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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조선을 누빈 이야기꾼 전기수 [No.163]

글 |나윤정 2017-04-19 7,717


창작뮤지컬 <판>은 ‘전기수(傳奇)’라 불리던 조선 시대 이야기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풍자극이다. 실제로 18~19세기의 조선에서 전기수는 전국 팔도를 누비며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한때 시대를 풍미했던 특별한 직업. 전기수의 독특한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책 읽어주는 남자                       
조선 후기는 바야흐로 소설의 시대였다. 상업이 발달하고 신분제가 흔들리고 있던 18~19세기. 한양에서는 소설 읽기가 새로운 도시 문화로 떠올랐다. 책은 더이상 양반들의 전유물이 아닌 중인과 평민의 향유 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에 따라 특별한 직업도 등장했다. 바로 전기수. 한자로 풀이하면 ‘이야기책 읽어주는 노인’이란 뜻의 전기수는 전문적으로 이야기책을 읽어주며 돈을 버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책을 읽고 싶었지만 글을 읽지 못하는 평민들에게 전기수는 반가운 존재였다. 소설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전기수의 인기도 급상승했다. 18세기 조선 저잣거리의 풍경을 그린 조수삼의 『추재집』에 따르면 당시 전기수의 주요 활동 무대는 종로 일대였다. 그들은 매일 새로운 손님을 만나기 위해 한군데에 머물지 않고 계속 자리를 옮겨 다녔다. 하루는 교동 입구, 다음 날은 대사동 입구, 다다음 날은 종루 앞에 자리를 잡았다. 주로 다리나 절초전, 약방같이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곳이 그들의 활동 장소였다. 지방에서도 장날이 되면 전기수가 등장해 시장 한구석 자리를 차지했다. 그들이 나타나는 순간, 구경꾼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전기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 앞에 나서는 직업이다 보니 전기수는 겉모습에도 큰 신경을 썼다. 그들은 매일 선비처럼 깔끔하게 차려 입었다. 흰 두루마기를 입고, 머리엔 검은색 정자관을 썼다. 정자관은 원래 선비들이 방 안에서 쓰던 모자였는데, 전기수들은 폼을 내기 위해 이를 밖에서 쓰고 다녔다. 학식 있는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나름의 연출이었던 것. 그리고 한 손엔 부채, 한 손엔 책을 펼쳐들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실제로 이야기를 달달 외고 있었기 때문에 책을 볼 필요는 없었지만, 이를 손에 들고 소품처럼 활용했다.





청중을 쥐락펴락하는 만능 재주꾼  
전기수는 단순히 책을 읽어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책을 통째로 외우고 배우처럼 실감나게 연기하며 맛깔스럽게 이야기를 펼치는 만능 재주꾼이었다. 그들은 문장에 가락을 붙여 노래 부르듯 이야기하고, 소설 속 인물들도 1인 다역으로 척척 소화했다. 다채로운 목소리와 화려한 손짓 발짓으로 듣는 이의 상상력을 한껏 자극시켰다.


전기수들은 한자리에서 보통 서너 시간에 걸쳐 한 권의 소설을 읽어주었다. 때문에 『심청전』, 『춘향전』, 『임경업전』 등 한 번에 읽기 편한 짧은 소설들이 전기수들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렇다면 전기수들은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었을까? 비법은 이야기의 클라이맥스에 있었다. 이들은 한창 재밌게 이야기를 이어가다 가장 중요한 대목에 이르렀을 때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러면 구경꾼들이 뒷이야기가 궁금해 앞다투어 돈을 냈다. 만족할 만한 돈이 모였을 때 전기수들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렇듯 전기수가 돈을 끌어모으는 방법을 ‘요전법’이라고 불렀다.


당시 실력 있는 전기수들은 지금의 연예인처럼 스타 대접을 받았다. 인기 전기수 중 하나였던 김호주는 10년간 일한 돈으로 집을 장만하기도 했다. 전기수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그들의 무대는 다양해졌다. 특히 이야기의 주요 소비 계층이었던 규방 부인들의 모임에 자주 초대됐다. 부잣집 마나님들은 남편 몰래 전기수를 불러 낭독을 부탁했는데, 그 때문에 양반집 안채를 드나들기 위해 여장을 하는 전기수들도 많았다. 이렇듯 전기수에게 열광하는 여인들이 많아지다 보니 심심치 않게 스캔들도 터졌다. 여자로 분장해 사대부 여인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던 한 전기수는 그녀들과 정을 통하다가 발각되어 포도대장에게 죽음을 당했다. 이렇듯 조선 시대 전기수는 말도 많고, 탈도 많던 특별한 직업이었다. 





전기수의 이모저모                


전기수 살인 사건                        
조선 정조 시절, 종로의 절초전 앞에서 한 전기수가 『임경업전』을 낭독하고 있었다. 어느덧 이야기는 임경업이 역적 김자점의 무고로 목숨을 잃게 되는 대목에 이르렀다. 그러자 구경꾼 한 명이 갑자기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리고 흥분한 나머지 담배 써는 작두를 들고 전기수를 무참히 찔러버렸다. 구경꾼은 이야기의 결말이 자신의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기수를 살해한 것이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 따르면, 실제로 정조는 이 사건을 예로 들며 소설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정조는 근본 없는 소설의 해로움을 그냥 볼 수 없다며, 죽기 전까지 문체 반정을 추진하였다. 


인기 전기수, 이업복                       
이업복은 첩의 자식으로 태어난 서얼 출신으로 본래 직업은 청지기(하인)였다. 하지만 귀에 쏙쏙 들어오는 낭랑한 목소리를 소유하고 있어 전기수로 활약하며 좋은 대접을 받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은 중인 서리 부부가 양자로 삼다시피하며 그를 돌봤다. 이업복은 어린 시절부터 소설을 맵시 있게 잘 읽었다. 웅장한 목소리로 호걸의 형상을 하다가도, 살살 녹는 목소리로 예쁜 계집의 자태로 금세 변신했다. 그는 전기수로서 능력이 뛰어났기에 수시로 부잣집의 초청을 받아 공연을 했다. 특히 양반집 여성이나 기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이들은 『춘향전』, 『금병매』 등 유명 소설의 외설스런 장면들을 주로 요구했다. 이때 전기수들이 본색을 드러내며 수많은 여성들을 탐하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이업복 역시 자신을 돌봐주던 서리 부부의 딸을 겁탈해, 전기수가 음란하고 근본 없는 자들이란 세간의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전기수의 책 읽기 비법>                        


1. 읊조리듯, 노래하듯 읽어라.
2. 가슴으로 외워라.
3. 눈길과 표정, 자세를 청중에게 맞춰라.
4. 이야기가 고조되는 부분에서 잠시 멈춰라.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2호 2017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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