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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ENSEMBLE] <아이다> 지새롬, 꿋꿋이 지켜온 세계 [No.213]

글 |안세영 사진 |맹민화 2022-09-28 2,469

<아이다> 지새롬
꿋꿋이 지켜온 세계

 

이집트와 누비아의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아이다>에서 주인공 라다메스와 아이다의 사랑 못지않게 감동을 주는 것은 이집트에 맞서 조국을 지키려 애쓰는 누비아 노예들의 모습이다. 그 가운데 지난 10년간 한결같이 <아이다>의 무대를 지켜온 앙상블 지새롬이 있다. 2012년부터 네 번의 시즌을 <아이다>와 함께한 그는 공연 내내 소화하는 많은 역할 중에서도 특히 아이다의 친구 네헤브카 역으로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다.

 

 

뮤지컬배우를 꿈꾸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어릴 때부터 친오빠를 따라 성악을 배웠다가 변성기가 오면서 그만뒀어요.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지만 성악은 제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한동안 갈피를 잡지 못했죠. 당시 저희 가족은 통영에 살고 있었는데, 그곳에선 뮤지컬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어요.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통영소극장축제에서 <그리스>와 영화 <친구>를 섞어놓은 듯한 창작뮤지컬을 본 거예요. 뮤지컬이 이런 거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웃음) 그때부터 뮤지컬학과 진학을 준비하면서 꿈을 키웠어요.

 

<아이다>와는 어떻게 처음 인연을 맺었나요?
2010년 <삼총사>로 데뷔하고 두 번째로 만난 작품이 2012년 <아이다>예요. <아이다>의 한 장면을 학교에서 공연한 적이 있기 때문에 오디션을 보기 전부터 어떤 작품인지 잘 알고 있었죠. 사실 처음에는 춤에 자신 없는 제가 감히 넘보지 못할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오디션 지원서 접수 마감일을 코앞에 두고 꿈에서 계시를 받은 거예요. 당장 <아이다> 오디션 지원서를 넣으라고요. (웃음) 그래서 눈뜨자마자 지원서를 썼고, 제 노래 실력을 좋게 봐주신 덕분에 합격할 수 있었죠. 주연 커버 오디션까지 7~8번에 걸쳐 오디션을 봤던 기억이 나요.

 

이번 시즌 네 번째로 <아이다>에 참여하고 있는데, 공연 때마다 매번 다시 오디션을 보나요?
네, 정식으로 오디션을 통과해야 해요. 여자 앙상블은 1차 오디션에서 기본 과제로 연회에서 세 명의 무희가 추는 춤, 일명 ‘East Indian Dance’를 춰요. 사실 저를 포함해 ‘My Strongest Suit’ 런웨이 장면에 출연하는 앙상블 다섯 명은 이어지는 연회 장면에서 무희로 등장하지 않거든요. 공연 때는 나와 상관없는 춤인데, 오디션에 통과하려면 무조건 이 춤을 춰야 한다는 게 매번 힘들어요. 워낙 뛰어난 테크닉을 요하는 춤이라 죽어라 열심히 해야 통과할 수 있어요. (웃음)

 

계속해서 다시 출연하게 만드는 <아이다>만의 매력은 뭐라고 생각해요?
솔직히 앙상블에게 <아이다>만큼 고된 작품도 드물 거예요. 노래와 춤이 격정적인 데다 어떤 장면에서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10초 만에 퀵체인지를 해야 하거든요. 특히 1막 백스테이지는 전쟁터예요. 남루한 누비아인 노예가 페이스 페인팅 물감을 칠하고 입술에 두꺼운 글리터를 발라 ‘My Strongest Suit’ 장면에 등장하는 시녀로 변신해야 하죠. 그 장면이 끝나면 클렌징 티슈로 분장을 지우고 연회장 의상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무대로 나가요. 그 다음 엉망이 된 분장을 수정하고 다시 누비아인 노예가 되어 ‘Dance of the Robe’를 부르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앙상블 모두 “이 작품은 이번이 마지막이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요. 그런데 다음 시즌 <아이다> 오디션장에 가면 그렇게 말한 배우들이 다 모여 있어요. (웃음) 정신없이 바쁜 만큼 다른 생각을 할 틈 없이 온전히 공연에 몰두할 수 있다는 게 이 작품의 매력이에요.

 

안무 스타일도 장면에 따라 다르더라고요. 춤사위만 봐도 인물의 감정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요.
<아이다>는 사소한 몸동작 하나하나에도 다 이유가 있어요. ‘My Strongest Suit’ 장면에서는 기본적으로 가슴을 들어 올리고 도도하게 움직여야 해요. 반면 누비아인 노예들이 춤추는 장면에서는 호흡을 바닥으로 가라앉혀야 하죠. 누비아인의 춤은 아프리카 전통 춤에서 영향을 받았는데, 가슴에 물을 뿌리는 듯한 동작은 땅의 기운을 받는 걸 의미하고, 손을 들어 올리는 동작은 하늘의 기운을 받는 걸 의미해요. 누비아의 자연과 신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마음이 담겨있는 거죠. 시녀들이 암네리스에게 결혼식 예복을 입혀줄 때도 엄숙한 동작을 통해 암네리스가 이집트 공주로서 짊어져야 할 숙명의 무게를 표현해요.

 

특히 소화하기 어려운 장면을 꼽는다면 무엇인가요?
제일 무서운 장면은 ‘My Strongest Suit’예요. 암네리스와 더불어 다섯 명의 앙상블이 각양각색의 의상과 춤을 선보이는 장면이죠. 이 장면에서 제가 입는 실버 드레스는 치마 안에 나무틀을 넣어 각진 모양을 만들기 때문에 입은 채로 움직이기가 쉽지 않아요. 거기에 시야를 가리는 커다란 모자를 쓰고 10cm가 넘는 통굽 구두를 신은 채 무대에 서면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 같아요. 그런데 그 상태로 패션쇼 런웨이에 선 것처럼 모델 워킹을 해야 하는 거예요! 빠른 비트에 맞춰 동작도 재빨리 취해야 하고요.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실수하기 쉬운 장면이에요.

 

그럼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뭐예요?
‘The Gods Love Nubia’를 꼽고 싶어요. 세트 하나 없이 넓은 무대를 아이다와 앙상블의 에너지만으로 꽉 채우는 장면이잖아요. 노래가 시작되면 다 함께 험난한 여정에 나서는 기분이에요. 곡의 길이가 상당히 긴데다 그 안에 물러서지 않고 이집트에 맞서 싸우겠다는 마음부터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여러 감정을 담아내야 하거든요. 노래를 다 부르고 나면 마음속 울분을 모두 토해낸 것처럼 카타르시스가 느껴져요.

 

새롬 씨는 ‘Dance of the Robe’ 장면에서 누비아인 노예 네헤브카 역할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잖아요. 네헤브카를 연기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뭔가요?
이번 시즌에 와서 네헤브카를 표현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어요. 이전까지는 아이다에게 누더기 예복을 바치며 새 삶을 달라고 노래할 때 간절함을 담아 호소했어요. 그런데 이번에 연출가 트레이시에게 받은 디렉션은 “네헤브카는 아이다와 가까운 친구로서 누구보다 강단 있게 그에게 지도자의 의무를 요구해야 한다”라는 거였어요. “네가 해야만 해” 같은 느낌으로요. 감정을 절제하는 데 중점을 뒀죠. 네헤브카의 강인함에 집중한다면 나중에 그가 아이다 대신 자신을 희생하는 장면도 더 설득력 있게 그려낼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2012년과 2016년 암네리스 역 커버를, 2019년과 올해는 아이다 역 커버를 맡기도 했죠. 두 역할의 커버를 모두 맡아본 소감은 어땠나요?
처음 암네리스 역 커버를 맡았을 때 소감은… 독이 든 성배를 받은 기분? (웃음) 물론 감사했지만 한편으론 두려웠어요. 비상사태가 생기면 언제든 주연 배우를 대신해 투입될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해야 하잖아요. 그날부터 음역대를 넓히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죠. 지난 시즌부터는 아이다 역 커버를 맡고 있는데, 통통 튀는 암네리스보다는 억센 아이다가 제 성격과 잘 맞더라고요. 물론 어느 쪽이나 쉽지 않았지만요. 어쨌든 두 역할을 다 경험해 볼 수 있다는 건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기회가 아니니까 뿌듯해요.

 

2019년 아이다 역 의상을 입고 ‘Dance of the Robe’와 ‘The Gods Love Nubia’ 커버 리허설을 한 영상이 신시컴퍼니 공식 유튜브 채널에 올라와 있더라고요.
다시 봐도 그 무대는 마법의 힘으로 해낸 것 같아요. 직전까지 엄청 긴장했는데 일단 스타트를 끊은 다음부터는 공연의 흐름에 저를 맡겼어요. 무엇보다 다른 앙상블의 눈빛 하나하나에 큰 힘을 받았어요. 같은 앙상블로서 그들이 어떤 마음으로 연기하는지 잘 아니까 그 눈을 보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복합적인 감정이 느껴지더라고요. 커버 리허설이니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다들 너무 열심히 임해줘서 감사했어요. 그때의 감동은 잊을 수 없어요.

 

지난 시즌 <아이다>에서 만나 결혼한 서재민 배우와 이번에도 함께 출연하잖아요. 무대 위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는 장면도 있나요?
극 중에서 마주치는 장면은 거의 없는데, 어쩌다 보니 이번 시즌에 2막 수용소에서 저를 잡아가는 역할을 남편이 맡게 됐어요. 다른 배우들이 남편이 부인 잡아간다고 어찌나 놀리는지. (웃음) 사실 재민 씨는 이번 <아이다>를 끝으로 무대에서 은퇴할 생각이에요. 발레를 전공해서 나이에 비해 오래 춤을 춰온 편이거든요. 저 또한 <아이다>를 마치면 2세 계획을 세우려고 해요. 그래서 저희 부부에게는 이번 공연이 더욱 뜻깊고 소중해요. 여담으로 앙상블 중에 이승일, 하유진 배우도 부부인데, 연출가 트레이시가 사랑이 넘치는 팀이라고 좋아하더라고요. (웃음)

 

이제 데뷔 13년 차 배우가 되었는데 그동안 슬럼프를 겪은 시기는 없었나요?
2012년 <아이다>를 공연하면서 목에 무리가 왔는데 그 뒤로도 쉬지 않고 여러 작품에 출연했어요. 그런데 저는 이미 <아이다>를 통해 무대에서 노래하는 행복을 알았기 때문에 앙상블의 비중이 적은 작품에서는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느껴지더라고요. 그 와중에 성대 결절까지 오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결국 수술을 하고 3개월 동안 회복기를 가졌어요. 그런 다음 2015년 <아리랑> 초연에 참여했는데, 당시 고선웅 연출님의 연기 지도를 통해 많은 가르침을 얻었어요. 다시금 무대 위에서 살아 숨 쉬는 느낌을 받았죠. <아리랑>은 포기하고 싶었던 저를 제자리로 돌아오게 해준 작품이에요.

 

지난해에는 <멸화군>에서 연화 역을 맡아 처음으로 소극장 무대에 섰는데, 어떤 점이 새로웠나요?
처음 소극장 무대에 섰을 때는 깜짝 놀랐어요. 객석이 이렇게 가깝다니! 첫 공연과 마지막 공연 때는 극장이 거의 꽉 찼는데 중압감이 다르더라고요. 그런데 연기할 때는 오히려 힘을 뺄 수 있었어요. 앙상블일 때는 무대에 등장하는 잠깐의 시간 동안 내 모든 역량을 쏟아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거든요. 반면 <멸화군>의 연화는 제 얘기를 풀어낼 수 있는 장면이 많았기 때문에 더 여유를 갖고 연기할 수 있었어요. 아버지의 역모로 급수비가 된 연화 역할이 제가 가진 정서와 잘 어울린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요. 제 별명이 ‘한 많은 배우’거든요. (웃음)

 

그러고 보니 <서편제> <아리랑> <명성황후> <영웅> 등 한국적인 정서를 지닌 작품과도 인연이 많았죠. 혹시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은 역할이 있나요?
제가 연기한 <명성황후>의 김상궁과 <아이다>의 네헤브카는 모두 조국을 위해 누군가를 대신해 죽는 역할이에요. 아마도 저에게 강인한 이미지가 있기 때문에 그런 역할에 계속 캐스팅되는 거겠죠? 그런 점에서 <영웅>의 설희 역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 명성황후를 모시던 궁녀로서 꿋꿋하게 독립운동을 해나가는 모습이 매력적이고 저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앞으로 무대에서 어떤 꿈을 이뤄나가고 싶으세요?
이제 주인공이 되고 싶다는 욕심은 내려놨어요. 그보다는 나를 꼭 필요로 하는 무대에서 대사 한마디를 해도 빛이 나는 신스틸러가 되고 싶어요. 더불어 함께하는 배우, 스태프들에게 긍정적인 힘을 주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제가 앙상블로 활동하며 느낀 건, 앙상블 중에 숨은 보석 같은 배우들이 정말 많다는 거예요. 그들이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무대가 많아지길 바라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13호 2022년 6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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