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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머더 포 투> 박인배 [No.164]

글 |안세영 사진 |이배희 2017-05-26 5,159

당신이 보지 못한 박인배


박인배가? 코미디 이인극 <머더 포 투>의 캐스팅이 발표되었을 때 대부분의 관객은 이렇게 반응했을 것이다. 특히나 최근 무대에서 그의 클래식하고 진중한 캐릭터를 접해 온 관객이라면 말이다.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린 이 작품에서 박인배는 용의자 역으로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1인 10역을 소화한다. 기존의 이미지를 벗어던진 코미디, 첫 이인극, 역대급 일인 다역, 이 무대의 모든 것이 그에게는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불가능한 도전


<씨왓아이워너씨> 이후 오랜만에 무대에 선 박인배는 머리 스타일부터 확 달라져 있었다. 짧은 머리카락을 여러 갈래로 나눠 곱게 땋은 레게 머리에 익숙한 그가 낯설어 보였다. 인터뷰 자리에서도 같은 머리를 보게 될 줄 알았지만, 순진한 예상이었다. “머리요? 매번 공연 전에 30~40분 걸려 땋는 거예요. 역할 변신을 위해 모자를 썼다 벗어도 망가지지 않는 머리가 필요했거든요. 기왕이면 땋은 머리가 여자 연기를 할 때 도움이 될 것 같더라고요.” 매일 공연을 위해 공들여 머리를 땋는다는 말에서 벌써 이 작품을 대하는 그의 남다른 각오가 느껴졌다. 처음 도전하는 여자 연기가 어렵지 않냐고 묻자, 즐기고 있단다. “솔직히 제가 그렇게 여자 연기를 잘하는지 몰랐어요. 스스로도 놀랐죠. 어? 나 여자 연기 잘하는 사람이었잖아?”


물론 시작부터 모든 게 재밌기만 하지는 않았다. 그가 배우 인생 최초로 ‘이건 내 능력 밖이다’ 생각하고 포기까지 마음먹었던 작품이 <머더 포 투>다. “연습 때부터 한시도 쉴 틈이 없었어요. 오리지널 미국 공연은 두 배우가 번갈아 피아노를 치면서 연기하기 때문에 특별한 동선이 없는데, 한국 공연은 피아니스트가 따로 있는 대신 배우가 몸을 쓸 일이 더 많아졌어요. 초반 3주는 계속 마임 훈련을 하면서 몸동작으로 순간적인 인물 변화를 표현하는 법을 익혔죠. 미국식 개그 코드를 대체하기 위한 아이디어 회의도 계속했어요. 같은 역할인 (김)승용이와 제 가사가 다른 것도 각색 과정에서 배우 각자의 아이디어가 많이 반영됐기 때문이에요. 지나고 나니 다 재밌는 추억이지만 당시에는 진짜 힘들었죠.”


이제는 진중한 이미지로 더 잘 알려진 배우 박인배지만, 데뷔 초만 해도 그는 <찬스>를 비롯한 각종 코미디 뮤지컬에 주로 출연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묵직하고 마초적인 역할만 맡기 시작했단다. 거기에는 박인배의 큰 키와 선이 진한 외모, 그리고 평소의 진지한 성격도 한몫했을 거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미지에 굳이 매달리거나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는 듯했다. “어떤 배우든 초기에는 자기 존재감을 어필하기 위해 캐릭터를 명확하게 구축하는 단계가 필요한 거 같아요. 저한테도 그런 시기가 있는 거죠. 사실 제 취향은 비주류 쪽에 가까워요. 어려서부터 B급 컬트 영화를 좋아했고, 지금도 멀티플렉스에 걸리는 영화보다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좋아해요. TV 예능 프로그램도 전혀 안 보고요. 대중적인 정서와는 거리가 멀어요. 그래서 <머더 포 투> 같은 작품이 더 반갑고 흥미로워요.”



<머더 포 투>에서 성별, 나이, 성격이 제각각인 10명의 캐릭터를 연기하며 표정과 몸짓, 목소리까지 자유자재로 변신하는 그의 모습은 묘기를 방불케 한다. 여기서 필요한 건 깊이 있는 캐릭터 분석이 아닌 재치와 순발력이다. “각각의 캐릭터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연기하려고 했어요. 만약 다른 작품에서 한 인물을 이렇게 연기한다면 굉장히 단편적이고 깊이 없는 연기가 될 거예요. 근데 이 작품에서는 열 명의 캐릭터가 얼마나 겹치지 않느냐가 관건이거든요. 특히 역할 변신이 순식간에 이뤄지는 게 포인트기 때문에 순발력에 초점을 맞춰 연습했어요. 한 가지 비법은 무게중심을 활용하는 거예요. 연기를 할 때 무게중심이 밑에 있을수록 안정적이고 권위 있는 인물이 표현되고, 위에 있을수록 젊고 활발한 인물이 표현돼요. 그 무게중심을 순간적으로 끌어올렸다 떨어트리며 연기하는 거죠.”


<머더 포 투>는 다른 공연에 비해 애드리브에 열려 있는 공연이기도 하다. 많은 관객이 빵 터지는 제작사 대표 실명 언급 장면도 박인배가 공연 중에 애드리브를 쳤다가 반응이 좋아서 계속하게 된 부분. “그런 부분이 몇 군데 있어요. 아예 연출님께서 애드리브를 해달라고 요구하신 장면도 있고요. 하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애드리브를 선호하진 않아요. 이 공연을 잘 알고 여러 번 보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새로운 애드리브가 나오고 돌발 상황이 벌어지는 게 재미있겠지만, 처음 보는 사람은 오히려 당황하거든요. 연기는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제가 좋아하는 책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배우는 맨 뒷줄에 앉아 있는 귀머거리 노파를 위해서 연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애드리브는 피하는 편이에요. 애드리브가 허용된 장면도 저는 대사화해서 같은 패턴으로 연기하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지금은 애드리브라고 할 만한 부분이 없어요.”


<머더 포 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황당하고 웃기는 장면으로 가득한 뮤지컬이지만, 그중에서도 박인배 자신이 연기하면서 가장 재밌는 장면으로 꼽은 것은 남녀 캐릭터를 1인2역으로 연기하며 노래하는 ‘It Was Her’ 장면이다. “우스꽝스러운 버전의 <지킬 앤 하이드>죠. 일부러 더 노골적으로 <지킬 앤 하이드>를 패러디 해봤어요. 제가 하면서도 웃겨요. 배우라는 직업의 좋은 점 중 하나가 공공장소에서 이렇게 대놓고 미친 짓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 짓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욕을 먹는 게 아니라 박수를 받는다는 거. 가끔 공연 중에 정신을 차리고 내가 뭘 하고 있나 돌아보면, 그 순간만큼은 정말 이 세상 그 누구보다 미친 짓을 하고 있거든요. 아마 지금 대학로에서 제일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게 저 아닐까 싶어요. (웃음)”




나는 수탉이다


2010년대 초반 한창 촉망받는 대극장 배우로 떠올랐던 박인배. 하지만 지난 2년 새 그는 일 년에 한 작품 정도 출연하는, 얼굴 보기 힘든 배우가 되었다. 갑작스런 변화 뒤에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그는 2015년 그의 은사였던 서울예대 김효경 교수가 별세한 뒤, 한동안 연기에 흥미를 잃었다고 털어놓았다. “저한테는 정신적인 아버지나 마찬가지셨거든요. 마음속에 늘 성공해서 선생님께 인정받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죠. 그런데 제가 <레베카> 공연을 하고 있을 때, 선생님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신 거예요. 목표가 사라진 느낌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는 연기를 놓고 다른 일에 뛰어들었다. 실용음악과에서 강의를 하고,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치고, 이곳저곳 여행도 다녔다. 그러면서 차츰 배우로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집착, 인기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게 되었다. “예전에는 작품을 고를 때 대중성, 출연료 등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했어요. 지금은 그런 걸 완전히 내려놓았죠. 그냥 제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온 것 같아요. 설령 많은 관객이 선호하지 않는 작품이라도 내가 만족스럽다면, 내 연기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면 상관없어진 거죠. 그러니까 무대 위에서 훨씬 편해졌어요. 훨씬 자유로워졌어요.”


타인의 인정이 아닌 자신의 욕망에 오롯이 집중하게 된 뒤, 그가 선택한 무대는 줄곧 소극장이었다. 2015년 <주홍글씨>, 2016년 <씨왓아이워너씨>, 2017년 <머더 포 투>까지 그는 실험적인 소극장 뮤지컬에 연달아 출연 중이다. “대극장 공연보다는 소극장 공연이 저를 더 연기하게 만들어요. 천 석 이상 되는 극장에서 공연할 때는 진짜 몰입해서 연기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때가 많거든요. 내가 진심으로 울건 말건 객석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그저 인물의 전형적인 상태만 흉내내더라도 대부분의 관객은 만족한다는 거죠. 연기보다는 고음을 얼마나 멋지게 내느냐, 무대 위에서 얼마나 근사한 모습으로 서 있느냐에 신경 쓰는 일이 어느 순간 식상해졌어요.”



새롭고 전형적이지 않은 공연을 선호하는 그는 오래 전부터 극작과 연출에도 뜻이 있음을 밝혀 왔다. 그 꿈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을까? “글쎄요. 예전에는 공연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큰 도전을 주저하게 되는 것 같아요. 만약 도전을 한다면 해보고 싶은 건 있어요. 연극성이 배제된 연극이요. 연극성을 대변하는 코드라는 게 있잖아요. 예를 들어 공연이 시작되면 막이 오르고, 노르스름한 조명이 깔리고, 배우들이 연극적인 톤으로 말을 하고…. 그런 걸 다 빼고 날것의 사실적인 공연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답변 하나하나에서 자신만의 취향과 신념으로 단단히 다져진 사람임을 알 수 있었던 박인배와의 인터뷰. 끝으로 늘 마음에 새기는 좌우명이 있는지 묻자, 그는 ‘수탉처럼 살고 싶다’는 다소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항상 수탉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해요. 거창하게 얘기하면 수호 동물 같은 거랄까. 일단 그다지 인기 있는 동물이 아니라는 점에서 비주류를 지향하는 저와 닮았어요. (웃음) 그러면서도 제가 원하는 장점을 많이 가지고 있죠. 아침을 알리는 새인 만큼 부지런하고, 목청이 좋고, 무엇보다 대단히 용감해요. 수탉은 아무리 센 포식자가 공격해 와도 무리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덤빈대요. 전혀 물러서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공연 중에도 기가 빠질 때면 머릿속으로 ‘나는 수탉이야’라고 생각하며 심기일전하곤 합니다.” 그의 바람대로 수탉처럼 용감하게 자신의 길을 가는 배우 박인배의 모습을 그려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4호 2017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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