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김종구
이날이 오기까지
“제가 만약 연습실에 대본을 안 외워 간다고 해도 어느 누구 한 사람 저한테 뭐라 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 어느 곳보다 연습실에서 떳떳하고 싶어요. 준비가 안 된 상태로 연습에 참여하는 제 자신을 용서할 수 없죠.” 데뷔 16년 차에 접어든 김종구의 설명에 따르면, 대본을 숙지하고 연습에 임하는 것은 전쟁터에 나가기 전 작전을 세우는 것 같은 일이라고 했다. 아무런 사전 준비 없이 연습실에 서 있으면 결코 다른 배우들과 시너지를 낼 수 없다면서. 오는 5월 개막하는 <로빈>에서 모처럼 ‘아빠’라는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는 그가 지금 세우고 있는 작전은 무엇일까.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
신작 <로빈> 대본을 받았을 때 어떤 점에서 마음이 끌렸나요. 최근 뮤지컬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작품이라 좋았어요. 일단, 40~50대 아빠가 주인공인 작품은 드물잖아요. 그리고 좌절, 절망, 복수 같은 센 감정을 다루는 작품들이 많은데, <로빈>은 감정의 결이 좀 달라요. ‘센’ 감정이 아니라 ‘찐’ 감정이죠. (웃음) 아빠와 딸의 이야기를 통해 조건 없는 사랑의 의미에 대해 되짚어 보는 작품이거든요. 단, 너무 무겁지 않게요.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는 신선해서 좋았는데, 막상 연습에 들어가니 감정 컨트롤이 잘 안돼서 힘들어요. 마음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 그게 너무 무섭다고 해야 하나. 연습하다 결정적인 장면이 오면 그 상황에 완벽하게 들어가지 않으려고 저도 모르게 도망치게 돼요.
가족 이야기라는 점 때문에요? 네, 이 작품을 보고 나면 무조건 부모님 생각이 날 거예요. 엄마 아빠 없이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없잖아요. 태어난 이후에 부모님과 함께하지 못 했더라도요. 제가 맡은 로빈은 딸에게 헌신적인 아빠라 연습을 하면 할수록 저희 작품에서 표현돼야 하는 메시지는 딱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앞서 말한 것처럼, 결코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가치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거요. 극 중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겪었을 법한 슬픈 이야기가 나오는데, 무대 위에서 제가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관객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기대돼요.
공연을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부모님 생각을 많이 하게 될 것 같아요. 종구 씨는 ‘아빠’ 하면 어떤 기억이 먼저 떠올라요? 저희 아버지가 몸이 많이 편찮으세요. 일 년 반째 암 투병 생활 중이시거든요. 지난 설에 부모님 댁에서 큰형이랑 작은형까지 다 같이 모였는데, 아버지가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가셨을 때 장례 절차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어요. 우리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어머니와 저희 삼 형제가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아버지가 돌아오셨는데, 저희가 말하는 걸 들으셨는지 아무 말씀 없이 방으로 들어가시더라고요. 그 순간,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생각해 보면 자신의 죽음 앞에서 누가 담담해질 수 있겠어요. 엊그제는 엄마가 보내준 빡빡머리 아빠 사진을 보고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몰라요. 우리 아버지가 언제 이렇게 할아버지가 됐는지, 그게 너무 속상하더라고요.
학창 시절 아버지와의 관계는 어땠어요? 큰형하고 여덟 살, 작은형하고 여섯 살 차이가 나다 보니, 어렸을 때 엄마 아빠, 저, 이렇게 셋이 산 기간이 길어요. 형들이 사춘기를 심하게 겪어서 일찍 독립했거든요. 먼저 시행착오를 겪었던 형들이 제가 방황할 때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줘서 지금의 제가 있지 않나 해요. (웃음) 어쨌든, 제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저에게 커다란 산 같았어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고 하면 아버지가 제일 먼저 떠올랐죠. 물론 저희 아빠가 사회 발전에 대단히 기여하거나 누구나 알 만한 커다란 업적을 남기신 건 아니에요. 그런데도 저한테는 늘 호인처럼 보였어요. 그러니 요즘 부쩍 할아버지처럼 보이는 아버지를 볼 때 마음이 아프죠. 사람은 누구나 나이를 먹지만요.
아빠 역을 맡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었어요? 아빠나 엄마라는 역할이 주는 무게감이 있다 보니, 젊은 배우들은 부담을 느끼기도 하잖아요. 저는 아들과 딸이 있어서 그런지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제가 아빠이다 보니 로빈이라는 인물을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그리고 젊은 아빠로 표현하면 되니까요. 진짜 친구 같은 아빠와 어느 정도 세대 차가 나는 아빠 사이에서 어느 쪽을 택할지 고민 중인데, 아무래도 딸하고 말이 잘 통하는 쪽이 좋을 것 같아요. 연습 초반에는 아예 딸바보 컨셉을 가져갈까도 생각했어요.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데 또 어떤 걸 고민하고 있어요? 로빈의 캐릭터 소개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단어는 천재 과학자예요. 방사능으로 오염된 지구를 떠나 우주 벙커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니까 천재라면 천재일 테죠. 하지만 거기에 너무 초점을 맞추진 않으려고요. 왜냐면 천재 과학자라고 하면 왠지 좀 평범하지 않은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잖아요. 생활 패턴에 특이한 점이 있다거나 행동과 말투가 남다르다거나. 하지만 괴짜 천재 과학자를 표현하는 데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평범해서 소중한 ‘찐’ 감정을 전달하는 데 마이너스가 될 것 같아요. 아주 인간적인 감정과 고민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 중이죠.
노력으로 얻은 선물
이번에 로빈 역에 캐스팅된 다른 두 배우와 무척 이미지가 다르잖아요. 애초에 사람마다 고유의 특징이 있다 보니 동일한 역을 맡더라도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는데, 혹시 과거에 일부러라도 다르게 연기하려고 했던 때가 있을까요? 저는 캐릭터를 이해하고 표현하기까지 좀 오랜 시간이 걸려요. 흔히들 느린 배우라고 표현하죠. 예를 들어, A라는 뮤지컬 넘버를 부른다 치면 다른 배우들이 열 번 부를 때 저는 백 번을 불러야 그들하고 비슷한 수준으로 할 수 있어요. 다른 배우들이 두 번만 읽으면 외울 대사를 저는 스무 번 읽어야 하고요. 그러다 보니 다른 배우들이 어떻게 하는지는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저한테 기준은 항상 제 자신이에요. 저한테 연기란 제 자신과의 싸움이니까요.
노력파에 가까운 타입인가 봐요. 네, 진짜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자신할 수 있어요. 무언가를 배우고 습득하는 속도에는 개인차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나는 왜 이럴까 자책만 하고 있을 순 없잖아요. 제가 스스로 선택한 길인데. 스무 번 읽어야 대본이 외워진다면 스무 번 읽으면 되죠. 다른 배우는 한 번 만에 대본을 외운다고 해도 거기에 스트레스를 받진 않아요. 오히려 같이 기뻐하죠. 이건 실화예요! (웃음) 다른 사람과 저를 비교해 스스로를 괴롭히진 않는데, 대신 제가 생각하는 대로 표현이 안 될 때는 마음이 힘들어져요. 제가 세운 기준에 도달하지 못할 때 제 자신이 실망스럽죠. 그래서 더 열심히 하게 됐던 것 같아요.
배우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나는 왜 남들처럼 빨리 하지 못할까 걱정했을 수도 있잖아요. 그럼에도 연기를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뭐예요? 제 데뷔작이 2005년에 공연한 <마리아 마리아>예요. 2년 정도 그 작품을 하고 나서 오디션을 보고 운 좋게 <지하철 1호선> 팀에 합류하게 됐죠. 그런데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 연습실에서 김민기 선생님께 얼마나 혼났는지 몰라요. 분명 머릿속으론 뭘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겠는데, 연습실에만 가면 얼굴이 새빨개져서 아무것도 못하겠는 거예요.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좌절감이 엄청났죠. 하루는 이대로 괜찮을까 싶어서 같이 자취를 하던 대학교 선배한테 내가 배우로서 자질이 있는지 없는지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했어요. 형이 학교에서 연출을 공부하기도 했고 저를 오랜 시간 지켜봤으니까 어떤 판단을 내려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거든요. 근데 제가 소질이 있단 말은 안 하고, 대신 지금처럼 죽기 살기로 딱 10년까지 해보고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 그러더라고요. 아직 2년밖에 안 해보지 않았냐면서요. 그 말이 엄청 힘이 됐어요. 뭔가를 포기하기엔 아직 너무 젊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그날부터 마치 마늘과 쑥만 먹고 사람이 된 곰처럼, 버티고 버텨서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아요. (웃음)
그 이후에 배우로서 자존감을 회복하게 해준 작품이 있을까요? <김종욱 찾기>요. 사실 그 작품도 저한테는 모험이었어요. 보통 멀티맨 캐릭터를 맡으려면 스위치 전환이 굉장히 빨라야 하는데, 저는 센스와 끼를 타고난 배우는 아니거든요. 항상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한 가지에 집중해서 열심히 파고들어야 하는 타입이죠. 그런데 당시 제 더블 캐스트였던 동갑내기 최대훈 배우는 저와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어요. 연습실에서부터 지금 바로 무대에 올라갈 수 있는 연기와 기량을 보여줬죠. 좀 좌절하게 되더라고요. 제 스스로한테 화가 나서 제가 연습만 하면 연습실 분위기가 가라앉았어요. 멀티맨은 작품에서 웃음을 담당해야 하는 역할인데. 그래도 공연은 여차저차 잘 마쳤는데, 쫑파티 때 김동연 연출님이 저한테 그러시는 거예요. 연습 때와 다르게 공연은 충분히 넘치도록 잘했다고요. 다만 한 가지, 앞으로는 연습실에서도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더 열심히 노력했으면 좋겠다고요. 연습 때 제가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니까 연기에 대한 조언을 해주고 싶어도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대요. 그 일을 계기로 다음 작품부터는 연습실에서 다른 배우, 스태프 들과 작품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혼자 많은 준비를 했어요. 필요하다면 연습 시작 전에 대본을 다 외운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 아직 확신이 없어서 힘들어하고 있을 후배들에게 용기를 줄 만한 이야기네요. 최근 작품을 같이한 사람들은 예전의 제가 어땠는지 상상도 못 할걸요. 삼십 대 초반에 연극 <모범생들>을 할 때는 한 쪽 분량 대사를 2주에 걸쳐 외웠어요. 오죽하면 제 아내가 어떻게 2주 동안 그걸 하나 못 외우냐며 진짜 대단하다 놀렸어요. (웃음) 지금은 한 10분 정도면 한 쪽은 다 외울 수 있을 거예요. 모든 배우가 타고난 능력은 각자 다 다르겠지만, 노력을 하는 만큼 배우로서 능력치가 올라가요. 진짜로요. 대사도 많이 외워 버릇하면 금방 외우게 되죠. 돌이켜 보면, 배우 생활 초반에는 매 작품을 할 때마다 ‘배우를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런 고민은 안 해요. 지금은 어떻게 하면 이 인물을 더 잘 표현할 수 있을지만 생각해요. 당장은 힘들더라도 열심히 노력하다 보면 자기가 언제 그런 고민을 했나 하는 순간이 올 거예요.
지난 15년 동안 많은 뮤지컬과 연극에 참여했는데, 그중 가장 마음에 남은 작품이나 캐릭터가 있을까요. 지금까지 참여한 작품 중에서 뭐가 가장 소중하냐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제가 참여한 모든 작품이 저한테는 다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라고 답해요.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앨빈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짠해지고, <팬레터>의 김해진은 제 분신같이 느껴져요. <니진스키>의 디아길레프는 그가 니진스키를 사랑하면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요. 애착이 가는 인물로 어느 한 캐릭터를 꼽을 수 없지만, 굳이 말하면 사랑을 많이 받았던 캐릭터보다는 사랑을 받지 못한 캐릭터가 더 마음에 남아요. 예를 들어 <팬레터>는 앞으로도 재공연이 올라갈 테고 제가 아니더라도 새로운 김해진이 마지막 생명의 촛불을 계속 피울 테잖아요. 하지만 흥행에 실패해 재공연을 기약할 수 없는 작품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 거란 안타까움이 들어요. 여러 가지 이유들로 인해 관객들에게 사랑받지 못하고 점점 빛을 잃어가는 작은 별들이 지금 마음속에 하나둘 떠오르는데, 그 별들이 저한테는 더 애틋하게 느껴져요.
요즘에는 배우로서 어떤 때 두려움을 느껴요? 몇 달 동안 같은 공연을 하다 보면 공연 중 대사를 하면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문득 다른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이를 테면 지금 이렇게 인터뷰를 하는 중에 커피를 마시면서 저도 모르게 ‘아이스 바닐라 라떼가 좀 더 달았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처럼요. (웃음) 물론 무대에서 집중력을 잃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열심히 채찍질하지만, 배우도 사람이다 보니 매 순간 완벽하게 몰입하지 못할 때가 있어요. 하지만 제가 원해서 하는 일이니까 지치지 않고 매일 완벽한 공연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죠.
거의 모든 인터뷰 말미에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말을 남겼어요. 나이를 먹을수록 좋은 배우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것 같은데, 지금은 어떤가요? 어느 순간부터 연습실에 가면 제가 제일 나이가 많아요. 그러다 보니 같이 공연하는 동료 배우들이 편하게 연기할 수 있도록 내가 잘 받쳐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예전에는 무대에서 제가 반짝반짝 빛나고 싶었어요. 물론 지금도 그 마음이 없진 않겠죠. 그런데 전보다 시야가 넓어졌어요. 무대에서 상대방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싶고, 이 사람이 표현하는 인물이 더 돋보이게 해주고 싶어요. <로빈>을 예로 들면, 루나 역의 두 배우를 진짜 루나로 바라봐 주고, 그럼으로써 관객들도 두 배우를 루나라고 믿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지금 제 기준에서는 제일 좋은 배우인 것 같아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8호 2020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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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로빈> 김종구, 이날이 오기까지 [No.198]
글 |배경희 사진 |심주호 2020-04-01 17,340sponsored adv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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