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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LOSE UP] <용의자 X의 헌신> 무대 디자인 [No.178]

사진 |김영기 정리 | 박보라 2018-07-18 9,183

<용의자 X의 헌신> 무대 디자인

한 장의 러브레터

 

살인 사건을 둘러싼 두 천재의 두뇌 싸움을 소재로 펼쳐지는 사랑과 헌신의 이야기. <용의자 X의 헌신>은 낡고 헤진 종이 위에 선과 도형을 형상화한 무대로 주목을 받았다. 이은경  무대디자이너가 사랑하는 여자를 지키기 위해 인생의 전부를 바치는 이시가미의 절절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찢겨진 종이   

<용의자 X의 헌신> 무대의 시작점은 ‘이시가미의 노트 한 장’이다. 무대의 전체적인 컨셉은 이시가미만의 방식으로 종이를 접어서 야스코에게 보내는 편지로, 갱지를 연상시키는 베이지톤으로 구성됐다. 이은경 디자이너는 디자인 작업 초반 A4 용지를 직접 접으면서 무대를 상상했고, 이시가미의 내면에 잠재된 올가미를 떠올렸다. 무엇보다 무대는 커다란 도형들이 맞물려 있는 형태를 연상시키는데, 도형이 띠고 있는 이미지가 주인공인 이시가미, 유카와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무대 위의 선과 수식은 이시가미의 계획과 논리적인 사고의 흐름을 의미한다. 선과 선이 만나 만들어진 도형은 사건의 단서가 되는 조각이 되기도 하고, 이시가미의 가슴 아픈 사랑이 담기기도 한다. 또 무대는 거대한 한 장의 종이가 구겨지는 것같이 안으로 말려 있는 형태다. 이는 종이 안에 살인을 저지른 야스코를 지키기 위한 이시가미의 계획이 담겨 있다는 의미를 담은 것. 서랍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며 기억을 재조작하는 모습을 표현하자는 정태영 연출의 의도를 반영해, 무대는 소품을 최대한 숨기고 단조롭게 디자인됐다.

 


 

강변 

무대 2층 윗부분은 이시가미가 늘 가지고 다니던 노트에서 종이 한 장을 ‘쭈욱’ 찢은 느낌을 표현했다. 무대는 전체적으로 찢은 종이 위에 야스코를 지킬 계획을 써 내려가며 이를 간직하고 있는 이시가미의 마음을 담았다. 무대 2층은 강변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실제 검은 망토 차림의 배우를 등장시켜 노숙자를 표현했다. 노숙자의 실루엣을 표현하면서도 소리가 잘 통하는 샤막이라는 소재를 선택했다. 이곳은 라이브 밴드가 위치한 상당히 좁은 공간이라, 배우들의 동선을 구상하는 데 많은 고민이 이어지기도 했다.

 


 

공중전화 

이시가미는 매일 야스코에게 공중전화로 전화를 건다. 이시가미가 찢은 종이를 모티프로 디자인된 무대 위에는 구멍이 있는데, 이는 오랫동안 이시가미가 간직한 낡은 종이를 표현한 것. 그리고 그 구멍 속에는 이시가미와 야스코가 소통하는 공중전화를 놓았다. 무대 윗부분이 구조물로 덮여 거대한 전화 부스를 연상시킨 것도 특징이다. 이를 통해 이시가미를 숨겨주고 싶은 마음을 표현했다. 무대를 덮고 있는 부분 때문에 이주원 조명디자이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3D 작업을 한 무대 디자인 동영상을 직접 설명하며 메신저로 의논했던 에피소드가 있다.

 


 

이시가미의 집 

<용의자 X의 헌신>은 이시가미의 세상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로, 이시가미의 세상에서 재현된 그의 공간이자 야스코의 공간이다. 이런 특징을 살려 무대를 벽이 없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했다. 이 결과 이시가미와 야스코의 집이 완전히 막혀 있지 않으면서도 분리된 공간으로 탄생됐다. 이시가미의 집은 ‘집’이라는 특정한 장소라기보다 이시가미의 성향을 표현해 놓았다. 무엇보다 작품의 연출 의도상 최대한 소품을 숨기는 것이 숙제였다. 무대 좌우에 서랍을 배치해 수납공간을 만들었고, 컬러나 재질을 무대 색과 비슷하게 맞췄다. 한 예로 유카와가 갑작스럽게 이시가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시가미는 서랍 속에서 술병을 꺼내 놓는다. 특별한 손님이 찾아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던 술병과 술잔을 오랜만에 꺼내놓는 느낌을 주려 했고, 술병 사이즈에 맞는 서랍을 제작했다.

 


 

야스코의 집 & 도시락 가게 

이시가미의 집에는 색이 없다. 초반 야스코의 집을 살펴보면, 중심부에 있는 코타츠 덮개는 빨간색이고 도시락 가게에서도 다양한 색채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야스코가 살인을 저지른 후에는 코타츠 덮개의 색이 베이지로 변한다. 이시가미가 야스코의 살인 사건에 개입하면서, 그녀의 공간에도 이시가미의 색이 들어간 걸 나타낸 것이다. 또 미닫이로 도시락 가게를 만든 것은 특별한 의도로 제작된 것은 아니었다. 정태영 연출이 ‘기억을 꺼내는’ 아이디어를 건넸고 이를 바탕으로 지금 형태의 도시락 가게가 탄생됐다.

 


 

유카와의 연구실 

무대 디자인의 중심은 대칭적으로 자리한 이시가미와 야스코의 집이다. 이후에 유카와의 연구실 배치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고, 아예 2층이나 반 층을 올릴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데 정영 작가가 유카와도 이시가미와 야스코와 같은 위치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즉 유카와가 위에서 두 사람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아니라, 이들과 같이 사건을 관찰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이런 작가의 의도를 적극 반영해 유카와의 연구실이 이시가미와 야스코의 집 사이에 자리 잡게 됐다. 

 


 

바닥 

바닥의 복잡한 수학 공식은 이시가미의 언어를 표현한 것인데, 바로 이시가미가 야스코에게 보내는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조명으로 무대를 비춰 어떻게 구획할 것인지 고민했고, 시뮬레이션을 통해 바닥을 나누는 선을 구성하고 조정했다. 기존 공연장 바닥을 살짝 높여 그 속에 시신과 도청기를 숨긴 것도 특징이다. 작품은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이 펼쳐지는데, 형사가 사건을 설명하면서 시신과 도청기를 꺼내 보는 연출이 작품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는 평이다.

 


 

또 하나의 도형 

야스코가 자수를 하러 경찰서에 왔을 때 이시가미가 오열하는 장면이다. 그 순간 조명이 암전되고 무대 뒤쪽으로 도형이 그려진다. 이 장면은 무대 디자인의 정체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다. 마치 별자리처럼 선이 이어지면서 도형이 만들어지는데, 이를 통해 이시가미의 고독함과 외로움을 표현했다. 즉, 이시가미가 혼자 그리는 도형이 무대 위로 펼쳐지는 것이다. 대본상에는 ‘4색 도형이 허공 위에 펼쳐진다’고 표현됐는데, 단순히 4색 도형을 색으로 구현하는 것이 아닌 <용의자 X의 헌신>만의 4색 도형을 무대화하려 고민을 거듭했다는 후문이다. 선을 그으면 도형이 만들어지고, 여기에 또 다른 선을 그으면 다른 도형이 만들어지는 모습에서 이시가미의 애틋한 사랑을 느낄 수 있어, 무대가 구현된 순간 이은경 디자이너가 큰 감동을 받았다고. 

 


 

이시가미의 편지를 읽는 야스코 

야스코가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는 이시가미의 편지를 읽을 때, 무대 2층 뒤편에 있던 한 조각의 도형이 떨어져 나가며 조명에 의해 밝게 빛난다. 이것은 이시가미의 진심이 드러나는 유일한 한 조각의 편지다. 다른 조각들이 야스코와 미사토를 지키기 위해 이시가미의 천재적인 두뇌로 만들어졌다면, 그가 그렇게 행동한 본질적인 이유가 담긴 한 조각은 뒤로 밀쳐 두었단 걸 상징한다. 이시가미의 숨겨진 로맨틱함이 잘 드러난 장면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8호 2018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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