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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TAFF] <라흐마니노프> 오세혁 연출 [No.161]

글 |박보라 사진 |김영기 2017-02-18 6,649

어둠과 빛의
경계에서



지난해부터 갑자기 뮤지컬 연출가로 반짝 솟아오른 이름이 있다. 연극에서 주로 활동한 오세혁 연출이 그 주인공. 그는 <라흐마니노프>를 시작으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무 위의 고래>까지 연달아 초연 뮤지컬 작품을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연출로 뮤지컬 팬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오세혁 연출이 마음에 담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직설의 매력


연극 연출을 주로 하다가 뮤지컬 연출로 발을 넓히셨잖아요. 특별한 계기가 있을까요?
제가 활동하고 있는 극단 걸판이 안산에 있는데 서울예대가 가까이 있어요. 거기다가 서울예대에는 평소에 존경했던 조광화 선생님이 계셨어요. 선생님의 뮤지컬 수업을 듣고, 연출을 맡았죠. 처음 영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봤을 땐 정말 충격이었어요. 강렬한 이야기를 노래로 하는데, 바로 가슴으로 들어가 꽂히는 거예요. 그때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마음껏 할 수 있을 것 같아 뮤지컬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사실은 졸업하면서 동기와 함께한 공모전에 뮤지컬 작품을 출품했는데, 2차에서 떨어졌어요. (웃음) 갑자기 의욕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연극에 집중했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연출을 맡게 되면서 급격하게 뮤지컬 작업이 많아졌죠. 저도 신기해요.


연극을 할 때와 뮤지컬을 할 때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연극을 하다 보면 세상의 아름답지 않은 틈을 보게 되고 그걸 많이 보여주게 돼요. 따뜻하고 즐거운 세상 뒤에 있는 이면이요. 한 예로, 해고자분들이 길거리에서 농성을 하고 있는데 그분들을 밀어내고 꽃밭을 만들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은 꽃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겠지만 사실 그 안에는 아픔과 슬픔이 있죠. 연극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뮤지컬은 세상의 아름다운 점을 보여줘야 되겠더라고요. 저는 뮤지컬을 하기 전까지는 세상에 대한 희망을 별로 못 느꼈어요. 그런데 <라흐마니노프>를 하고,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하면서 세상에서 간직해야 할 가치들을 느꼈죠. 어두운 면도 중요하지만 밝은 면도 중요하구나. 아름답지 않은 것들을 연극으로 보여준다면, 뮤지컬에서는 아름다운 것들을 보여주고 싶어요.


연출가로 참여한 대부분의 작품들은 주제를 에둘러 말하는 편이었죠.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극단 걸판이 원래는 마당 극단이었어요. 극장이 아닌 바깥에서 짧게 10분에서 15분 정도의 연극을 하는 극단이요. 광화문이나 시청 앞에서 열리는 집회나 촛불문화제, 오랫동안 농성을 하는 파업 현장에 가서 연극으로 힘이 되겠다고 만든 극단이죠. 그런 현장에서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야기를 해야 해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대놓고 할 수는 없죠. 그래서 웃기게, 돌려서 아닌 척 이야기를 해야만 했어요. 그렇게 5, 6년 활동하다가 현장의 이야기를 극장으로 들고와야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극장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세상 이야기를 웃으면서 이야기했었죠. 그런데 뮤지컬은 돌려서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바로 노래로 말하잖아요. 저는 속이 시원했어요. 오히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뮤지컬 작업을 한 후로 조금씩 변했어요. 그래서 최근에 했던 연극은 노골적으로 차갑게 말한 편이에요. 작년에 한 뮤지컬 두 편(<라흐마니노프>,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은 시와 음악에 관한 내용이라 직접적인 메시지보다 시나 음악에서 울려 퍼지는 분위기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각색, 대본, 연출 등 다양한 작업을 하잖아요. 이중 가장 어려운 분야는 무엇인가요?
가장 어려운 건 대본을 쓰는 작업이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잖아요. 외롭고 힘들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해요. 그런데 시간상으로 가장 힘든 건 연출이에요. 배우와 스태프가 훌륭하면 저절로 연출은 완성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믿음이 중요해요. 계속해서 사람을 만나고 마음을 통해야 하고 관계를 잘 맺어야 해요. 각색은 오히려 재미있어요. 기존 대본이 있고 그걸 가지고 오면 되는 거니까.



연출가로서 자신만의 연출 철학이나 노하우가 있나요?
배우를 믿어요. 배우마다 가진 재능이 다 달라요. 사람마다 다른 호흡이 있고, 다른 존재감이 있잖아요. 어떤 배우는 말을 잘하고, 어떤 배우는 눈빛이 좋죠. 이런 부분을 끊임없이 확인하다가 그 배우가 잘하는 것을 살려주는 것이 연출가의 몫이죠. 연출가로서 시간을 많이 써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거예요. 배우하고 오래 있을수록 나오는, 알게 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처음 만나는 배우들한테 무언가를 꺼내는 걸 좋아해요. 모두가 처해진 상황은 같지만, 표현은 배우마다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장면에서 나타나는 슬픔, 기쁨, 외로움 등 인물의 상태는 공유하더라도 그걸 표현하는 방법은 배우의 몫이에요. 이야기를 나누고 알아서 하라고 자유롭게 하는 편이죠.


극작가와 작사가, 작곡가, 배우 사이에서는 어떻게 조율하나요?
해당 분야에 있는 사람이 제일 잘한다고 생각해요. 다 맡기는 편이죠. 심지어 음악의 구성에 따라서 대사를 넣고 빼는 것도 상관 안 하는 편이예요. 저는 연출가는 대본과 음악을 무대에서 잘 펼쳐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배우, 스태프 들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조율하죠.


상당히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으신가 봐요.
하나의 작품을 잘 만들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니까요. 그래서 작업할 때는 즐겁고 지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왜냐면 작품에 담겨 있는 가치는 아름답고 행복한데, 이걸 만드는 사람들이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항상 연습할 때 분위기만큼 공연이 나온다고 봐요. 그리고 관객들도 분명히 그걸 알 거라고 믿어요. 저 사람들이 정말 즐겁게 연습을 했구나. 그래서 연습과 공연 기간 내내 즐거운 마음과 상황을 유지하면, 스태프와 배우가 알아서 잘하더라고요. (웃음)



음악과 시의 이야기


<라흐마니노프>를 시작으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나무 위의 고래>로 뮤지컬 연출을 이어 나갔는데, 각각의 작품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싶었던 부분은 무엇인가요?
<라흐마니노프>는 음악가에 대한 작품이기 때문에 음악으로 이야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노래가 아니고 음악이요. 그래서 음악이 흐르는 동안은 많은 설명 대신에 배우들이 느끼는 마음 상태를 관객이 똑같이 느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제가 이 작품의 연출을 맡았을 때 우연히 어떤 음악가가 말한 ‘음악은 눈을 뜬 채로 꾸는 꿈이다’라는 글을 봤어요. 음악이 흐르는 동안에는 꿈을 꾸고, 꿈이 현실이 된다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음악이 흐르는 동안 인물이 한 걸음을 걸으면 확 시간이 점프 되어 있고 한 걸음을 걸으면 꿈으로 돌아와 있고 다시 현실로 돌아와 있고 그런 것들을 해보고 싶었어요. 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시적이어야만 했어요. 시의 행과 행 사이에는 엄청난 생각의 흐름이 있잖아요. 그래서 이 작품도 캐릭터의 어떤 행동과 행동 사이, 호흡과 호흡 사이의 엄청난 시간을 품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해보고 싶었어요. 한 번 뒤돌아보면 만주에 있고, 또 한 번 뒤돌면 10년이 지나가 있고. 시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을 무대에서 보여주고 싶었죠. <나무 위의 고래>는 네 명의 여자가 주인공인 작품이에요. 여배우를 위한, 여배우가 소중한 작품을 하고 싶었어요. 고통과 상상에 관한 작품인데, 각각의 공간에서 슬픔에 빠진 소녀들이 이 세상에 자기처럼 슬픔을 느끼는 누군가를 상상하고 만나는 내용이에요. 그러다 보면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걸 극복할 힘이 생기잖아요. 전 슬픔이 더 커지는 건 혼자 있어서라고 생각해요. 나만 슬픈 것 같으니까. 남의 슬픔을 상상하고 위로하고 함께 견디면서 자신의 슬픔을 극복하게 되는 거죠. 이런 점을 생각했어요.


여성 캐릭터를 참 잘 활용하는 남성 연출가인 것 같아요.
지금 극단 걸판의 대표가 창단 멤버이자 동갑내기 학교 동기인 최현미라고 배우 겸 작가 겸 연출가예요. 극단에서 제가 극본을 쓰고 연출을 했는데 4, 5년 지난 어느 날 갑자기 현미가 “솔직히 너무 힘들다. 왜 너의 작품은 다 남자냐”고 그러는 거예요. 보니까 정말 그런 거죠. 제 작품에서 주인공은 다 남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았어요. 반성이 되더라고요. 그때 이후로 신중하게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여자를 위한 작품에도 관심을 갖게 됐어요.



<라흐마니노프>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경우는 작품의 주인공이 실존 인물이잖아요. 이들에게서 어떤 영감을 받았나요?
그 인물에 대한 정보를 정말 많이 찾아봤는데, 배우들에게는 일부러 많이 찾아보지 말라고 했어요. 그런데도 많이 봤겠지만. (웃음) 실존 인물을 연기한다기보다는 그 시대에 태어난 인물이었으면 좋겠다는 거죠. 전 전해져 오는 일화로 그 사람을 떠올렸어요. 백석이 만주에 넘어갔을 때, 자야가 어떤 사람을 통해 외투를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외투를 백석에게 갖다 준 사람의 말에 따르면 1년 정도 후에 다시 백석을 만났는데 여전히 그 외투를 입고 다녔다는 거예요. 백석이 1년 동안 선물 받은 외투를 입고 다녔다는 이야기 안에서 ‘이 사람이 자야를 사랑했구나’라고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어요. 또 라흐마니노프는 달 박사에게 곡을 헌정했다는 명확한 사실이 있죠. 라흐마니노프는 무뚝뚝하고 신경질적이었을 것 같은데 갑자기 곡을 헌정했다는 걸 알고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았어요.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았나’보다는 그런 순간을 보고선 ‘이 사람이 이랬겠구나’를 떠올렸던 것 같아요.


두 작품 모두 엔딩이 모호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개인적으로는 어떤가요?
일부러 어렵게 보이려던 건 아니에요. 20대의 저는 세상을 명확하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답이 있다고 봤죠.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힘든 건 확실한 이유가 있고, 그걸 없애면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거든요. 그런데 30대가 되고 나서는 세상이 명확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세상에 대해 명확하게 답을 내릴 수 있나. 물론 일부에서는 답을 내릴 수 있겠지만 치유, 위로, 행복, 슬픔 등을 명확하게 말하기가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솔직하게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라흐마니노프가 정말로 회복이 됐는지, 안 됐는지는 다음 단계인 거예요. 그동안 한 발자국도 못 나온 사람이 이제야 발을 내디뎠잖아요. 완벽하게 정상으로 돌아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연주를 시작했어. 이걸 보여주고 싶었죠. 자야가 마지막엔 행복했을까요? 그건 모르겠지만 마지막 꿈에 사랑하는 백석이 나와서 좋았을 거야. 이렇게요. 답을 내리고 싶지는 않았어요. ‘이건 이렇잖아’라고 하는 순간, 강요가 아닌가 싶었어요. 그래서 저도 아는 만큼만 꺼내고, 관객도 생각하는 만큼씩 같이 가고. (웃음)


그럼 연출가로서 현재 가장 고민되는 점은 무엇인가요?
지금 고민은 음…. 어딘가에 매달리고 싶지 않아요. 연극이나 뮤지컬, 제가 지금 하는 작업을 하면서 자립하고 싶어요.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웃음) 계속해서 저도 누군가를 존중하고 존중을 받으면서 작업을 하고 싶은데 고민이 많아요. 지금까지 운 좋게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행복하게 작업을 해왔어요. 공연을 사랑하는 배우와 스태프가 장기적으로 즐거운 분위기에서 작업할 수 있는 공연 생태계를 만들고 싶어요. 제가 극단에서 10년 넘게 해온 작업이 그런 거거든요. 아름다운 공연을 만들기 위해서 공연을 만드는 환경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1호 2017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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