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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FACE] <미스 사이공> 구민진 [No.99]

글 |배경희 사진 |심주호 2011-12-19 6,068


구민진의 칠전팔기 

 

“제가 데뷔를 할리우드에서 했잖아요.” 이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란 말인가. 뜻밖의 이야기에 적잖이 당황한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민진은 카페 전체를 울릴 정도로 시원하게 웃었다. 최근 들어본 중 가장 화끈한 웃음소리다. 사연인즉, 생애 첫 오디션이 <명성황후> 미국 투어 공연 오디션이었던 까닭에 LA 코닥극장에서 배우 신고식을 치렀다고 하니 따져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윤호진 대표님께 항상 그래요. 저를 할리우드에서 데뷔시켜주셔서 늘 감사드립니다!” 

 

<명성황후> 오디션을 보기 전, 그녀는 부산에서 무용을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13년 동안 무용을 해왔던 외골수(?) 무용과 학생.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춤만 추기엔 노래에 대한 열정이 지나치게 뜨거웠다는 것이다. “저 매일 노래방에서 살았어요, 기본 여섯 시간씩!” 그리고 2003년 어느 날,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바꿔 놓는 운명의 날을 맞게 된다. 부산에 지방 공연을 온 <명성황후>를 보게 된 것. “정말이지 공연을 보기까지 너무 망설였어요. 난 무용이라는 내 길이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뮤지컬을 보면 이성을 확 잃을 것 같은 거죠. 봐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공연 날까지 고민하다가 보러 가서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 집에 가는 길에 거리에 있는 휴지를 다 주우면서 갔잖아요. 애국심에 불타서. 하하하.” 기막힌 타이밍으로 <명성황후> 오디션 공고가 났고, 한번 봐보기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응시한 오디션에 덜컥 붙어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왔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될 일은 결국 그렇게 된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한 손에 마이크와 호루라기를 들고 고교생들에게 매스게임을 훈련시키던 부산아시안게임의 조안무가가 일 년 후 매일 무대 위에서 눈물을 쏟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모든 것들을 등지고 혈혈단신으로 서울에 올라올 때는 열정이 아니었으면…, 열정도 아니에요. 그냥 이게 내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시작은 순조로웠다. 댄서에서 싱어로의 변화를 감행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 <둘리>의 여주인공 격인 또치를 맡게 됐으니 말이다(당시에 <둘리>는 메이저 기획사의 야심작이었다). <둘리> 캐스팅 이야기를 하다 그녀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들려준다. “<명성황후> 앙상블 내 배역 오디션에서 떨어져 울고 있을 때, 김문정 음악감독님이 이런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어요. 넌 뮤지컬을 시작한 지 일주일 됐지만 쟤들은 몇 년씩 한 애들이야. 내가 너에게 어떤 역할을 시키게 됐을 때 네가 잘해줬으면 좋겠어. 유명한 뮤지컬 배우 최정원 씨도 커버에서 배역으로 올라가 주인공이 됐어. 너도 항상 준비되어 있는 배우였으면 좋겠다. 대한민국 최고의 음악감독님이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동이었죠.” 그녀가 모든 배역의 노래와 춤, 동선을 모조리 다 외우는 건 그때 생긴 버릇이다. 그러니 악보를 보면서 노래를 부르는 배우들 사이에서 이미 모든 걸 외우고 있는 그녀가 프로듀서의 눈에 띄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둘리> 대본에 이런 말이 있었어요. ‘삐쩍 마른 또치를 보셨나요?’ 그런데 제가 통통했거든요 결국 대사가 이렇게 바뀌었잖아요. ‘똥배 톡 튀어나온 또치를 보셨나요?’” 재미난 일화에 다 같이 한바탕 웃고 난 다음 문득 그녀의 배우 인생이 순탄하기만 했던 것인지 궁금해진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역경담은 없을까? “오디션을 보러 가면 넌 전공이 뭐냐고 물어요, 제가 한국 무용이라고 답하잖아요. 그럼 노래도 안 들어봐요.  그땐 정말 죽고 싶었다니까요.” 뮤지컬 배우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때도 있다. “무용과 출신으로 노래도 좀 부른다는 입소문이 난 뒤에는 소극장 공연에서 주인공을 맡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역할에 한계가 있다 보니 경제적으로도 힘들고, 냉정하게 그만 해야겠다는 생각에 한 달 동안 노래를 안 불렀어요. 그러니까 산송장 같았어요.” 그리고 그때 배우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여섯 번 내리 오디션에서 떨어진 적이 있어요. 그래서 평소에 다니지도 않던 성당에 갔죠.” 잘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려고요? 지극히 일반적인 질문을 하려는 찰나 그녀가 말한다. “하느님, 저 그만두라고 이러시나본데 저 그만 못 둬요. 그렇게 아세요.”


어떤 이야기를 하든 헤실헤실 웃어넘기는, 도무지 독한 구석이라곤 없어 보이는 그녀지만,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노력파인지를 알고 나면, 뒤로 발라당 넘어질지도 모른다. 그건 <미스 사이공>의 전설이 된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초연에서는 지지 커버, 다음 시즌에서는 지지이면서 엘렌 커버를 했어요. 이번에는 인종이 바뀌었잖아요. 백인 엘렌으로. 으하하.” 해외 스태프들은 그녀를 두고 지난 3년 동안 도대체 뭘 했기에 이렇게 실력이 늘었냐고 물었다는데, 그건 누구라도 그렇게 말했을 거다. “제 첫 작품이 성악곡이 있는 <명성황후>였잖아요. 너희는 다 성악과를 나왔냐고 조사를 해봤더니 거의 그렇대요. 성악과에 가려면 보통 5~10년 정도 노래를 배운다는 거죠. 그때 제 자신과 한 약속이 있어요. 나도 이 친구들처럼 입시 준비하듯 10년을 노래하면 동등해질 수 있겠다. 그때부터 레슨을 쉬어본 적이 없어요. 3일 내내 라면만 먹으면서도 그 와중에 레슨을 받았다고요. ‘외상입니다!’ 이러면서. 하하.” 그렇게 자신과의 약속을 다짐한 지 9년째 되는 해, 엘렌을 맡아 싱어로 인정받음으로써 약속을 지킨 셈이다.


“인터뷰를 하니까 지난 시간들을 떠올려 보게 돼서 좋네요.” 그녀는 희비가 교차하는 옛 기억에 조금 뭉클해진 듯 중얼거렸다. “배역을 맡게 됐다, 이런 문제를 떠나서 시간이 흐를수록 성장해서 함께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게 기뻐요.” 앙상블에서 메인 배우까지 차근차근 성장해온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데 오래 전 온 국민을 감동하게 만들었던 한 조연 배우의 수상 소감이 퍼뜩 떠올랐다. 자신처럼 오랜 시간 조연 생활을 하면서 한 단계씩 올라가는 기회를 기다리는 많은 연기자들에게 희망이 됐으면 좋겠다는 그 소감 말이다. 그녀도 언젠간 후배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지 않을까? “저도, 내가 꼭 어떤 배역을 맡아야지, 이렇게 생각했다면 아마 스트레스로 중간에 그만뒀을 거예요. 이건 내 천직이라고 받아들이고 나니까 마음이 편해졌어요. 욕심을 내려놓고 내가 할 일을 하면 좋게 작용을 하는 것 같아요.” 그러고 나서 그녀가 덧붙인다. “이거 아니면 안 되는 사람은 어떻게든 남아있어요. 그러다 기회가 오는 거고. 배우는 죽기 전에 꼭 한번은 제 역할을 맡게 된다는데 젊었을 때 반짝하고 마는 것보다 나이 먹어서 기회가 오는 게 좋지 않나요? 오십 줄에는 내 세상이 올 거예요. 으하하!”  ‘바야흐로 지금은 구민진 시대!’라고 말하게 될 날이 도래할지, 글쎄, 그걸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 인터뷰 내내 신나게 웃고 떠드는 이 여자를 통해 그 말의 의미를 체득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9호 2011년 12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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