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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바넘: 위대한 쇼맨>, 위대해지기도 어렵고, ‘쇼맨’이 되기도 어렵고 [No.180]

글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사진제공 |스토리피 2018-09-10 6,029

<바넘: 위대한 쇼맨>, 위대해지기도 어렵고, ‘쇼맨’이 되기도 어렵고 

 

 

기획의 리스크

신작의 라인업이 뜰 때 시선을 끄는 경우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작품 때문이고 또 하나는 기획 때문이다. 작품이 눈길을 끌 때는 주로 국내 초연되는 화제작이거나 예상을 뛰어넘는 캐스팅에 기대감이 생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기획이 눈에 띌 때는 경우의 수가 여러 가지다. 과감하거나 독특하거나 의아하거나. 작품을 선택하는 안목의 탁월함을 보게 될 때도 있는 반면 왜 굳이 이 작품을 만들려는 건지 갸웃하게 되는 때도 적지 않다. 안타까운 것은 규모가 작은 작품들이 주로 전자에 속하고, 후자에 속하는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이 규모가 큰 대형 뮤지컬이라는 사실이다. 지금까지의 흐름에 미루어 보자면 이런 대형 뮤지컬이 성공하는 예는 드물었고, 어찌어찌 현상은 유지한다손 치더라도 건강한 수익 구조로 이어지지는 못했더랬다. 대형 뮤지컬의 라인업이 갈수록 줄어드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는 셈이다.
 

킹앤아이컴퍼니의 라인업이 눈에 띄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올해에만 대형 뮤지컬을 그것도 신작으로만 3편을 연달아 올리는 라인업은 근래 보기 드문 스케일이요 과감한 기획력이다. 그런데 작품의 면면을 보면 그 과감함은 곧 의아함으로 바뀌고 만다. 얼마 전 막을 내린 첫 작품 <도그파이트>가 남긴 결과이기도 한데, 베트남전쟁을 배경 삼은 이 작품의 서사는 지금 여기 관객의 관심사와 전혀 상관이 없고 여성비하에 가까운 내용으로 1막 전체를 채운 이 작품의 연출은 지금 여기 관객의 감수성에 전혀 관심이 없다. 기획의 관점에서라면 이 작품이 지금 관객에게 ‘어떻게 먹힐 수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일 텐데, 첫 번째 작품에서 확인한 바는 ‘왜 이 작품을 지금 여기서 하지?’라는 의아함밖에 없는 거다.
 

두 번째 작품인 <바넘: 위대한 쇼맨>(이하 <바넘>) 역시 무난한 기획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작품의 맥락이 보편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일단 실존 인물인 주인공 바넘의 삶 자체가 논란의 경계에 놓여 있는 것은 적잖은 부담이다. 마케팅의 기준에서 보면 뛰어난 지략가이자 사업가이고 사회적으로도 기업인이자 정치인으로 성공을 거둔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기준을 도덕적인 지표에 두자면 이 사람은 논란거리 그 자체이다. 이렇게 돈을 벌어도 되나? 이렇게 속여도 되나? 이렇게 사람을 이용해도 되나? 이런 건 범죄 아닌가? 바넘의 이름이 제목인 만큼 그의 삶을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리라 예상되는 이 작품에 관객들이 호의적이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기대감보다 의아함이 앞설 때 그 기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작품으로써 그 의심에 시원하게 답을 내놓아야 한다. 뮤지컬에서 내내 반복되는 바넘의 대사(‘최고의 쇼에는 반드시 리스크가 따르는 법!’)를 그대로 뒤집으면 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리스크를 극복하려면 최고의 쇼 뮤지컬이 되어야 한다! 바넘이 종사했던 분야가 쇼 비즈니스였던 만큼 이 작품이 그 쇼맨십을 얼마나 구현할 것인지의 여부는 이 작품의 성공을 좌지우지할 핵심적인 요소이다. 상대방을 이해시키려면 먼저 신뢰를 쌓아야 하는 법. 소재는 이해할 수 없어도 만듦새를 신뢰할 수 있는 작품에 관객은, 지지하든 지지하지 않든 간에, 반응하게 되어 있다. 바넘을 욕하다가도 쇼가 시작되면 어느새 박수를 쳤던 그때의 관객들처럼, 극장을 찾은 뮤지컬 관객을 쇼의 볼거리로 충분히 만족시킬 때 관객은 이 작품에 대해 생각할 거다. 이런 인물의 삶을 해석하는 뮤지컬의 관점은 어떤 것인지, 그것이 지금의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올 수 있는지,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쇼 뮤지컬이 반드시 윤리적이어야 하는지의 문제까지. 기획의 리스크란 예상되는 실패와 역설적인 성공에 모두 열려 있는 가능성의 문이다. 



 

공연의 리스크

그런데 현실은 예외를 잘 허락하지 않는다. 예상과 역설 사이에서 더 쉽게 열리는 문은 거의 정해져 있고, 이 작품도 그 문을 피해 가진 못한다. 그렇게 된 데는 여러 이유가 있어 보이지만 결국 모든 문제의 시작은 바로 ‘쇼’가 아닐까 싶다. 쇼가 부실해서가 아니라 쇼가 없기 때문이다. 공연 내내 ‘지상 최고의 쇼’가 여기 있다고 하는데, 대사로만 설명될 뿐 독립된 장면으로 맘먹고 만든 서커스 쇼는 이 작품에 없다. 간혹 링 쇼나 불 쇼 등 서커스의 맛뵈기 메뉴(?)가 등장하긴 하지만 이것은 장면의 배경에 그칠 뿐이다. 이 작품이 주목하는 진짜 쇼는, 관객의 기대와는 다르게도, ‘바넘이 만든 쇼’가 아니라 ‘바넘이라는 쇼’이다.
 

이 작품의 관심은 바넘의 쇼가 아니라 바넘의 삶에 있다. 문제는 관점이다. 그의 삶이 논란거리임을 생각하자면 다루기가 쉽지 않은 이야기여야 마땅할 터. 하지만 이 작품이 선택하는 서사의 틀은 흔한 위인전의 전형과 다르지 않다. 누가 봐도 문제가 많은 사람이지만 알고 보면 그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이런 식이다. 물론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그를 옹호하진 않는다. 바넘이 속임수에 능한 사기꾼 캐릭터라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바넘에 대해 뭔가 다른 이야기를 할 것처럼 자세를 잡는 시작 부분만 보면 앞으로의 전개에 기대감이 생기니 말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그의 사기꾼 기질이 발휘된 다음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누군지를 보시라. 착하고 지혜로운 바넘의 아내이다. 아내를 대하는 바넘의 태도를 보면 이토록 따뜻하고 배려심 넘치는 남자가 없다. 이게 바넘의 진짜 얼굴이라는 거다. 정말 바넘이라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할 게 없나? 그의 야비한 성공은 질문의 서사(이런 성공이 정당한가?)를 만들어내는 데 어울리는 재료이건만 그의 야비함마저도 인간적으로 끌어안는 서사적 접근은 결국 그의 ‘문제적’ 삶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갖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더 답답한 것은 음악이다. 쇼 뮤지컬을 표방한 작품의 음악이라고 보기에는 여러 면에서 적절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건의 속도와 음악의 리듬은 자주 어긋나고 인물들끼리의 갈등이 고조되는 순간에도 음악의 정서는 극적 긴장은 아랑곳없이 홀로 편안함을 잃지 않는 식이다. 음악이 나오는 순간 이야기가 쫀쫀해지기는커녕 오히려 집중이 흐트러지는 때가 많은 건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런 기능적인 면모는 둘째 치더라도, 음악 자체가 매력적이지 못하다는 사실은 치명적이다. 2막 시작을 알리는 제니의 뮤지컬 넘버만 봐도 그렇다. 작품의 주제를 집약하면서 바넘의 삶이 이제 전환을 맞이할 것을 암시하는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가사의 적절함은 뒤로하고 선율 자체로도 관객의 감정을 끌어내기에는 힘에 부치는 모양새다. 배우들의 노래나 가사가 잘 들리지 않은 것은 분명 음역대가 맞지 않는 음악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윤형렬이나 김준현 같은 경력 많은 배우들까지도 그 부분을 이리도 쉽게 지나친다는 사실 역시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배우들끼리의 대사를 주고받는 호흡이나 화음을 맞추는 조화에서 묘한 엇박자가 생겨나는 것은 공연 초반이니까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배우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배우는 톰썸 역할을 맡은 김유남이다. 왜소증의 장애를 가진 그는 연극과 무용을 넘나들며 활발하게 활동하는 배우이다. 그런 그가 대중 장르인 뮤지컬에 ‘일반 배우’로 섰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장애를 가진 배우가, 장애에 접근하는 어떠한 사회적 의미 장치도 없이, 대극장 뮤지컬에 출연한 예는 아마 처음일 것이다. 이것은 생각해야 할 질문으로 이어진다. 이런 조건의 배우가 장애라는 특수성보다 배우라는 보편성을 갖는 것에 ‘장애’가 되는 장벽은 무엇일까. 그의 뮤지컬 출연은 바넘이 쏟아놓은 궤변을 지금 우리 사회를 향한 질문으로 바꿀 수 있는 묵직한 기회인 셈이다. 그 기회를 그다지 잘 살린 것 같진 않지만.
 

정작 작품보다 흥미로운 것은 킹앤아이컴퍼니와 바넘이 꽤나 닮아 보인다는 점이다. 공격적일 만큼 적극적인 제작에 대한 열정이나, 모두가 무리수라고 걱정하는 기획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저돌적인 면모나, 자기의 쇼를 만들기 위해 이름 있는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수완이나, 여러 면에서 둘은 겹쳐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하나는 ‘위대한 쇼맨’의 이름을 얻었고 하나는 아직 ‘위대해지고 싶은 쇼맨’이라는 것 정도? 하지만 그 차이를 메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일단 <도그파이트>와 <바넘>으로는, 기획의 의도가 잘됐든 잘못됐든 간에, 그 의도를 증명하지도 넘어서지도 못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기획과 작품을 완숙시킬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닐까. 또 다른 신작을 올리기 전에 고민해 볼 일이다. 자칫하면 바넘의 명예가 아닌 불명예를 닮게 될 수도 있으니까. 

 

*외부 필진의 리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0호 2018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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