 된 일본인 카나코 언니가 있는데, 이 언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 영국에서만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이번 공연이 나처럼 언니의 일본 데뷔 무대거든. 이 언니가 “웨스트엔드에서도 연습 첫날에 바로 세트까지 갖추고 연습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는 거야. 그만큼 일본 제작사가 얼마나 이 작품에 애정을 가지고 지원해 주는지 알 수 있었어. 그래서 영국 오리지널 팀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들이 25년간 해온 노력들이 어떠했는지 느낄 수 있었어.




고마운 기회와 시간

극장에 입성한 날.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이 끝나고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이 왔어. <미스 사이공>이 공연될 곳은 도쿄의 유라쿠쵸와 히비야라는 천왕이 살고 있는 왕궁 건너편에 위치한 제국극장이야. 이 극장은 일본 배우라면 모두가 서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라고 해. 내가 이런 귀한 무대에서 설 수 있다니 정말 감사했어. 제국극장은 1,900석 정도 규모의 대극장으로 그 웅장함에 한동안 말을 잃었어. 내가 영국에서 공연했던 프린스에드워드 극장은 유럽식의 화려한 장식들로 꾸며져 신비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면 제국극장은 일본 특유의 깔끔하고 정갈한 곳이었어.
이번 공연은 일본에서 ‘미스터 사이공’이라고 불리는 25년 차 국민 엔지니어 이치무라 씨의 은퇴 공연이기도 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있어. 일본 뮤지컬계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그는 60대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춤 실력이 뛰어나셔. 내가 어떻게 그렇게 젊음을 유지할 수 있냐고 여쭤보니 아직도 공연 전에 두 클래스의 핫요가를 하고 극장으로 출근하신대. 역시 노력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렇게 열심히 자기 관리를 했기 때문에 세월이 흘러도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닐까.


공연 이틀 전. 갑자기 이번 킴 세 명 중 둘째언니인 콘 나츠미 언니가 성대결절로 도쿄 공연을 할 수 없을 거라는 통보를 받았어. 우리 팀은 모두 실의에 빠졌어. 특히 같은 킴 역을 하는 나와 첫째 레나 언니는 분장실에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충격을 받았어. 우리 킴 세 명 모두 서로 도와가며 열심히 준비했거든. 마음이 정말 아팠어. 레나 언니가 나에게 “지금 우리보다 더 힘든 건 콘 짱 자신이야. 우리가 힘내서 콘 짱이 돌아올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자”라고 말해 주었어. 그래서 우리는 씩씩하게 콘 짱의 몫까지 도쿄 공연을 마무리 짓기로 다짐했지. 일주일에 10회 공연이라 원래는 주 3~4회 출연하기로 했는데 콘 짱의 하차로 거의 매일 무대에 서다시피 해야 했어.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정도만 쉬고 킴으로 서다 보니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었지만 그만큼 많은 관객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열심히 공연에 임했어. 그렇게 도쿄 공연이 전회 만석으로 성황리에 마무리되었어.



앞으로 한 달 반 정도 6개 도시 지방 투어가 남아 있지만, 결코 긴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해. 난 내가 있는 이 자리에 감사하면서 남은 무대를 즐기려 노력하려고. 다시는 이 멤버들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공연할 수 없을 테니까. 내가 일본 공연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갔을 때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으면 좋겠어. 한국은 많이 춥다고 하던데, 감기 조심해! 또 만나자. 안녕!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0호 2017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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