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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ZOOM IN] <빈센트 반 고흐> 우리가 고흐를 사랑하는 몇 가지 이유 [No.211]

글 |류동현(미술 저널리스트) 사진 | Illustrator |손정민 2022-09-14 4,385

<빈센트 반 고흐>
우리가 고흐를 사랑하는 몇 가지 이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빈센트 반 고흐. 사람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그의 작품이 지닌 예술적 가치를 통해 여전히 그가 사랑받는 몇 가지 이유를 알아보자.

 

생을 스스로 마감한 화가


화면에 광활한 밀밭이 펼쳐져 있다. 파노라마 뷰로 펼쳐진 밀밭이다. 연두와 녹색의 밀은 파릇파릇하게 자라고 있다. 화면 위쪽에는 코발트블루의 청량한 하늘에 붓 터치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흰 구름이 떠 있다. 저 멀리 짙은 하늘은 곧 소낙비가 내릴 듯한 느낌을 준다. 경쾌한 여름날의 정경이다. 흡사 2.35:1의 화면 비율처럼 가로로 긴 그림은 보는 사람의 시야를 꽉 채워 마치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게 한다. 빈센트 반 고흐가 1890년에 그린 ‘천둥을 부르는 구름 밑의 밀밭’이다.


“나는 밀밭을 그려 보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제대로 스케치할 수가 없다네. 겨우 청록색 줄기, 리본처럼 가느다란 잎사귀, 먼지로 인해 꽃망울이 생기를 잃고 노란색으로 변해 가고 있는 밀 이삭을 그렸네. 밀밭 그림을 그린 다음에는 인물화 몇 점을 그려 보고 싶은데 배경은 무척 생생하면서도 침착한 느낌을 주어야 할 것일세. 산들바람 속에서 잔잔하게 흔들리는 이삭을 연상시켜 주며 전체를 같은 초록 색조로 채색한다는 것인데, 그 작업은 결코 수월하지 않을 것일세.”
― 폴 고갱에게 쓴 끝내지 못한 편지 중에서


1890년 7월 27일,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심장 아래에 권총 방아쇠를 당겼다. 37년 4개월이라는 삶을 자신의 손으로 내려놓은 것이다. 빈센트의 지인이었던 가셰 박사가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왔지만 총알을 뺄 수 없었다. 7월 28일, 빈센트는 동생 테오와 마지막으로 담배를 나누어 피운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1시 반, 빈센트 반 고흐는 다 쏟아붓지 못한 예술적 열정을 이승에 남겨 둔 채 “고통은 영원하다”라는 마지막 말과 함께 세상 저 너머로 영원한 여행을 떠났다.


예술가 공동체를 위해 아를에서 빈센트와 함께 지냈던 폴 고갱은 지인인 에밀 베르나르에게 빈센트가 왜 자살을 했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자그마한 단서를 남겼다. 다음은 폴 고갱이 쓴 『어떤 야만인의 글』에 실린 내용이다. “빈센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네. 자네가 장례식에 갔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놓이더군. 슬픈 일이네. 그러나 나는 그다지 슬프지는 않다네. 그 가여운 친구가 자신의 광기 때문에 얼마나 고군분투했는가를 알고 있기 때문일세. 지금 세상을 떠난 것이 그에게는 오히려 다행이라고나 할까. 세상을 떠남으로써 그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환생하여 그가 전생에서 행한 훌륭한 업적으로 보답을 받을 수가 있을 것이니 말일세.”

 

강렬한 예술적 갈망에 사로잡힌 삶


빈센트 반 고흐는 37년의 짧은 생에서 숱한 굴곡을 겪었다. 그리고 그는 인생의 여러 굴곡에 대한 수많은 편지를 남겼다. 동생 테오 반 고흐와 주고받은 편지만 무려 668통에 달한다. 미술사를 공부하는 방법 중에는 작가들이 남긴 작품뿐만 아니라 편지나 자료 등을 통해 작가의 작업 세계를 밝혀 나가는 것이 있다. 빈센트 반 고흐만큼 이러한 방식의 연구가 잘 진행된 작가는 또 없을 것이다. 빈센트가 남긴 편지들이 그의 삶을 복원해 주었기에 우리는 그가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남겼는지 알 수 있다. 빈센트는 900여 점의 유화, 1,100여 점의 드로잉과 스케치 등 방대한 양의 작품을 남겼다. 그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1880년이었고, 타계한 것은 1890년이었으니 화가로서 그림을 그린 기간은 10년에 불과했다. 그중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린 것은 1886년 이후로, 그의 작품 대부분이 생의 마지막 5년에 집중되어 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2,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으니 그가 얼마나 강렬한 예술적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편지와 다양한 자료로 빈센트의 삶을 복원해 보면 몇 차례 인생의 변곡점과 작업 장소의 변화가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화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 1853년 목사의 첫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화상이었던 숙부의 도움으로 열일곱 살에 구필 화랑 헤이그 지점에서 갤러리스트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갤러리스트 빈센트는 런던, 파리 등지에서 다양한 작품을 접하며 열심히 일하는 동시에 점점 종교 활동에 빠졌다. 그러면서 사회 빈곤층의 삶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다. 다혈질 성격 때문에 조교 활동에서 퇴출당한 빈센트는 스물일곱 살이 되던 해에 고민 끝에 화가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과거 헤이그, 런던, 파리에서 갤러리스트로 일했던 것이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대가의 작품들과 당대의 미술 현장을 경험한 것은 훗날 반 고흐 특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885년 그림 공부를 시작한 지 5년 만에 그린 ‘감자를 먹는 사람들’은 빈센트가 처음으로 대규모 구성을 시도한 작업이다. 화가 스스로 이 그림을 자신의 첫 ‘작품’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다. ‘별이 빛나는 밤’ ‘해바라기’처럼 화려하고 선명한 색감과 과감한 붓 터치가 돋보이는 그림들과는 확연히 다른 느낌이지만, 그가 지난 5년간 고민해 왔던 농민과 노동자가 행하는 노동의 순수함, 숭고함을 극적인 빛과 어둠의 대비 속에 표현한 걸작이다.

 

화풍을 완성한 마지막 5년


1886년 빈센트는 테오가 있는 파리로 갔다. 파리에서 화가들과 교류하며 보낸 2년 동안 인상주의 화풍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불쑥 솟아나는 다혈질 성격 때문에 인심을 잃어 1888년 2월 훌쩍 아를로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예술 공동체를 꿈꾸게 되는데, 이에 호응한 화가가 바로 폴 고갱이었다(동생 테오가 작품을 사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빈센트의 불같은 성격으로 공동체 생활은 고작 두 달 만에 끝나 버렸지만 말이다. 아를에서 생활한 1년 동안 빈센트의 화풍은 극적으로 변했다. 화창한 날씨와 강렬한 햇빛은 선명한 원색과 두꺼운 물감 터치를 사용하게 만들었다. 수많은 걸작이 이때부터 탄생했다. 빈센트 반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해바라기 그림도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그려졌는데, 빈센트가 아를에 찾아온 고갱의 침실을 꾸미고자 여러 점의 해바라기 그림을 그린 것은 꽤 유명한 일화다. 당시 고갱은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는 빈센트를 화폭에 담기도 했다.


1888년 12월 빈센트가 자신의 귀를 잘라 버리는 사건으로 결국 고갱은 그의 곁을 떠난다. 1889년 5월부터 1년간 빈센트는 생 레미의 정신병원에서 생활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이때 ‘별이 빛나는 밤’ ‘꽃 피는 아몬드 나무’ 등 많은 그림이 제작되었다. 1890년 5월부터 7월까지는 파리 북쪽의 오베르에서 생활했다. 이 짧은 기간에도 빈센트는 수십 점의 그림을 그렸다. 남프랑스의 밝고 선명한 풍경과는 다른 변화무쌍한 하늘의 풍경이 빈센트의 화폭에 담겼다. ‘천둥을 부르는 구름 밑의 밀밭’이나 ‘까마귀가 있는 밀밭’ 등 걸작이 탄생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파리, 아를, 생 레미, 오베르에 길게는 2년, 짧게는 2개월 정도 체류하며 자신만의 화풍을 극적으로 만들어 나갔다. 이 5년의 기간 동안 색상이나 붓 터치 등이 끊임없이 변했다. 체류했던 동네의 분위기에 동화되듯이 말이다.

 

고흐로부터 시작된 미술사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를 뽑을 때 여전히 빈센트 반 고흐는 상위에 꼽힌다. 그는 어떻게 미술사의 신화가 되었을까. 왜 우리는 그의 작품을 그토록 사랑할까. 10여 년의 짧은 작업 기간 동안 보여 주었던 활동에 단서가 있다. 화랑에서 일하면서 여러 미술가의 작품들을 접했고, 이를 통해 자신의 예술에 눈을 뜬 점, 불같은 성격이 결국은 자신의 작업 세계를 지키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한 점, 타인의 작업을 보고 배우면서도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 나간 점 등은 그가 자신의 예술적 업적을 쌓는 데 필요충분조건이 되었다. 또한 빈센트는 자신의 감정을 강렬한 붓 터치를 통해 분출하며 이른바 표현주의로 대표되는 현대미술의 사조를 만들어 냈다. 분출하는 광기 속에서도 예술을 통한 구원을 꿈꾸고 예술을 향한 순수함과 예술에 대한 진정성이 작품 속에 묻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를 세기의 예술가로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P.S. “너는 장사꾼에 속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리고 너는 아직도 진정한 인간성을 간직하고 있으며 또 진정한 너 자신의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진정 네가 원하는 것이 무얼까?” 동생 테오가 생계를 위해 일하던 화랑을 그만두고 독립을 고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빈센트는 마무리 짓지 못한 편지를 책상 서랍 속에 놔두었다. 그의 마지막 편지는 어려운 화가를 위해, 당시 미술계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화상 테오에게 보내는 헌사가 아니었을까. 테오는 빈센트가 자살한 후 반년 뒤인 1891년 1월 25일 마비성 치매를 앓다가 서른넷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수습하고 전 세계에 알린 사람은 테오 반 고흐의 부인이었던 요안나 헤지나 반 고흐-봉헤르였다. 요안나는 반 고흐 형제의 편지를 정리해 출간하기도 했다. 화가의 신화를 만든 사람은 따로 있었다. 

 

 

‘천둥을 부르는 구름 밑의 밀밭’(1890)
1890년 5월 빈센트 반 고흐는 파리 북쪽의 오베르로 간다. 강렬한 햇살이 주변을 감싸는 아를이나 생 레미 같은 남프랑스의 정경과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변화무쌍한 날씨 속에서 빈센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별이 빛나는 밤’(1889)
악화되는 정신병으로 빈센트 반 고흐는 아를 근처의 생 레미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1여 년 치료를 받았다. 다행히 이곳에서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빈센트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풍경을 재현하지 않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1호 2022년 4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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