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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전설, 니진스키 [No.189]

글 |김영주 공연 칼럼니스트 2019-06-28 4,831

전설, 니진스키  

 

대중은 천재를 통해 인간의 몸에 깃든 천상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도저히 사람이 했다고는 믿기지 않는 경이로운 기적이 눈앞에서 펼쳐질 때, 우리는 저 지극히 높은 곳에서 이 땅 위에 내려진 축복을 더없는 환희로 만끽하며 신의 존재를 실감한다. 하지만 한낱 미약한 인간의 육체와 정신으로 신에게서 비롯한 천재성을 요령 좋게 컨트롤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불우한 천재의 신화는 대체로 정해진 결말을 향해 흘러간다. 그리고 지난 5월 무대에 오른 <니진스키>의 주인공 니진스키 역시 이 비극을 피해가지 못했다.


 

기묘한 천진성을 지닌 천재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처절하게 실패한 천재의 대명사로 불리는 바츨라프 니진스키. 양친 모두 뛰어난 댄서였으나 세 살 위의 형이 어린 나이에 추락 사고를 당하면서 정신질환을 앓게 되고, 설상가상 아버지가 발레단의 동료와 불륜 관계를 맺으면서 가족은 비참한 가난 속에 내던져진다.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유일한 빛은 어린 니진스키의 재능이었다. 1898년, 9세의 나이로 러시아 황실 발레 학교에 입학했고 불과 3년 후에는 러시아 전역에 신동으로 이름을 알렸다. 예민한 성격의 외톨이였던 소년은 졸업과 동시에 마린스키 발레단에 솔리스트로 입단을 하게 되는데 당시만 해도 발레리노란 프리마 발레리나를 들어주거나 그들이 잠시 쉬는 시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 짧은 독무를 추는 보조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천재성이란 시대와 장르의 한계를 뒤집어엎는 파괴와 창조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바츨라프 니진스키의 춤은 만인을 사로잡았다. 

마치 새의 비상 같았다는 그 유명한 니진스키의 도약은 무대 위에서 자신이 움직여 표현하고자 하는 바가 이뤄지고 있다는 확신에 일말의 의심도 두지 않는 기묘한 천진성과 닿아 있었다. 자신의 관념을 춤으로 형상화해서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이 그에게는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장엄한 마린스키 극장의 말석에 겨우 앉은 쁘띠 부르주아부터 차르의 최측근인 황족 류보프 왕자까지 모두가 니진스키의 찬미자였다. 

당시 35세였던 파벨 류보프는 니진스키에게 매료되어 그를 최상류층 사회에 소개하고 골치 아픈 온갖 가족 문제까지 떠맡아 해결해 준다. 니진스키에게 부재한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면서 자신감을 심어주고 세련된 매너까지 습득하게 해주었으니, 좋게 말하자면 러시아판 <마이 페어 레이디>였으나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스폰서였다. 니진스키 역시 귀족적인 풍모와 고상한 인품의 류보프 왕자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 관계는 니진스키 신화가 본격적으로 막이 오르기 전의 서곡으로 1년여 만에 종결된다. 니진스키의 잠재력이 극대화되기를 바랐던 류보프 왕자가 새로운 형식의 발레단 ‘발레 뤼스’를 준비하고 있던 걸출한 기획자 디아길레프에게로 그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두 천재의 만남이 낳은 비극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디아길레프는 발레 버전 신약성서의 첫 장을 연 거물로서 현대 발레의 모든 것이 그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르주아 남성들을 위한 호사스러운 눈요기 정도로 폄하당하던 발레를 당대 예술의 최첨단을 보여주는 음악(스트라빈스키, 사티), 미술(피카소, 마티스), 춤(니진스키, 발란신, 파블로바, 카르사비나)이 함께하는 종합예술로 끌어올린 것 역시 그의 공로이다. 

하지만 그의 사생활은 공적 업무와 분리되지 않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디아길레프는 이제 막 소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어 가는 과도기의 아름다운 청년에게만 매료되었다. 그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놀라운 기획력으로 아직 미성숙한 연인의 재능을 활짝 꽃피우고 나면 진정한 의미에서 어른이 된 청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를 떠나버렸다.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 뤼스와 함께 러시아를 넘어 전 유럽을 사로잡은 니진스키도 그랬다.

원만하고 온화했던 류보프 왕자와의 관계와 달리 오만하고 독선적인 면이 있는 디아길레프와 니진스키의 5년은 격렬한 애증으로 가득했다. 대인 관계에 서툴고 일상생활에 무지했지만 니진스키의 내면에는 세계에 대한 통찰력, 그리고 자신이 직관으로 이해한 바를 춤을 통해 인류에게 돌려주고 싶어 하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디아길레프가 그리는 큰 그림의 일부, 도구로서 존재하기에는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이 이미 확고했던 것이다. 


 

불안한 관계는 니진스키의 혁신적인 안무작 <봄의 제전>이 분노한 관객들의 야유 속에서 막을 내리면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원시적인 에너지가 가득한 이 새로운 작품은 당시의 관객들이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을 한없이 뛰어넘은 것이었다. 위대한 발레 뤼스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현실적인 선택을 하려는 디아길레프에게 환멸을 느낀 니진스키는 충동적인 결정을 한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어떻게 보아도 ‘사생팬’인 헝가리 백작가의 로몰라 드 풀츠키에게 청혼을 한 것이다. 기본적인 의사소통도 어려운 상태에서 성사된 이 급작스런 결혼 소식을 들은 디아길레프는 곧바로 발레단에서 니진스키를 해고한다. 오직 무대에서만 살아왔던 천재 무용가는 그 후 3년간 낯선 현실 세계에서 오로지 실패만 맛보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러시아 국적이 문제가 되어 헝가리에서 전쟁 포로가 되기에 이른다. 그 전까지 옛 연인을 괴롭혀왔던 디아길레프가 백방으로 노력하여 그를 구해낸 다음 발레 뤼스의 북미 투어에 참여시키지만 전쟁의 참화 속에서 니진스키의 광기는 이미 시작된 이후였다.  

10년은 자라고, 10년은 배우고, 10년은 춤추고 그리고 나머지 30년은 암흑의 광기 속에 묻힌 니진스키의 한생. 그를 전설로 만든 영광스런 10년의 마지막 순간, 긴 암흑이 시작되기 직전의 마지막 춤에 대해서는 분명한 기록이 남아 있다. 세계대전으로부터 한 발 떨어져있던 스위스의 생 모리츠, 쉬브레타 하우스라는 호텔의 홀에서 니진스키는 상류층과 지식인 관객 200여 명을 앞에 두고 무대에 선다. 예술가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고통받고 어떻게 창조하는지 보여주겠다고 말한 니진스키는 의자에 앉아 30분간 부동자세로 관객들을 마주보았다. 그 누구도 미동조차 없는 대치 상태 끝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나는 전쟁을 춤추겠습니다. 전쟁의 고통과 파괴를. 여러분이 저지하지 않았던 전쟁, 그래서 여러분에게도 책임이 있는 전쟁을.” 니진스키의 무시무시한 춤은 흡사 시체들 위를 떠다니는 것 같았고, 관객들은 공포에 압도당하면서도 동시에 매혹된 상태로 화석처럼 굳어버렸다고 한다. 니진스키 자신에 의해 ‘신과의 결혼’이라고 명명된 이날의 공연을 끝으로 다시는 누구도 바츨라프 니진스키가 춤추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용가로 불리지만 그의 춤은 미술이나 문학, 음악처럼 뚜렷한 형태를 가지고 영원불멸을 향해 가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다. 우리는 니진스키의 춤을 오직 몇 장의 사진과 당대의 찬사, 그리고 남겨진 무보로만 짐작할 뿐이다. 하지만 영원히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채로 그의 삶과 예술은 끝없이 다시 태어난다. 존 노이마이어의 드라마 발레로, 루돌프 누레예프 주연의 영화로, 예브게니 플루셴코의 ‘니진스키 헌정’으로, 또 한국의 뮤지컬로. 전설이란, 그런 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9호 2019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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