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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안나 카레니나> 정선아 [NO.172]

글 |진행·글 | 안세영 사진 | 심주호 스타일링 | 최유림 헤어 | 서진이 메이크업 | 문주영 2018-01-26 6,669

The Color of Desire

 

2018년 새해를 여는 첫 대작으로 겨울에 어울리는 러시아 뮤지컬이 찾아온다. 톨스토이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 때문에 자멸하는 한 여자의 삶을 그린 작품. 까다로운 내면 연기가 요구되는 타이틀롤에는 뮤지컬 디바 정선아가 캐스팅되었다. 시리도록 아름다운 눈보라 속에서 뜨거운 불꽃처럼 피어오른 사랑. 이 순수하고 강렬한 욕망을 정선아는 어떤 색으로 채워갈까?

 

 

 

 

 

눈보라 치는 무대에서

 

올해도 대작으로 꽉 채워진 뮤지컬 라인업 가운데 <안나 카레니나>가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이 작품이 국내에서 보기 드문 러시아 뮤지컬이기 때문이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의 걸작을 러시아 본토에서 뮤지컬로 만들었다니 그 결과물이 궁금할 수밖에. 자연스레 타이틀 롤인 안나 카레니나 역에도 관심이 모였다. 아름답고 고고한 상류층 여성이 사랑 때문에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의 강렬한 존재감과 섬세한 내면 연기는 필수니까. 앞서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들은 비비언 리, 소피 마르소, 키이라 나이틀리 같은 당대 최고의 배우들을 안나로 내세웠다.

 

한국 공연의 안나 역을 맡은 정선아 역시 이러한 관객들의 기대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커버 촬영 내내 과감한 포즈와 농담으로 현장 분위기를 달궜던 정선아는 인터뷰를 시작하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해졌다. 심지어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하게 단어를 고르는 모습이 탱탱볼 같은 평소 이미지와 달라 낯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이 작품에 임하는 마음가짐이 얼마나 진지한지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대본과 음악을 접했을 때 드라마의 깊이가 남다른 뮤지컬이라고 느꼈어요. 내공 있는 배우가 심도 있게 접근해서 연기를 해야만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뮤지컬 배우 경력 15년. 그동안 이름난 작품, 이름난 역할을 아쉽지 않게 맡아온 정선아지만, 이처럼 한 인물의 삶을 관통하는 역할은 그에게도 색다른 도전이다.

 

 

정선아는 지난 11월 러시아까지 날아가 오리지널 공연을 관람하며 작품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뮤지컬을 보기 전 소설과 영화를 통해 정선아의 머릿속에 각인된 안나의 이미지는 ‘털 코트를 입은 아름다운 여인이 눈 내리는 기차역에 서 있는 모습’. 뮤지컬은 상상 속 겨울 풍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무대와 19세기 러시아 귀족의 우아한 의상으로 단숨에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감명시킨 건 철저하게 드라마에 집중한 연출과 음악이다. “우리가 흔히 뮤지컬 공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크게 벗어나 있어요. 이 작품은 박수 받으려고 음악을 만들지 않았어요. 예를 들어 안나가 부르는 1막 엔딩곡 ‘자유와 행복’은 그야말로 자유와 행복을 외치는 곡인데요, 끝은 ‘사랑 그리고 삶’ 하고 조용히 읊조리듯 끝나요. 시원하게 고음을 지르고 막을 내리면 관객들이 감탄하며 열띤 박수를 보낼 텐데 말이에요. 처음에는 왜 굳이 이렇게 작곡했을까 의아했는데, 연습을 할수록 이게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신난다’, ‘슬프다’ 같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사랑과 삶에 대해 계속 생각할 여지를 남겨주는 거죠.”

 

주인공 안나가 전체 뮤지컬 넘버 가운데 무려 16곡을 담당하는 만큼, 음악은 안나의 인생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정선아는 배우가 가창력을 뽐내기보다 인물의 감정에 이입할 수 있도록 돕는 이 작품의 음악에 대해 열띤 설명을 덧붙였다. “한창 높은 음을 부르다가도 갑자기 한 옥타브 낮은 음으로 내려가는 식이에요. 그게 보통 뮤지컬 음악에서 잘 볼 수 없는 전개거든요. 그런데 그 음 하나하나가 감정의 변화를 느끼게 해요. 오죽하면 제가 혹시 작곡가가 배우였냐고 물어봤다니까요! 배우가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 여자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관객분들도 더 진실되게 느끼실 거예요.”

 

 


사랑에서 죽음까지

<안나 카레니나>는 매혹적인 외모와 안락한 가정, 사회적 명성까지 두루 갖춘 귀족 여인 안나가 장교 브론스키와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자신의 모든 걸 내던질 만큼 격정적인 사랑의 열병은 어떻게 시작되는 걸까? 원작에서 안나와 브론스키는 기차역에서 우연히 스쳐지나간 뒤, 무도회에서 다시 만나 춤을 춘다. 이러한 흐름은 뮤지컬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하지만 뮤지컬에서는 이 순간 두 인물의 감정이 구구절절한 대사 대신 오가는 눈빛과 춤만으로 표현된다. 그런 뒤에 바로 안나가 사랑을 토로하는 넘버 ‘눈보라’가 이어지기 때문에, 짧은 만남에서의 감정 변화를 잘 포착해야 한다. “제 생각에는 이런저런 말을 나누지 않아도 함께 춤을 추는 동안 스파크가 튀는 걸 느꼈을 것 같아요. 나중에 가사에도 나오거든요. 우울했던 내 인생에서 그때 그 남잔 화려한 불꽃같은 존재였다고. 나이 많은 남편과 사랑 없는 결혼을 하고 남들처럼 아내이자 어머니로 살아온 한 여자가 처음으로 자기 안에 불꽃을 일으키는 존재를 만난 거죠.” 한번 불붙은 열정은 조용했던 안나의 삶을 집어삼켜 가정을 버리고 결국에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하게 만든다. “안나에게 삶이란 곧 사랑이었을 거예요. 브론스키와 도망치면서 아무것도 몰랐던 내 인생에 봄이 찾아왔다고 노래하거든요. 이후로 쭉 사랑 하나만 보고 달리다가, 어느 날 브론스키의 마음이 식어버린 걸 알아채죠. 안나는 생각해요. 사랑이 없으면 인생에 뭐가 남을까. 그것은 죽음. 불꽃같은 사랑 아니면 불꽃같은 죽음뿐이라고.”

 

막 사랑에 빠졌을 때의 두려움과 수치심, 사랑하며 느끼는 황홀과 절망, 그리고 마지막 단호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드라마틱한 안나의 감정 곡선을 따라가기 위해 정선아는 원작 소설을 읽고 러시아 오리지널 창작진과 대화를 나누며 열심히 공부 중이란다. 현재 그에게 가장 영감을 주는 존재는 다름 아닌 러시아 연출가 알리나 체비크다. “연출님이 저돌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을 지녔어요. 한때 연기도 하셨다는데, 한 역할에 갇히지 않고 자유롭게 디렉팅하는 게 좋아서 배우가 아닌 연출가가 되셨대요. 그런 모습이 안나와 닮았다고 느낄 때가 많아요. 안나라는 캐릭터는 겉으로 보이는 도도하고 교양 있는 모습이 다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실은 아주 본능에 충실하고 자유에 목마른 여자였을 것 같아요.”

 

정선아는 함께하는 배우들과도 각별한 사이를 자랑한다. 안나 역 더블 캐스트인 옥주현과 브론스키 역의 민우혁, 이지훈, 그리고 안나의 오빠 스티바 역의 지혜근, 브론스키의 어머니 브론스카야 백작부인 역의 이소유(이정화)까지 모두 <위키드>에서 함께 호흡을 맞췄던 팀이기 때문이다. “글린다(정선아), 엘파바(옥주현), 피예로(민우혁, 이지훈), 모리블 학장(이소유), 딜라몬드 교수(지혜근)까지 다 모여 있어요. 나의 피예로들!

 

<위키드> 때는 제가 일방적으로 쫓아다녔는데 이번엔 진한 사랑을 해볼 수 있겠네요.” <아이다>, <아가씨와 건달들>, <위키드>에서 상대역으로 호흡을 맞췄던 옥주현과는 처음으로 같은 역할을 맡는다. “저와 주현 언니는 서로 스타일이 확 달라서 함께 무대에 섰을 때 케미가 좋았던 배우인데, 이렇게 같은 역할을 맡으니 또 감회가 새롭더라고요. 더블 캐스트를 하다 보면 자연스레 서로 닮아요. 몇 달간 같은 대사와 노래를 하면서 서로의 소리를 듣게 되니까요. 그러다 보니 음악과 연기에서 제가 갖고 있지 않던 강점을 언니로부터 흡수할 수 있어서 좋아요. 함께하는 동안 서로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꺼지지 않는 불꽃

 

2002년 <렌트>의 미미로 데뷔한 이래 <아이다>의 암네리스, <위키드>의 글린다 등 주로 당당하고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해 온 정선아. 그녀의 실제 성격도 무대 위에서 보여준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안나처럼 무언가에 빠져들어 위험을 무릅쓴 경험이 있느냐는 질문에 정선아는 “늘 위험을 무릅쓰는데요” 하고 웃었다.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마음 가는 대로 살아온 편이에요. 근데 나이를 먹고 무대 경험이 쌓일수록 점점 차분하고 둥글둥글한 성격으로 바뀌고 있어요. 그렇다고 완전히 똥그랗게 깎이지는 않고요, 한 육각형 정도? (웃음) 그래서 딱 좋은 시기에 <안나 카레니나>를 만났다고 생각해요. 1막에서 저만의 저돌적이고 열정적인 면을 보여드릴 수 있다면, 2막에서는 지금 나이에 맞는 한층 차분하고 성숙한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는 자신이 한층 성숙한 삶으로 나아가는 데 <안나 카레니나>가 첫 단추가 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그것이 배우 정선아로서든, 인간 정선아로서든. “지금까지 감사하게도 무대에서 좋은 노래를 부를 기회가 참 많았어요. 노래 한 곡으로 황송할 만큼 큰 박수를 받기도 했죠. 그런 작품도 여전히 좋아하지만, 이제는 드라마가 강한 작품을 만나고 싶어요. <안나 카레니나>를 시작으로 대극장이 아닌 중극장, 소극장에서도 드라마에 집중한 작품에 뛰어들고 싶어요.” 지난 15년간 변함없이 뮤지컬 무대를 지켜온 정선아가 여전히 이 무대에서 갈망하는 것이 있고, 또 나아갈 방향을 찾고 있다니 관객으로서 설레고 안심되는 소식이다. “뮤지컬이라는 게 매일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대사, 똑같은 노래를 반복하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지기가 엄청 쉽거든요. 그런데 <안나 카레니나>를 만나면서 극 중 안나처럼 제 안의 열정이 새롭게 불타오르는 걸 느꼈어요. 제가 뮤지컬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다시 한 번 느끼는 시기인 것 같아요. 열심히 해서 무대 위에서 후회 없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정선아가 무대 위에서 본능적으로 해야 할 일을 아는 배우라는 인상을 갖고 있던 나는 인터뷰 내내 유독 생각이 많아 보이는 그의 모습이 살짝 걱정스럽기도 했다. 이름난 원작이 지닌 무게감에, 그리고 초연 타이틀롤이라는 책임감에 지나치게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닌지 말이다. 하지만 인터뷰를 끝내며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 한마디가 괜한 우려를 씻어냈다. “제가 느낀 대로 말했어요. 어쨌든 안나는 제가 연기하잖아요. 원작이 이렇다 저렇다 얘기하기보다는 제가 느끼는 안나, 제 속에 있는 안나, 제가 찾고 싶은 안나에 대해 솔직하게 얘기했어요.” 정선아다운 산뜻하고 당찬 선언에 어쩐지 속이 뻥 뚫렸다. 아무렴, 정선아는 언제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다하지만, 그 역할의 무게에 짓눌리지는 않는 배우니까. 이번에도 그의 마음이 이끄는 곳에서 그만의 색깔로 빛나리라 기대해 본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2호 2018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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