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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도그파이트> [No.178]

글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사진제공 |킹앤아이컴퍼니 2018-07-27 4,671

 

<도그파이트>

간당간당한 유통기한을 늘리기 위해서는 
 

 

음악은 좋다...?

공연은 종합예술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거다. 문학, 미술, 음악 등등 여러 개의 장르가 한데 어우러진 협업의 예술, 그것이 바로 공연일지니. 교과서로 보자면 더없이 맞는 말인데 현실적으로는 더없이 막막한 말이다. 여러 예술이 잘 어우러져서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 이 얘기를 뒤집으면, 여러 개 중 하나라도 삐끗해서는 하나의 작품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잘해야 할뿐더러 서로의 조화가 맞아떨어져야 한단 말이다. 좋은 공연이 만들어진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뮤지컬도 마찬가지다. 뮤지컬만의 특성이라면 단연 음악일 테니 좋은 작품이 되기 위해서 음악이 좋아야 함은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음악이 좋다고 해서 작품이 완성도를 얻는 것은 아니라는 것 또한 당연한 사실일 터. ‘재미는 있네’라는 말이 연극에서 칭찬이 아니듯 ‘음악은 좋네’라는 말은 뮤지컬에서 찬사가 아니다. 좋은 뮤지컬에는 좋은 음악이 있지만, 좋은 음악만으로는 좋은 뮤지컬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긴 한데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니, 복잡한 함수 관계에서 억울한 사람은 뮤지컬 작곡가들이다. 작곡가가 아무리 좋은 음악을 쓴다 해도 그게 작품의 성공을 보장하진 못하니 말이다. 작품의 얼굴마담은 될 수 있지만 진짜 얼굴은 될 수 없는, 작곡가의 손해나는 작업의 예를 우리는 적잖은 작품을 통해 익히 알고 있다.    
 

뮤지컬 <도그파이트>도 그렇다. 원작 영화도 유명하지만 뮤지컬로서 이 작품의 유명세는 전적으로 작곡가들에게서 비롯된다. <라라랜드>와 <위대한 쇼맨>의 음악을 만든 벤지 파섹과 저스틴 폴의 이름이 없었더라면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그만큼의 관심을 끌 수 있었을까? 영화를 보지 않았다 하더라도 음악을 들으면 모두들 아~! 감탄사와 함께 고개를 끄덕일 만큼 이들의 음악은 이미 유명하다. 음악에 대한 신뢰는 작품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좋은 재료이다. <도그파이트> 역시 그 재료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하지만 그 활용이 홍보에서 효과적인 것만큼 공연으로 이어지지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공연을 보는 순간 아무리 음악이 좋아도 그것만으로는 뮤지컬이 완성도를 얻을 수 없음을 또 한 번 확인하게 되니 말이다.
 

음악 자체의 표현만이라도 탁월했다면 많이 달라졌을까? 이런 아쉬움이 생기는 건 여러 면에서 오케스트라의 존재감도 그리 크지 않을뿐더러 음악을 소화하는 배우들의 역량 또한 많이 부족해 보이기 때문이다. 달달하면서도 위트 있는 사랑의 넘버에서 주연을 맡은 손호영의 노래는 자주 음이 떨어지고 배우들의 합창에서는 불협화음이 만들어지기도 했으니 노래와 음악을 즐기기에는 벌써부터 난관이 생긴 셈이다. 빵빵하게 편성된 오케스트라의 드라마틱한 연주에 맞춰 실력이 뛰어난 배우들의 노래로 듣는다면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공연이 될 수 있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모든 음악적 조건을 충족시킨다 해도 전망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는다. 극이 진행될수록 음악의 매력에 빠지는 게 아니라 음악도 어쩌지 못하는 틈새가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뮤지컬에서 음악의 흥미로움은 역설적이게도 음악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음을 발견하게 된다고나 할까. 음악은 어느새 평범해져 버린다.  



 

이야기의 유통기한

어쩌면 이 작품의 이야기가 너무나 미국적이면서 너무나 오래된 이야기처럼 보인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줄거리로만 보면 더 그렇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는 풋내기 해병대 청년의 좌절과 사랑이 지금 여기의 관객에게 뭐 그리 흥미롭겠는가. 하지만 이 작품의 원작 영화가 1991년에 만들어진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해에 걸프전이 시작되었으니, 이 이야기는 단지 베트남 전쟁을 아픈 기억으로 다루는 게 아니라 여전히 반복되는 전쟁의 어리석음을 비판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분명한 서사이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세대의 자식들이 걸프전에 참전하게 되는 폭력의 반복. 이를 지켜보는 미국인들의 심정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이유도 모른 채 되풀이되는 이 ‘개싸움’을 무엇으로 멈출 수 있을까. 세계 도처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개싸움’에 이래저래 관여하고 있는 미국인들에게 ‘도그파이트’는 영원한 현재형의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의 관객들에게는 조금 다르다. 일단 베트남전과 걸프전이라는 ‘그들의 개싸움’이 보편적인 우리의 문제로 잘 연결되지가 않는 거다. 이 이야기가 지금 여기의 관객에게 어떤 현재성을 가질 수 있을까. 전쟁 자체가 동서고금을 막론한 보편적 소재임은 맞지만 지금 우리에게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국 청년의 이야기는 교훈도 반성도 발견도 찾아보기 어려운 그저 그런 이야기일 뿐이다. 물론 아무리 진부한 소재라도 그 안에 새로운 이야기가 담길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소재(베트남 전쟁, 게다가 해병대!)에 이런 이야기(허세 섞인 참전과 참전 후의 좌절!)만으로는 지금 우리에게 유통기한이 다 됐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참전 전날 해병들이 벌이는 파티인 ‘도그파이트’를 보자면 그런 심증은 더욱 분명해진다. 각자 판돈을 걸고 가장 못생긴 여자를 데리고 오는 사람에게 돈을 몰아주는 게임이 ‘도그파이트’란다. 아직 어린 청년들의 치기 어린 장난을 극대화한 극적 설정일 테지만, 그럼에도 소위 못난 여자들을 그려내는 무대 위의 표현이 유쾌할 수는 없다. 이야기에서 지정하는 ‘못생긴 여자’의 목록은 대강 이렇다. 남자 같은 여자, 옆에 책 끼고 구부정한 여자, 안경 쓴 여자, 운동하는 여자, 순진한 여자, 거리의 여자, 심지어 인디언까지. 오래된 미국 청춘 드라마의 전형적인 설정이다. 
 

문제는 이런 설정이 지금 여기의 관객에게는 너무나도 낡아 보인다는 사실이다. 겉모습에 가려진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곧 사랑에 빠지겠지만, 이런 나이브한 설정이 주제와 연결된 극적 전략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더 선명한 의미의 확장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가해자와 희생자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저속한 일상의 개싸움과 전쟁이라는 명분의 개싸움이 하나 다르지 않다는 연결선이 분명해야 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낡은 설정을 일부러 강조하고 있음이 명확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럴 때 모든 낡음은 주제를 드러내기 위한 강력한 선택이자 의도된 전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이런 의도는 잘 보이지 않는다. 만약 의도가 있었다면 여성 캐릭터들이 이렇게 표피적으로 그려지지는 않았을 거다. 여주인공 로즈에게서 자존감과 현명함보다는 어리숙함과 어린애 같음이 도드라지는 탓을 배우에게만 돌릴 수는 없을 터. 마지막 장면이 구태의연해지는 건 이 때문이다. 전쟁에서 죽어간 청년들은 모두 희생자이니 그들을 안아줄 따뜻한 품은 어디에 있나. 허구한 날 구원의 여신 타령이다.  



 

그래도 사랑이라면

뮤지컬을 원작 영화와 비교하는 것은 어쩌면 반칙일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 보여주는 해병대 청년과 못생긴 아가씨의 하룻밤 데이트는 섬세한 심리 묘사가 더해져 더없이 풋풋하고 애틋하다. 해병대 청년의 허세는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의 미숙함이고, 못생긴 아가씨의 순수함은 자기의 가치를 아는 이의 자존감이다. 이 미숙함은 성숙함으로 나아갈 것이고 이 자존감은 아름다움으로 피어날 것이다. 하지만 시작하지도 않은 이 가능성을, 모욕이든 폭력이든 전쟁이든, 현실은 쉽게 짓밟아버린다. 힘든 시대에 자기의 모멸을 딛고 타인의 상처를 끌어안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 있을까. 상처 입은 청년을 안아주는 여주인공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상징하는 바는 크다. 영화는 미숙한 청춘들의 사랑 이야기를 통해 탁월한 반전의 메시지를 드러낸다. 
 

뮤지컬이 찾아야 할 돌파구가 여기에 있다. 베트남 전쟁의 기계적인 재현에서 벗어나려면 이들의 멜로가 더 세심하게 그려져야 한다. 감정의 흐름과 변화가 자연스러우면서도 분명하게 보일 때 그 사랑은 상징적 의미로 확장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하룻밤의 시간으로 채워지는 두 시간의 공연에서 이런 감정의 미묘함은 포착되지 않는다. 대극장이라는 공간 조건이나 배우들의 연기력 부족도 그렇고 연출의 미숙함(여주인공이 파티의 진실을 알아챌 때 하릴없이 무대를 서성이는 해병들을 보라!) 때문이기도 할 거다. 하지만 포착되지 않는 것이 또 하나 있으니, 지금 여기의 관객들에게 이 작품을 봐야 할 이유로 무엇을 제시하고 싶은지의 자기 질문이다. 이게 가장 중요하다. 이 작품의 유통기한은 이 질문에 달려 있다. 

 

*외부 필진의 리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8호 2018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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