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 나하나
기회를 거머쥘 수 있는 단단함
2020년 화제의 신작으로 꼽히는 <리지>는 네 명의 여성 배우가 거침없이 에너지를 발산하는 무대가 기대되는 작품이다. 친아버지와 의붓어머니를 도끼로 살해한 혐의를 받는 리지를 중심으로 그녀의 언니 엠마, 보든가의 하녀 브리짓, 이웃 친구 앨리스가 그 주인공. 지금까지 행보라면 리지는 나하나라는 배우에게 쉽게 상상되지 않는 역할이지만, 우리는 지난해 여름 이미 한 번 그녀의 새로운 가능성을 본 적이 있다.
결과를 기대하게 하는 도전
<리지>는 여성 4인조 록 뮤지컬 신작이라는 점에서 화제가 됐어요.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어떤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사실 처음엔 스케줄 문제로 이 작품을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지난해 여름 <시라노>를 할 때부터 약속한 작품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대본을 읽어봤더니 도대체 ‘리지 보든이란 실존 인물은 어떤 사람일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어요. 리지 보든 살인 사건은 벌써 백 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여러 장르에서 리메이크가 될 정도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일이잖아요. 저는 지금까지 밝고 긍정적인 역할을 주로 맡아왔던 터라, 어둡고 독특한 캐릭터가 흥미롭기도 했고요. 작년에 <테레즈 라캥>을 했을 때 비슷한 연장선에 있는 테레즈를 연기하면서 힘들었던 만큼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런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단 생각이 들었죠.
대본을 처음 읽었을 때 그 인물에 대해 갖게 되는 감정이 있잖아요. 리지에 대해서는 어떤 마음이 먼저 들었나요.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리지 보든 이야기를 다룰 때, 그녀가 살인을 했다고 가정하고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실제로 리지는 존속 살인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고, 사건은 미스터리한 영구 미제로 남았지만요. 처음엔 왜 리지 보든을 살인자로 단정 지을까 의아했는데, 우리 현대 사회에서 그걸 바라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여성이 부당하게 겪는 사회적 차별과 억압, 폭력을 제 힘으로 깨부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닐까 하는 거죠. 물론 살인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지만요. 나라면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될 수 있을까. 철저한 계획 아래 부모를 살해했을까 아니면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게 됐을까. 대본을 읽자마자 여러 가지 물음표가 떠올랐어요. 쉽게 파악되지 않는 인물 유형이라 더 마음이 갔죠.
이 작품의 특징 중 하나는 록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거예요. 지금까지 이런 스타일의 뮤지컬 넘버를 부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떤가요. 맞아요, 이 작품의 음악적인 부분도 저한테는 도전이었어요. 저는 주로 멜로디가 강한 노래를 불러왔고, 음색이 미성이라 록 발성이 가능할까 반신반의했죠. 그런데 연습을 시작해 보니, 이 작품이 록을 사용한 이유는 다름 아닌 리지가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이기 때문이더라고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록커처럼 거칠고 강한 소리를 내는 데 집중하기보단 뮤지컬 안에 록이란 음악 장르를 어색하지 않게 녹여내는 게 중요하죠. 제 캐릭터 성격상 처음엔 가늘고 약하게 노래하다 점점 세상을 뚫고 나오는 듯한 소리를 내는 게 더 어울릴 듯싶고요. 요즘 연습실에서 더블 캐스트인 (유)리아 언니가 노래하는 걸 들으면서 정말 많은 걸 배우고 있어요.
듣자마자 마음을 울렸던 곡이 있을까요. 리지 솔로곡 중에 ‘사랑 아냐(This Is Not Love)’라는 곡이 있어요. 저희 작품 세 번째 뮤지컬 넘버인데,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OST를 틀었다가 이 곡에서 눈물이 터졌어요. 리지가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면서 부르는 노래거든요. 사랑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며 처음에는 읊조리듯 노래하다 후반부로 갈수록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내죠. 참고로 말하자면 무대에 아버지가 등장하거나 구체적인 상황이 묘사되진 않아요. 그리고 리지, 엠마, 앨리스, 브리짓 네 사람이 함께 부르는 4중창들도 정말 좋아요. 독특하고 아름다운 리듬을 굉장히 정교하게 쌓은 느낌이랄까. 저희 팀 배우들이 다들 노래로 인정받는 분들이잖아요. 연습실에서 합창하는 걸 듣고 있으면 콘서트장에 와 있는 것 같아요.
리지가 처한 고통스러운 상황 가운데 어떤 점이 가장 마음 아프게 느껴졌어요? ‘사랑 아냐’ 장면에서 아버지가 말하는 사랑한다는 말의 의미가 사랑도 아닐뿐더러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돼요. 하지만 자기가 처한 환경 안에서 제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죠. 그래서 노래가 마치 그 답답함에서 나오는 비명 같았어요. 그 상황에서 리지가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소리치는 것밖에 없으니까요.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자기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지르게 될 때가 있잖아요. ‘사랑 아냐’는 딱 그런 느낌의 노래라 눈물이 났던 것 같아요.
혹시 그 비슷한 감정적인 경험을 했던 기억이 있을까요. 나를 둘러싼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내 스스로 무언가를 바꿀 수 없어서 절망했던 경험이요. 제가 공연 연습에 들어가면 항상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배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예요. 내가 정말 연기를 해도 되는 걸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만둬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친한 동료들은 저보고 말로만 그런다고 제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는데, 전 그 순간에는 항상 진심으로 그렇게 느껴요. 물론 리지가 느끼는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저한테는 연기가 오를 수 없는 높은 벽처럼 막막하게 느껴질 때가 많거든요. 특히 내 뜻대로 연기가 되지 않을 때 그 상황을 회피하고 도망치고 싶죠. 근데 잘 안 풀리던 문제가 어느 순간 휙 풀리면 그게 또 너무 재밌어요. 그래서 포기할 수 없나 봐요.
높고 커다란 꿈
여성 서사를 갈망하는 관객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요즘 같은 때에 네 명의 여성 배우들만 나오는 작품에 대한 기대가 커요. 연습실에서는 어떤 이야기들이 오가고 있나요. 공연 엔딩인 리지의 재판 장면에서 엠마, 앨리스, 브리짓 모두 서로 연대하여 리지가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요. 리지를 사랑하는 이웃 친구 앨리스를 제외한 나머지 두 사람은 리지하고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데도요. 어떻게 보면 리지의 언니 엠마는 살인을 부추기는 인물인데, 리지를 집에 혼자 두고 떠남으로써 살인이 일어나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쳐요. 리지가 엠마에게 제발 자기를 집에 혼자 두지 말라고 애원하거든요. 그럼에도 재판정에서 리지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도록 그녀를 돕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그건 거의 본능에 가까운 선택인 것 같아요. 같은 여성으로서 리지가 겪은 폭력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거죠. 네 사람 모두 마음속 깊은 곳에 언젠가 제 힘으로 부당한 현실을 딛고 일어서서 높이 날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어요. 탄탄한 드라마성보다 독특한 형식미가 강한 작품이라 어떻게 하면 관객들에게 이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 중이에요.
리지는 살인을 저지르고 나서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잖아요. 지금까지 자주 보지 못한 여성 캐릭터라는 점에서 관객들에게 통쾌함을 느끼게 할 것 같아요. 연출님이 연습실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리지가 당대에 무죄 판결을 받은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가녀린 몸을 가진 여성이 남자를 죽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이게 참 아이러니하지 않느냐고요. 여성이라서 살인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옹호 발언처럼 들리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여성을 바라보는 편견이 존재한다는 거잖아요. 때문에 리지의 살인에 계획성이 보이면 오히려 관객들은 더욱 짜릿함을 느끼지 않겠냐는 게 연출님의 생각이에요. 제가 리지로서 가장 통쾌함을 느낄 때도 재판 장면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세상 밖으로 향하는 문을 당당히 걸어 나가겠노라 노래할 때예요. 나에게 폭력을 가해 온 누군가가 사라진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겠다고 노래하는 리지의 태도에 불안함이라곤 전혀 없죠.
데뷔작을 함께했던 홍서영 배우와 오랜만에 작품에서 다시 만난 만큼 옛날 생각이 날 것 같아요. 2016년 <도리안 그레이>로 데뷔하기까지 오디션 서류 전형에서 탈락하는 경우가 많았다고요. 데뷔 전 오디션 서류 전형을 통과했던 작품은 대대적인 공개 오디션을 진행했던 <레 미제라블>하고 <도리안 그레이>밖에 없었어요. 저는 기본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편이라, 솔직히 중간에 뮤지컬을 포기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던 적이 많아요. 무대에 서는 기회는 아무에게나 쉽게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건 진짜 괜찮았어요. 근데 제가 원하는 수준의 실력이 나오지 않을 때 너무 괴롭더라고요. 어쩌면 영영 데뷔를 못할 수도 있고, 평생 무대에 못 서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무대에서 노래하지 않고는 못 살 것 같으니 끝까지 한번 해보면 어떻게든 될 거라는 마음으로 버틴 것 같아요.
스티븐 손드하임의 열혈 팬이라면서요. 지난 인터뷰들을 살펴봤을 때 뮤지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 같았어요. 학교 다닐 때 뮤지컬 개론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손드하임 작품을 많이 접하면서 그 매력에 완전히 빠져버렸죠. 그의 작품 중에 <선데이 인 더 파크 위드 조지>를 제일 좋아하는데, <메릴리 위 롤 어롱>이 브로드웨이에서 실패하면서 소수의 관객들을 위한 비주류 작품을 쓰겠다는 각오로 만든 거래요. 손드하임의 마이너한 취향에 제가 제대로 저격을 당한 것 같아요. (웃음) <선데이 인 더 파크 위드 조지>는 작품 속에 숨겨진 의도들이 많아서 여러 번 의미를 곱씹어 봐야 하나하나 퍼즐을 맞춰갈 수 있거든요. 수십 번 반복해 보면서 집요하게 작품에 파고들었을 때 퍼즐이 완성되는 카타르시스가 엄청나요.
10년 후에는 어떤 배우가 되어 있길 바라요? 손드하임 작품을 하고 있는 배우가 되어 있을 거예요! (웃음) 대학교 재학 중 성대결절 증상이 심해져서 발성법을 교정하기 위해 영국에 반 년 정도 가 있었던 적이 있어요. 그때 내셔널 시어터에서 하는 연극을 진짜 많이 보러 다녔거든요. 영어 실력이 좋지 않아 공연 내용을 다 이해할 수 없었는데도 진짜 특별한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았어요. 이런 공연을 볼 수 있다니 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감사했죠. 그런 작품들의 비하인드스토리를 찾아보면, 대부분 한 작품이 무대에 올라오기까지 정말 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들어갔더라고요. 정말이지 정교한 작업 과정을 거치죠. 요즘 우리 공연계는 배우 개인의 커리어와 성공이 중요시되는 분위기이다 보니, 오랜 시간 서로 합심해야 하는 협업의 가치가 예전만큼 빛을 발하지 못한다고 아쉬워하는 선배들을 많이 봤어요. 제가 바라는 것은 배우보다 작품이 빛나는 무대에 서는 거예요. 객석의 누군가가 오늘 이 공연을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느낀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은 없을 테니까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99호 2020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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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리지> 나하나, 기회를 거머쥘 수 있는 단단함 [No.199]
글 |배경희 사진 |배임석 2020-05-04 5,398sponsored adv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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