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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소정화 [No.178]

글 |안세영 사진 |김호근 2018-08-01 8,103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소정화

그럼에도 다시

 

누군가를 ‘좋은 사람’이라고 느끼는 건 사실 대단한 순간이 아니다. 카페에서 여럿이 커피를 마신 뒤 자리에서 일어날 때 선뜻 먼저 쟁반을 집어드는 사람,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사이에도 헤어질 때 만나서 즐거웠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 사람. 일견 당연하게 여겨지는 이런 행위를 당연하게 해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같은 순간 누군가는 상대의 지위 고하를 가늠하고, 배려에 따르는 감정의 피로도를 따질지도 모른다. 아무리 사소한 행위일지라도 내가 아닌 상대의 마음을 챙기는 데에는 결단과 수고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소정화는 그걸 당연하게 해내는 사람이었다. <머더 발라드>의 내레이터로, <팬레터>의 히카루로 파괴적인 역할을 소화해 온 배우지만 무대 아래서 만난 그는 섬세하고 다정했다. 현재 그가 준비하고 있는 작품은 주인공부터 스토리까지 매일 관객의 참여로 결정되는 즉흥극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이하 오첨뮤)>. 이 불가능한 도전이 어떻게 가능한지 캐묻는 기자에게 소정화는 상대의 마음을 읽고 기다리고 믿는, 당연하지만 당연하지만은 않은 비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주고받는 눈빛 속에서

즉흥극이라는 형식이 관객에게는 흥미롭지만, 배우에게는 무서운 시험대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출연을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실은 초연을 보고 난 이런 거 절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김태형 연출님께 출연 제의를 받으니까 하고 싶더라고요. 워낙 신뢰하는 연출님이기도 하고, 타이밍도 잘 맞았어요. 공연이 끝나고 잠시 쉴 때 굉장한 허무감이나 우울감이 찾아오곤 하거든요. 무기력하게 있다 보면 활동적으로 막 움직이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딱 그때 전화를 받은 거죠. 연출님이 ‘해보자!’ 하는데 ‘해볼까?’ 이런 용기가 갑자기…. (웃음) 결과적으로 지금 되게 짜릿한 경험을 하고 있어요. 
 

대본과 음악이 정해져 있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연습하나요?

가사 없는 악보가 있어요. 그 악보 두께가 전화번호부 수준이에요. 주인공 노래로 일곱 가지 곡을 연습한 다음, 공연 때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그날 분위기에 맞춰 일곱 곡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여 부르는 식이죠. 그래서 연습해야 할 곡이 많아요. 처음 시창할 때는 가사가 없어서 랄랄라 하고 부르다가 나중에는 배우들이 직접 작사를 했어요. 일부 넘버는 공연 때 즉석에서 만들기도 할 거예요. 악보 없이 즉흥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하는 거죠. 지금도 연습 삼아 하루에 하나씩 즉흥곡을 만들어보고 있어요. 
 

재연을 앞두고 <오첨뮤>의 모티프가 된 영국의 즉흥 뮤지컬 <쇼스타퍼> 팀을 초빙해 워크숍을 가졌다고 들었어요. 그들에게서 무엇을 배웠나요?

크게 네 가지예요. 커넥팅(Connecting), 기다림, 믿음, 사과하지 않는 법. 커넥팅이라는 건 상대 배우와 눈을 맞추고 ‘내가 너에게 뭔가 줄 테니까 받아봐’ 하고 말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신호를 받아서 이어 나가는 거죠. 이때 서로 대사가 겹치면 안 되니까 충분히 기다려야 해요. 서로 믿음도 있어야 하고요. 무엇보다 우리는 실수하면 바로 죄송하다고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데 익숙하잖아요. 그런데 영국 배우들이 말하더라고요. ‘틀렸어? 그럼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돼. 사과하지 마.’ 덕분에 실수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졌어요. 즉흥극을 더 즐기게 됐어요. 저한테는 인생관이 흔들릴 만큼 귀한 경험이었죠. 
 

<오첨뮤>와는 다른 <쇼스타퍼> 팀만의 노하우가 있던가요? 

저희도 실은 엄청난 비법과 트릭이 있을 줄 알았거든요. 근데 방금 말씀드린 게 다예요. 그게 다였고, 우리 안에서 생긴 공감대와 커넥팅으로 공연이 만들어지더라고요. 연습하면서 그걸 체감하고 있어요. 아, 나라별로 성향이 다르다는 건 느꼈어요. <쇼스타퍼> 팀은 주로 가볍고 웃긴 내용의 공연을 만든다는데, 우리는 한이 있어서 그런지 꼭 교훈, 감동, 깨달음 같은 게 생성되더라고요. 영국 배우들이 오히려 놀라워했어요. 
 

즉흥극을 연습하면서 본인의 성향에 대해 알게 된 점도 있나요?

여기서는 감추고 꾸며낼 시간이 없다 보니 배우 각자가 지닌 본연의 성향이 드러나요. 저는 마이너 성향이 강한 편인데, 그게 고스란히 드러나더라고요.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으니까 제가 좋아하는 쪽으로 부르다 보면 자꾸 딥해져요. (웃음) 보기보다 통통 튀는 코미디에는 약해요. 
 

스스로 순발력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해요?

상황을 주도하기보다는 빈틈을 찾아내는 센스가 있는 편이에요. 눈치가 빠르다고 하죠. 워크숍 때 다 함께 자동차가 되어보라는 미션을 받았는데, 그때도 저는 다른 배우들이 나서서 대충 모양새를 갖추는 걸 지켜본 다음 빈 곳을 찾아 채웠어요. 제 평소 성향도 그래요. 말을 많이 하기보단 듣는 편이거든요. 처음에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던져지는 게 겁이 났지만 연습을 하면서 조금씩 용기가 생기고 있어요. 순발력도 근력이 돼서 붙더라고요.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여태까지 선 무대에서도 순발력을 발휘해야 했던 순간이 있나요?

많았죠. 한번은 <머더 발라드> 공연을 하다가 야구 배트가 부러진 거예요. 마지막에 그 야구 배트로 살인을 해야 공연이 끝나는데 말이에요. 어떡하나 고민하다가 한 뼘 남은 야구 배트로 내리찍는 연기를 했어요. 그게 평소보다 광기 어려 보였다고 하더라고요. <팬레터> 공연 때도 아찔한 순간이 있었어요. 도도하게 싸우는 장면인데 구두 굽이 부러져서 기우뚱거리는 거예요. 결국 굽을 뜯어서 던져버리고 똑바로 서서 굽이 있는 것처럼 공연했어요. 제겐 괴로운 경험이었는데 관객들은 외려 좋아하더라고요. ‘걸 크러시’라며. (웃음) 공연 중에 그런 아슬아슬한 순간이 생기면 관객도 함께 가슴을 졸이다가 배우가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하는 것 같아요. 기승전 <오첨뮤>가 바로 그런 뮤지컬이랍니다. 하하!




 

낭만을 잃지 않기 위해

배우 소정화 하면 <머더 발라드> 얘기를 빼놓을 수 없죠. 초연부터 네 시즌이나 빠짐없이 참여한 건 그만큼 작품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겠죠?

네, 정말 잘하고 싶었던 공연이에요. 초연 때는 원래 제가 캐스팅된 게 아니었어요. 공연 막바지에 내레이터 역 배우 하나가 몸이 안 좋아서 제가 대타로 나선 거죠. 일주일 동안 저 혼자 작품을 숙지해야 했는데, 원미솔 음악감독님을 비롯해 주변 배우들이 다 불가능하니 포기하라고 했어요. 그럴수록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3일 동안 잠을 안 자고 넘버 전곡을 외웠어요. 또 매일 공연을 보고 그림을 그리면서 동선을 외웠어요. 결국 프로덕션에서 시험 삼아 저를 무대에 올렸는데 감사하게도 관객 반응이 너무 좋았던 거예요. 그래서 공연 회차가 늘어났고, 그다음 시즌에도 계속 함께하게 됐어요. 그러니 작품에 대한 애착이 없을 수가 없죠. 심지어 저는 술을 안 마시는데 <머더 발라드>를 위해 사람이 취하면 어떻게 되나 연구하고 안 가던 클럽에도 가봤어요. (웃음) 
 

8월에는 <팬레터> 대만 공연을 앞두고 있어요. 한국 창작뮤지컬이 대만에서 공연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그 무대에 서게 된 소감이 어때요?

<팬레터>도 초연 때부터 함께 만들어온 작품이라 굉장히 애착이 커요. 더욱이 한국만의 색채가 묻어나는 작품이잖아요. 경성 시대가 배경이고 세트도 예스러운 이 작품이 한국 뮤지컬을 대표해 대만에서 공연한다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그만큼 저도 책임감을 느끼고요. 대만 관객은 자막과 함께 공연을 봐야 하니까 이해하기 쉽게 감정의 깊이를 더 극대화해 보여드리려고요. 
 

<머더 발라드>의 내레이터와 <팬레터>의 히카루는 모두 카리스마 있고 도발적인 캐릭터잖아요. 이런 이미지가 평소 본인 성격과 닮았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생김새나 목소리 때문에 세 보인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저도 ‘청순가련’한 인물보다는 ‘나쁜 언니’를 연기하는 게 더 편하고요. 하지만 실제 저는 무대에서와는 다른 면이 많아요. 집에서 요리하고 청소하는 미싱 돌리는 거 좋아하거든요. 글 쓰고 그림 그리는 것도 좋아하고요. 
 

SNS에 올린 그림들 봤어요. 수준급이던데요.

그림은 히카루 역 더블캐스트였던 (김)히어라의 권유로 그리기 시작했어요. 우울할 때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좋을까 물었더니 자기처럼 그림을 그려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연필과 스케치북을 사서 그리기 시작했어요. 저는 크로키 같은 과감한 그림보다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정교한 그림을 즐겨 그려요. 울고 있는 자화상도 자주 그리고요. 어딘가에 감정을 분출하고 싶을 때 그림을 그리면 잡념이 사라지고 위로가 돼요. 일기도 매일 쓰고 있어요. 일기 내용은 고민에 대한 게 많아요. 나 지금 제대로 가고 있나? 내가 되고 싶은 게 뭐지? 이런 질문들. 언젠가 에세이집을 내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어요. 히어라랑 같이 그림 전시 겸 콘서트를 열면 좋겠다는 얘기도 나누곤 해요. 
 

우울감이나 고민에 대한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배우로서 슬럼프를 겪은 시기가 있나요?

사실 배우를 계속해도 되나 고민했어요. 여성 배우가 설 자리가 너무 적고, 그나마 있는 역할도 대부분 도구적으로 소비되니까요. 운 좋게 <팬레터>의 히카루라는 주체적인 여성을 연기하게 됐지만 그 작품에서도 여성은 한 명이고 나머지는 다 남성이거든요. 여성 배우는 중견부터 신인까지 두텁게 생성되어 있는데 여성 배역은 드무니까 경쟁이 치열해요. 요새는 오디션도 드물어서 늘 무대에 서는 배우만 계속 서는 추세예요. 특히 저는 저만의 색깔이 분명하기 때문에 더 한계에 부딪혔어요. 제가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를 연기할 순 없잖아요? 제 안에 ‘엠마’가 있다 한들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이 일을 계속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행복하려고 하는 일인데 난 지금 행복한가, 그런 고민이 밀려왔어요. 감사한 건 관객분들 사이에서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를 원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거예요. 제작자들이 좀 더 용기를 내서 여성 배우에게 기회를 주고 관객에게도 다양한 선택지를 열어주면 좋겠어요. 


 

이런 뮤지컬이 만들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 게 있어요?

제가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를 재밌게 봤거든요. 여성들끼리 속닥거리면서 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를 공연으로 올려도 재밌지 않을까요?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이 출연해서 서로 부딪히거나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줘도 재밌을 것 같아요. 또 한 가지 바람은 우리나라만의 특색이 있는 뮤지컬이 늘어나면 좋겠다는 거예요. 드레스 입고 서양인 이야기를 하는 뮤지컬은 많은데, 위안부 이야기, 유관순 이야기는 왜 안 해주지? 저는 후자가 더 궁금한데 말이에요. 꼭 대단한 위인이나 왕족 이야기가 아니라 한 시대를 살다 간 사람들의 일상이 담긴 이야기도 좋아요. 향수가 묻어나는 공연도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요새 대학로 공연이 갈수록 비슷비슷해져서 회의감이 들곤 해요. 우리 배우를 포함한 모든 예술가들이 메시지를 전한다는 사명감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상업성도 물론 중요하죠. 근데 예술이라는 건 예로부터 세상을 풍자하고 이야기하는 창구였잖아요. 그 본질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존 뮤지컬이나 영화 가운데 좋아하는 작품을 꼽는다면요? 

뮤지컬 중에서는 <맨 오브 라만차>를 좋아해요. 누구에게나 통하는 멋진 메시지를 지닌 작품이잖아요. 볼 때마다 폭풍 오열을 해요. 영화는 홍콩 영화 좋아해요. 그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 총알이 절대 떨어지지 않는 총! 너무 멋있지 않아요? (웃음) 저는 낭만을 잃어버리는 게 싫어요. 언제부턴가 낭만이 ‘오글거림’으로 매도되는 게 싫어요. 그래서 좀 오그라들더라도 뻔뻔하게 낭만적인 척 살려고 노력해요. 
 

여러모로 회의감을 느끼는 순간이 있음에도 배우를 계속하고 있는 건 왜인가요?

우선 저만이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전에는 제가 아니어도 너무 많은 배우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개성이 강한 목소리조차 콤플렉스였어요. 목소리 색깔이 너무 분명해서 다양한 역할을 맡을 수 없는 게 괴로웠죠. 하지만 이제는 생각을 바꿔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목소리를 가진 데 감사하려고 해요. 마이너 감성도 저만의 무기로 생각하고 있고요. 무엇보다 절 회의감에서 빠져나오게 해준 건 관객들의 노크 소리예요. 공연을 쉬고 있으면 SNS로 메시지가 날아오거든요. ‘왜 무대에 안 나와요? 보고 싶어요. 언제나 기다리고 있어요.’ 그 메시지를 보며 어딘가에 날 필요로 해주는 사람이 있으니 나태해져선 안 되겠다 다짐했어요. 공연을 통해 위로받았다고 얘기해 주시는 분들을 볼 때 배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연이라는 건 각개 전투가 아니잖아요. 배우와 스태프와 관객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그 시간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게 참 소중하고 감사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8호 2018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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