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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FACE] <리지> 홍서영, 무대에 설 운명 [No.200]

글 |박보라 사진 |오충석 2020-05-30 7,271

<리지> 홍서영
무대에 설 운명




지난 2016년 초연한 <도리안 그레이>는 이례적으로 여주인공 시빌 베인을 찾는 공개 오디션을 진행했다. 당연히 뮤지컬 무대를 꿈꾸는 많은 신인 배우들의 관심이 쏠렸는데, 4백여 명이 몰린 이 오디션의 주인공은 학교 공연 외의 무대에 선 적이 없는 홍서영이었다. “<도리안 그레이>의 오디션 접수 기간에는 ‘너도 오디션 봐?’라는 질문이 안부 인사였어요. 지금도 나이가 많지 않지만 그때는 진짜 어렸거든요. 모든 게 무서웠죠. 이제 와 돌아보면 ‘버텨야 한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어요. 데뷔작에 내 인생의 운을 다 썼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이제는 운에 기대기보다는 실력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마음이 커요” 자신의 데뷔가 쉽게 일어날 수 없는 행운임을 일찌감치 자각한 홍서영은 아무렇지 않은 듯 ‘운이 계속될 수 없으니 앞으로 더 노력해야만 한다’는 말을 한 번 더 덧붙인다. 학교 무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위압감이 느껴지던 첫 데뷔 무대를 회상하면 여전히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만큼’ 긴장된다고. 쉽게 행운을 잡은 것처럼 보이는 홍서영이 무대에 서기까지는 오랜 노력이 있었다. 사실 홍서영이 처음부터 뛰어난 노래 실력을 보였던 건 아니다. 중학교 2학년 문득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마음을 지닌 이후부터 쏟은 노력의 결과다. “사실 음악보다 체육과 미술에 소질이 있었어요. 선생님들이 체육이나 미술 분야로 진학을 추천하셨지만, 노래가 너무 하고 싶었어요. ‘딱’ 꽂힐 정도로 좋아하는 게 처음 생기니까 계속 부딪혀보고 싶더라고요. 주변에 재능이 넘치는 친구들이 늘 함께해서,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노래에 소질이 없다고 생각한 딸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선언하자마자, ‘어차피 안 될 걸 아는’ 부모님은 내친김에 예술 고등학교 진학도 흔쾌하게 허락했단다. 그리고 의외의 합격 소식을 들고 온 홍서영에게 아버지가 건넨 말은 이거다. “하늘에서 네가 노래를 할 운명이라고 알려줬나 봐.” 

차근차근 뮤지컬 무대에서 자신의 운명을 증명해 온 홍서영이 새롭게 출연 중인 작품은 <리지>다. “<리지>는 처음 접한 순간 독보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말하면 겁도 났죠. 내가 과연 이 작품을 잘 소화할 수 있을까. 그런데 주변에서 감사하게도 ‘많이 배울 거다. 도전해 봐라’라는 응원을 건네주셨어요. 그 말을 들으니 ‘내가 도전을 안 한 지 너무 오래된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엇보다 제가 <리지>의 무대 위에서 즐거울 것 같았어요.” 그녀 스스로 말하길 ‘섹시함은 자신의 인생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 중 하나’인데, 이번에 맡은 엠마는 사십 대 초반 여성으로 그 매력을 끌어내야만 하는 숙제를 던져줬다. 그동안 숨겨왔던 성숙함과 섹시함을 어떻게 표현해 내야 할지 고민을 이어가던 홍서영은 결국 자신만의 엠마를 만들어냈다. 홍서영의 엠마는 공연 내내 냉소적인 분위기로 모든 인물에게 싸늘한 시선을 보낸다. 그러다 갑자기 새엄마를 죽일 계획을 세우겠다며 훌쩍 떠났다가 끔찍하게 부모를 살해한 리지를 마주한다. 홍서영이 연기하는 엠마는 냉정하게만 보이지만 순간순간 리지를 향한 연민의 눈길이 묻어난다. “리지는 엠마의 아픈 손가락이에요. 리지를 향한 엠마의 마음을 헤아려보다가 학창 시절 싫어하던 우유가 생각나더라고요. 먹기 싫은 우유를 서랍에 숨겨두곤 했거든요. 그런데 다음 날 또 새로운 우유가 생기고, 그렇게 우유들이 서랍 속에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상해 있었어요. 리지를 바라보는 엠마의 마음도 우유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중에…. 조금 더 있다가…’라는 마음으로 리지의 고통을 회피하려다 더는 못 참고 나름의 계획을 세우려고 떠났는데, 돌아오니 결국 살인을 저지른 리지를 마주한 거죠. 그런 리지를 봤을 때 엠마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작품의 모티프가 된 리지 보든 살인 사건은 굉장히 자극적인 소재다. 근친 성폭력, 도끼를 이용한 잔혹한 살인 사건이 주가 되기 때문이다. 뮤지컬은 실화의 내용을 충실히 따랐다. “연습 초반에 ‘리지가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죽인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바로 옳다고 대답했죠. 제가 리지라면 통쾌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다시 곱씹어보니 ‘과연 이 사건에서 통쾌함만 느끼는 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이 작품은 느낌표와 물음표가 함께 공존해요. 리지의 복수를 응원하다가도 그 방법이 과연 옳고 그른지 생각하게 되죠.” <리지>의 커튼콜 무대는 마치 록 콘서트처럼 흥겹다. 리지 보든 살인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한 네 명의 여성들은 파격적인 록 사운드에 몸을 맡긴다. 홍서영은 “커튼콜이 <리지>의 또 다른 매력이다. 무대에서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시간”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운다.

홍서영이 내뿜는 무대 에너지를 거슬러 올라가면 <헤드윅>을 빼놓을 수 없다. “<헤드윅>을 앞두고 ‘내가 무대에서 즐기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고민이 가장 컸어요. 록은 스스로 재미있게 즐겨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헤드윅> 대기실에서 말 그대로 ‘벌벌’ 떨었지만, 딱 하나 다짐했어요. 무대에 올라가면 모든 걸 즐기고 내려오자. 그리고 실제로 그런 제 모습을 많이 좋아해 주신 것 같기도 하고요.” 그녀에게 <헤드윅>은 자신의 인생에서 ‘놓치면 평생 후회할’ 작품이었다. 영화를 수십 번이나 되돌려 볼 정도로 작품에 푹 빠진 자칭 마니아였고, 이츠학에 망설임 없이 도전한 이유도 그래서다. 여러 시즌에 걸쳐 두터운 팬층을 지닌 작품에 합류한다는 부담감은 그녀 앞에서 전혀 장애물로 작용하지 않았다. 애정이 깃든 만큼 수없이 대본과 음악을 파고들었던 특별한 작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헤드윅>이 선물한 건 바로 ‘좋은 사람으로 나아가는 방법’을 깨닫게 해준 거란다. 홍서영은 연습과 공연 내내 드러나던 빈틈을 채워주던 다정한 선배들의 손길에 감동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이제 조금씩 성장하는 자신도 앞으로 그런 선배이자 동료가 될 거라고 다짐하게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고작 다섯 작품을 거쳤을 뿐이니 시작점에서 출발한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냐고 되묻는 그녀의 꿈은 무엇일까. “저 정말 평범하거든요? 집에 있으면 고양이랑 놀거나 TV를 보는 게 일상의 전부일 정도로. 그런데 무대 위에 정말 오래도록 남고 싶어요. 언제나 관객을 만나고 싶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0호 2020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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