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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ZOOM IN] <프리다> 죽음과 삶에 가장 가까웠던 예술가 [No.209]

글 |김주연(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 Illustrator |손정민 2022-08-30 1,089

<프리다>

죽음과 삶에 가장 가까웠던 예술가

 

프리다 칼로라는 이름에는 종종 수식어가 뒤따른다. 멕시코의 위대한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이자 동료, 결혼과 이혼을 번복했던 떠들썩한 연애사의 주인공. 하지만 프리다의 그림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들여다본다면 그녀는 장황한 수식어가 필요 없는, 그저 치열했던 예술가일 뿐이란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독립적인 개성을 보여 주는 프리다 칼로의 깊고 치열했던 예술 세계를 네 개의 테마로 살펴본다.

 

생명력 가득한 멕시코의 색채


프리다의 그림은 강렬하고 화려한 색채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녀가 자주 쓰는 원색과 대비는 색채감이 풍부한 멕시코의 전통과 민속예술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색깔만이 아니다. 그녀의 캔버스에는 인간과 자연, 신화가 함께 어우러지는 고대 아즈텍의 세계관이 스며 있다. 인간의 얼굴을 한 사슴, 대지의 여신에 안겨 있는 인물, 식물로부터 피어나는 여성 등 프리다의 그림에서는 동물과 식물, 인간이 연결되고 모든 생명체는 하나로 이어진다. 프리다와 디에고 부부는 평생 조국 멕시코의 전통에 무한한 애착을 보였다. 두 사람 모두 고대 문명과 신화를 그림 속에 들여왔고, 틈틈이 멕시코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전통 유물과 토기를 수집했다. 멕시코 전통에 대한 프리다의 사랑과 자부심은 일상의 옷차림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났는데, 결혼 후 그녀는 알록달록한 색상의 전통 의상을 즐겨 입었고 화려한 장식품으로 치장했다. 미국 록펠러 센터의 벽화 의뢰를 받은 디에고를 따라 뉴욕에 갔을 때도 프리다는 끊임없이 조국을 그리워했고, 회색빛 뉴욕을 배경으로 펄럭이는 멕시코 전통 의상을 반복해서 그리면서 향수를 달랬다. 프리다에게 생명력 가득한 멕시코의 전통과 색채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긍심이었고, 그녀는 이를 캔버스와 의상을 통해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 했다. 강렬한 원색의 색채와 대지의 이미지, 이국적인 복장과 화려한 장식은 그녀만의 독특한 개성과 스타일을 만들어 내면서 동시에 그녀의 예술적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확실하게 보여 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고통스러운 자아와 마주하기


프리다의 전체 작품 중 3분의 1가량은 자화상이다. 이는 그녀가 그림을 시작하게 된 계기와도 관련이 있는데, 치명적인 버스 사고 이후 침대에 꼼짝 않고 누워만 있을 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그리는 것이었다. 꼬박 1년을 누워 있으면서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통렬한 고통과 고독을 캔버스 속 자신의 형상에 담았다. 이후로도 그녀는 삶의 고통이 자신을 파고들 때마다 자화상을 그리면서 상처 입은 내면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온몸에 못이 박힌 자화상, 긴 칼이 심장을 뚫어 피가 철철 나는 자화상, 피눈물을 흘리는 자화상 등 프리다의 자화상은 대부분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날카로운 아픔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폭풍처럼 덮쳐 오는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상처는 그녀를 통째로 삼켜 버릴 것 같았지만, 프리다는 도망치지 않고 그 고통을 응시하면서 꿋꿋하게 버텨 냈다. 피 흘리는 수많은 자화상은 이러한 고통의 내밀한 기록이자 지지 않기 위해 이어간 투쟁의 흔적들이다. 또한 프리다가 반복적으로 그린 자화상 속 인물은 늘 화면 밖의 화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이는 그림을 통해 스스로의 내면을 마주하고, 또한 끊임없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의지의 증거라 할 수 있다. 혁명에 대한 뜨거운 열정 프리다의 삶과 예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혁명과 공산주의다. 남편 디에고와 프리다는 모두 열성적인 공산당원이었고, 그녀는 평생에 걸쳐 공산주의의 역사와 계급 갈등을 공부하고 유물론적 변증법을 맹렬하게 지지했다. 그녀의 신념은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 프리다 부부는 소련의 혁명가 트로츠키의 멕시코 망명을 주선해 함께 지냈고, 한동안 트로츠키와 프리다 사이에는 동료 이상의 애정 관계가 싹트기도 했다. 죽음을 향해 가던 생의 말기에 프리다는 더욱 필사적으로 공산주의에 매달렸다. 후기 작품에서는 혁명에 대한 뜨거운 신념이 캔버스를 압도하고 있다. 화면을 가득 메운 붉은 깃발과 레닌, 마르크스 등 공산주의 영웅의 형상은 그녀가 얼마나 자기 신념에 헌신적이었는지를 노골적으로 보여 주는 요소다. 죽기 얼마 전에도 프리다는 “나는 내가 한평생 공산주의자로 살아왔다는 사실이 고맙다”라고 일기에 썼으며, 마지막으로 참가한 공개 석상 역시 공산주의 집회였다. 그녀는 불편한 몸을 휠체어에 실은 채 남편 디에고와 함께 뜨겁게 구호를 외쳤고, 얼마 뒤 그녀의 관은 낫과 망치가 그려진 붉은 천에 덮인 채 화장터로 옮겨졌다. 

 

죽음보다 강한 생명력


프리다는 평생 죽음을 품고 살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섯 살에는 소아마비를 앓았고, 열여덟 살 무렵에는 버스 충돌 사고로 척추와 골반, 오른쪽 다리, 자궁 등을 크게 다쳤다.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났지만, 이로 인한 상처와 후유증은 그녀의 남은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렸다. 죽을 때까지 수십 번 재수술을 받는 동안 온몸을 꿰뚫는 통증으로 고통받았으며 썩어 가는 발가락과 다리를 절단해야 했다. 사고 이후 프리다의 삶은 한마디로 망가져 가는 육체와의 지난한 투쟁이었다. 버스 사고가 육체적으로 프리다를 망가뜨렸다면 디에고와의 결혼은 정신적으로 그녀를 난도질한 또 하나의 치명적인 사건이었고, 그토록 원했던 아이의 유산은 다시 한번 그녀를 죽음과 가까이 대면시켰다. 프리다의 화폭에 해골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디에고가 말했던 것처럼 해골은 그녀의 삶을 함께하는 동반자이자 연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프리다가 죽음에 굴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고대 아즈텍 신화에서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삶이자 자연의 순환을 의미했다. 멕시코의 가장 유명한 축제인 ‘죽은 자들의 날’에 해골 분장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않는 그들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프리다는 오히려 더욱 치열하게 삶을 불태웠다. 세상을 떠나기 8일 전에 그린 마지막 작품에서 그녀는 새빨간 수박 위에 ‘Viva la Vida(인생 만세)’를 새겨 놓았다. 끝없는 고통 속에 매 순간 죽음을 느끼면서도 프리다는 누구보다 삶을 사랑하는, 삶의 본질에 가장 가까이 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떤 고통도, 심지어는 죽음마저도 꺾을 수 없었던 강인한 삶의 의지와 생명력이야말로 프리다의 모든 그림을 관통하는 가장 강렬한 테마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프리다 칼로』 헤이든 헤레라 저 / 김정아 역 | 민음사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르 클레지오 저 / 신성림 역 | 다빈치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09호 2022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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