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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뮤지컬 캐릭터에게 보내는 편지, <헤드윅> 이츠학, 내가 아는 이삭 중 최고 [No.192]

글 |이수진 공연 칼럼니스트 2019-09-29 5,117

뮤지컬 캐릭터에게 보내는 편지

 

예로부터 일 년 사계절 중 유일하게 ‘독서’와 함께 설명되는 가을이 왔습니다. 맹렬하게 내리쬐던 햇볕이 조금씩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는 시기, 가을은 독서만큼이나 글쓰기가 어울리는 계절 아닐까요. 그래서 이제 곧 머지않아 다시 만나게 될 당신께 편지를 띄웁니다. 나는 당신과 이 책을, 이 영화를, 이 드라마를, 함께 나누고 싶노라고.


 

이츠학, 내가 아는 이삭 중 최고

 

누구든 살다보면 번개라도 맞은 듯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이를테면 나에게는 이츠학, 너를 처음 만난 날이 그랬다. 유령이 주인인 듯 낡고 빛바랜 ‘제인 스트릿 극장’의 어두운 무대 위에서, 그날, 너는 나에게 번개를 내리친 제우스였다. 네가 내리꽂은 번개가 내 두개골을 두 쪽으로 가르자 눈에서 전류가 번쩍 튀었고 설익었던 뇌가 조금 익었다. 그건 스티븐 손드하임의 <조지와 함께한 일요일 공원에서>가 내게 주었던, 굳이 외울 필요없지만 기억 속 어딘가에 숨어 있던 점묘법이라는 회화 양식을 가사로 ‘점, 점, 점…’  하고 머리에 콕콕 지식으로 찍어 주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순간이었다. 이츠학, 네가 헤드윅의 가발을 쓰고 빛나는 드레스를 입고 온몸에서 햇살을 뿜어내듯 환하게 웃으며 무대 위로 질주해 올 때, 다가올 21세기는 정말로 이전과는 다를 것만 같았다. 세상은 그대로였고 변한 건 아무것도 없는 듯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때 네 번개가 헝클어뜨린 내 뇌가 타래를 이루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덕분에 내 세상도 조금 변했다.  

이츠학, 어리석게도 나는 공연 내내 무대 위를 헤집으며 ‘여성’을 찾았음을 고백해야겠다. “니가 좋아하든 말든, 해드윅을 소개한다!” 그게 너의 첫 대사였다. 무대 위에는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나의 귀에는 계속 하이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에 몹시 혼란스러웠다. 극장 맨 뒤 네 번째 줄에 앉아서 머리에 두건을 쓰고 턱에는 검은 수염이 성성한 너를 도저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 소리는 너의 마이크와 너의 노래하는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나의 머릿속 편견이라는 필터가 끊임없이 여성의 외양을 찾았다. 굴곡진 몸과 붉은 입술을 찾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검은 바이커스 자켓을 입고 달려 나갔던 네가 다시 등장할 때에서야 비로소 내 머릿속 ‘여성’의 모습이었고 모든 관객이 손을 머리 위로 치켜 올리고 흐느끼고 웃으며 노래 부를 때에도 나는 어떻게든 머릿속을 정리하고 싶었지만 미처 정리가 되지 않은 채로 극장 문을 나섰다. 이츠학 네가 누구인지, 너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인지,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를 연기하는 여자인지. 그리고 이내 깨달았다. 내 혼란의 이유는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구분하고 그 안에서 고작해야 게이인지 레즈비언인지 정도나 구분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뭐가 됐든 인간의 형상을 한 인간을 여성이든 남성이든 어느 한 범주에 넣기 위해 내 머리는 기를 쓰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츠학 네가 알려주었다. 

크로아티아에서 인종 청소를 피해 미국으로 향했던 유대인 이츠학, 너는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에서 자랐을지도 모르겠다. 드래그퀸이 되기 위해 네가 한 가장 첫 번째 행동은 부모님의 집을 나오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님의 집을 등지면서 너는 그곳에 성경도 두고 왔겠지. 그런데, 이츠학, 나는 너와 그 성경을 찬찬히 읽고 싶다. 기독교나 천주교의 성경도 좋고 유대교의 것이어도 좋다. 그리고 마지막에 창세기를 읽고 싶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의해 제물로 바쳐질 뻔했다가 제2의 삶을 시작하는 성경 속 이삭처럼 이츠학 너도 새로운 인생이 행복하기를 바란다. 너는 뮤지컬 <헤드윅> 속에서 단 한 번도 웃지 않다가 마지막 순간에서야 웃는다. 너의 웃는 모습은 ‘그가 웃는다’는 너의 이름의 뜻을 떠오르게 했다. 나는 네가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웃는 사람이 아니기를 바란다. 나는 네가 마지막은 물론, 오늘도 내일도 먼 미래에도 매일매일 웃을 수 있기를, 웃을 일이 있기를 바란다. 믿어야 한다는 강압이 없다는 걸 전제하면, 성경은 아스트랄하고 무섭고 그래서 더 흥미진진한 동화라고나 할까. 그 속에서 이츠학, 너는 웃음을 뜻하는 유일한 이름이기에, 너와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성경을 읽고 싶다. 섹스가 아니라 젠더를 가르쳐준 이츠학, 감사합니다. 무대 위의 모든 이츠학이 웃기를.

 

“이삭이 태어날 때에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창세기 21장 5~6)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2호 2019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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