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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인터뷰] <봄날> 오현경 - 봄볕처럼 찬란한 꿈이 있다 [No.91]

글 |김영주 사진 |이맹호 장소협찬 | 홈스테드 대학로(02-744-3369) 2011-04-11 5,872

에서 미워할 수 없는 중간 관리자였던 만년 과장 이장수의 페이소스, 그리고 <혈의 누>에서 숨통을 죄어오는 전근대의 화신 김치성 대감의 서슬 퍼런 위세를 어딘 가에 숨겨놓았을 노배우는 어떤 청년에게도 뒤지지 않을 푸르른 열정으로 무대에 대한 꿈을 말했다. 한 생만큼 긴 시간도, 연이은 대수술도 오현경이라는 배우에게서 연극에 대한 사랑을 빼앗거나 빛바래게 할 수는 없었다. 그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긴 대화를 옮긴다.

 

2년 만의 재공연에 합류할 만큼 <봄날>의 어떤 점을 좋아하세요?
대중의 환심을 사야하는 거, 그게 대중 예술인데 연극은 작품에  따라서 대중 예술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요. 그리고 진짜 잘된 작품이라는 건 대중에게 아첨하지 않으면서 한 시대가 끝난 후에도 계속 이야기하고 끌어낼 거리가 있는 것인데, <봄날>은 그런 의미에서 참 괜찮은 작품이라고 봐요. 이 <봄날>의 아버지는 군사 독재 시절의 권력자처럼 아들들을 학대하는 사람이에요. 일반적으로 부모라면 부족한 점이 있는 자식에게 더 마음이 쓰이고 보듬어주기 마련인데 이 사람은 그런 모자란 자식들은 자기에게 도움이 안 되니까 대놓고 쓸모없는 놈이라고 구박만 할 정도거든요. 그렇게 자식들을 착취하면서 이게 다 잘되면 그때 너희에게 나눠주겠다고 큰소리를 치는데 민중들이 그런 것처럼 아들들도 아버지를 믿지 못하죠. 그 밑에서 저항을 하는 아들도 있고, 순종하는 아들도 있고, 그렇다 보니 <봄날>을 정치적인 내용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딱 그렇게 좁게 생각할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좀 더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면에서 우리네 삶을 보여주는 연극이죠.


<베니스의 상인>의 샤일록처럼, <봄날>의 아버지도 일차원적인 악당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작품이 무대에 오르기 전에는 희곡이라는 장르의 문학이에요. 그 문학이 배우로 인해 무대에서 재창조 되었을 때 비로소 연극이 되는데, 나는 연극을 하는 사람이고 그중에서도 배우란 말이죠. 작품을 끌고 가는 연출이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에 따라서 많은 게 달라지지만, 같은 해석이라고 해도 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극 중 인물의 체취가 완전히 달라지기 마련이에요. <봄날>의 아버지는 정말 말도 안되는 독재자인데, 내 입으로 말하기가 뭣하지만(웃음) 내가 연기를 하는 아버지는 그렇게 밉지가 않아요. 그게 배우의 체취라는 거예요.
예술과 다큐멘터리가 무엇이 다른가. 진짜처럼 자연스럽게 연기를 하라는 이야기를 많이들 하잖아요. 물론 자연스러워야 하지. 하지만 무대에서 형상화되는 예술을 할 때는, 좀 어폐가 있는 표현일지 몰라도 모든 것이 다 아름다워야 해요. 그게 예술의 매력이죠. 진짜로 구역질나는 악당 역할을 했다고 해서 딱 그런 모습만 표현한다고 하면 그건 다큐멘터리지, 예술이 아니라고. 관객이 어떤 것을 느낄 수 있게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연기이지, 진짜 악당을 데려다가 들이대는 게 연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극 중에서 슬프면 슬픈 척하고 기쁘면 기쁜 척해서 관객이 슬프고 기쁘게 하는 것이 배우의 역할이에요. 배우는 다음 진행을 다 알고 있어야 하고 넋을 놓고 몰입을 하면 안 돼요. 그런 몰입은 연습 때 하고, 무대에서 공연을 할 때는 레코드판을 틀어놓은 것처럼 할 수 있어야 해요. 젊을수록 열기에 취해서 재주만 가지고 밀어붙이기가 쉬운데, 그림도 데생을 배우고 구상화를 그린 후에 추상화를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연기도 발성이나 작품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는 게 먼저예요. 그 전에 덮어놓고 에너지만 가지고 덤비다보면 그 연기에 내용이 없어집니다. 예술적인 감각이나 재주는 기본적인 소양을 쌓은 다음에야 제대로 소용이 있는 거죠.


평생 배우로 살아오셨는데요, 연극과 인연이 닿게 된 첫 경험이 궁금합니다.
6.25때 피난을 가서 시골에서 1년을 지냈는데 제대로 공부를 못해서 환도를 한 후에 원래 학년으로 복학을 했어요. 그런데 전쟁통에 다들 어수선할 때라 나만 자원해서 유급을 하고 친구들은 다들 그대로 진급을 한 거죠. 졸지에 친구들이 없어진 거지. 내가 서울고등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교장선생님이 경기고를 앞지르겠다고 공부를 무시무시하게 시켰어요. 그러다보니 내가 이 학창 시절을 너무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 같아서 뭘 해봐야 할까 고민을 하게 됐어요. 우리가 어릴 때는 대처에 나가서 공부를 하는 형들이 방학 때 고향에 돌아와서 가설무대를 만들어놓고 연극을 했는데, 내가 그 앞에 턱 괴고 앉아서 보는 걸 참 좋아했어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연극 구경 다니는 걸 좋아해서 그럼 연극반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고2 때 친구 서넛과 함께 교장선생님을 찾아가서 허락을 받았죠. 대학도 오화섭 교수님이 연희극회를 만들어서 지도를 하신다는 말을 듣고 그럼 거기 가서 연극을 해야겠다 싶어서 연세대 국문과를 가게 됐어요. 그 후에는 내가 어떻게 졸업을 했나 싶을 정도로 수업은 내팽개치고 연극만 했어요.(웃음) 유진 오닐이나 테네시 윌리엄스 같은 근대 미국 작가들 작품을 많이 했는데 방학 때는 우리끼리 인형까지 직접 만들어서 남사당이 하던 꼭두각시 인형극을 했는데 근처에 있는 이화여대, 서강대를 돌면서 순회공연까지 할만큼 아주 인기가 많았지. 대학 다니는 동안 얼마나 연극만 했던지 시간이 없어 그 흔한 데이트도 한번 못해 봤어요.


직업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한 건 언제셨어요?
서울고 연극부를 만들었을 때, 친구와 함께 유치진 선생님을 찾아뵌 일이 있어요. 그때 한창 유행하는 배지를 만들고 싶은데 연극을 상징하는 게 뭐가 있을까 여쭤보려고 갔더니 글쎄 이 양반이 우리를 넋을 놓고 보다가 하신다는 말씀이 ‘내가 너희들 유학도 보내주고 뒷바라지를 다 해줄 테니까 제발 연극 좀 해다오’라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연극을 한다는 애들 중에 좀 똘똘하다고 할 만한 이들이 적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소위 명문고라는 학교에서 애들이 연극을 한다고 하니까, 요놈들을 잡고 제대로 교육을 시켜서 연극계에 내보내고 싶다는 욕심이 나셨던 거였는데 우리는 놀라서 ‘저희는 그냥 취미로 하는 거예요’라고 사양을 했죠. 그때만 해도 그렇게 생각을 했는데 대학을 졸업할 때쯤 이제 고민을 하게 됐죠. 당시 양대 극단으로 국립극단과 실험극단이 있었는데 분위기가 좀 달랐어요. 대학극 출신들이 모인 쪽이 실험극단이었는데 학교를 졸업한 후에 같이 창단을 하자는 제의를 받았을 때도 난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고 사양을 하고 1년쯤 고민을 했는데 연극이 아른거려서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요.

 


서울고 연극반을 시작한 이후로는 딱 1년 공백이 있으셨군요. 1년 만에 무대로 돌아오신 후에는 행복하셨습니까?
그럼요. 물론 중간에 아픔이 없지는 않았어요. 연극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음악이나 문학과 다르죠. 설사 모노드라마를 하더라도 혼자 하는 게 아니야. 조명도 있어야 하고 연출도 있어야 하고,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배우 혼자서는 절대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내 성격상 사회의 여러 사람과 어울리는 걸 잘 못하다 보니 배우로서 좀 늦게 풀리게 됐죠.


저도 그렇지만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게 의 만년 과장 이장수의 모습으로 남아있습니다. 그 작품으로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도 받으셨고요.
TV에서 내가 히트작이 많아요. 늙은 사람이 자화자찬을 해서 좀 그렇지만 원래 늙으면 자화자찬을 하게 돼 있지.(일동 웃음) TV 드라마로 작품 편수는 많지 않은데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손자병법>은 코믹 터치여서 그렇지 그 내용은 오히려 슬픈 이야기가 많았어요. 참 페이소스가 있었어요. 그 과장이 왜 인기를 끌었냐면 중간 간부 아니에요. 상사들한테 깨지고 나서는 부하 직원들 앞에서는 ‘짜식들이 말야’ 하면서 큰소리도 치고, 나이 든 아내 손을 붙잡고 자식들도 다 크니까 같이 놀러 가자고 해도 그냥 돈으로 달라고 한다고 이제 우리밖에 안 남았다고 서글퍼하는 그런 모습에 많이들 공감을 했죠. ‘도시의 <전원일기>’라는 이야기를 들은 작품이었는데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이야기가 하나 있어요. 회식 자리에서 건방진 후배한테 ‘거 선배님들은 그동안 뭘 하셨어요?’라는 비아냥을 듣고 과장이 벌컥 해서 ‘뭐라고? 선배가 뭘 했냐니. 너희들이 이렇게 자유분방하게 선배한테 말할 수 있고 이렇게 호화롭게 맥주 마실 수 있게 했다. 그러느라고 우리는 모래판에서 씨름해서 고국에 돈 부치면서 살았다. 선배들이 능력이 없다고 하는 말까지는 참겠다. 너희들이 똑똑하니까. 그런데 뭘 했느냐는 소리는 하지 마라. 너희들이 지금 이렇게 누릴 수 있도록 해온 게 우리 아니냔 말이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계산을 하려는데 후배들이 말리니까 ‘마, 아직은 내가 해. 내가 아직은 너희들보다 월급도 많이 받아.’이러면서 딱 걸어 나가죠. 부축하려는 후배를 자긴 멀쩡하다고 뿌리치고 씩씩하게 밤거리를 걸어가는데 그 당시 사람들이 많이들 울면서 봤다고 그러더라고요.


연기를 하는 기쁨이 그런 순간에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순수하게 작품 안에서 어떤 연기를 해냈다는 성취감도 있겠지만 연기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을 때의 기쁨이 참 클 듯합니다.
아 당연하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물론 자기만족으로 하는 것도 있죠. 그런데 그 자기만족이라는 게 뭐냐면 자기 이익을 챙길 때의 기쁨이라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줬을 때의 만족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후배들한테도 늘 하는 말이 있어요. 배우에게 주어지는 여건이라는 건 언제나 부족하기 마련이에요. 대개 우리 현실이라는 게 그래요. 그런데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환경이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그 여건하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본인이 생각할 수 있을 때, 그 어두컴컴한 객석 안에서 누군가인지는 모를 한 사람과 내가 진정한 감정의 교류를 했다고 확신할 수 있을 때, 그럴 때 비로소 ‘나는 배우다’라고 프라이드를 가질 수 있는 거라고.


저는 객석에 앉아서 보는 사람이니까, 공연을 보다보면 진심으로 연기를 하면 관객에게 전해진다는 경험을 알지만, 그렇게 관객이 느끼는 감정이 다시 배우에게도 전해지는지 궁금합니다.
그럼요. 우리의 모든 연기는 상대 배우와 하는 게 아니에요. 배우가 배우를 보고 연기를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관객을 통해서 연기를 하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냐면, 무대에서 우리가 대화를 하는 것이 우리의 대화가 아니라 관객에게 들려줘야 하는 대화인 거에요. 우리가 속삭일 때 정말 우리끼리 알아듣게 소곤거리면 되는 게 아니라, 관객들이 그 속삭임을 이해할 수 있게 그들을 통해서 전달해야 하는 거예요. 연극의 4대 요소가 희곡과 무대와 관객과 배우잖아요. 연극이라는 건 그야말로 관객과 배우의 소통인 거예요.


그런데 배우 입장에서 희곡이나 극장과 달리 관객들의 분위기나 수준은 날마다 천차만별이라는 점에서 참 어려운 상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관객의 수준이 높을수록 배우는 긴장을 하고 더 좋은 연기를 할 수 있도록 집중을 할 수 있어요. 그게 사실이죠. 그렇지만 아무리 산만한 관객들이 앞에 있다고 해도, 그 속에 있을지도 모르는 단 한 사람의 진지한 관객을 위해서 배우는 최선을 다해야 해요. 난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어요. 예전에 했던 연극 중에 좀 야한 장면이 있다고 소문이 나서 그런 쪽으로 기대를 하는 관객들이 몰린 공연이 있었는데, 자연히 객석 분위기가 썩 좋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어떤 장면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연기가 있었는데 이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 대충 어떻다는 생각을 해보니까 그 관객들은 영 이해를 못할 것 같았단 말이죠. 나도 모르게 관객들을 좀 무시했던 셈이죠. 그런데 그렇게 공연을 마치고 났는데, 이어령 선생이 찾아온 거예요. ‘아이고 연극 아주 잘 봤어요’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난 죄지은 게 있으니까 가슴이 철렁했지. 헌데 그분이 ‘그런데 내가 볼 때는 아까 그 장면에서 그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했으면 어떨까 싶어’라고 말씀을 하는데 정말 깜짝 놀랐어요. 바로 내가 고민했던 딱 그 장면을 이야기하시는데 내가 미치겠더라고. 그게 배우의 양심이고 자존심인 거예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마음으로 그때 나 자신과 약속을 했어요. ‘다시는 관객을 무시하지 않겠습니다. 이해를 하든 말든 미리 판단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그게 참 어려워요.


평생 상업 광고를 찍지 않으셨던 배경이 궁금합니다.
아버지가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제법 넉넉한 집에서 자랐으니 돈을 몰랐던 거죠.(웃음) 내가 상아탑 속에서 연극을 배우고 예술을 하겠다고 이 길을 선택을 했는데, 방송을 하게 됐단 말이죠. KBS만 있을 때는 사실 잘 몰랐는데 2년 후에 상업 방송이 생기고 광고가 나가기 시작하는 걸 보면서 ‘야, 이러다가 내가 이런 쪽으로 타락해서 이상해지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불쑥 생기더라고. 대중 예술 쪽으로 왔다고 해도 나는 연극을 계속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면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초심을 붙잡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내 얼굴을 상품으로 파는 건 안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그 약속을 50년 가까이 지키고 있는 거예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깝지 않느냐고 묻기도 하는데, 아쉽다는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니에요. 내 연기 노하우를 후배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 만들었던 연기 스튜디오를 무보수로 운영하다가 1억 정도 손해를 보고 3년 만에 문을 닫았을 때는 그런 생각도 했죠. 그런데 지금까지 지켜온 약속이니까 이제 와서 팔자를 고칠 일도 없고 하던 대로 계속하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거죠.(웃음)

 


배우라는 이름에 대해 자긍심을 가지고 그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여관에 가면 간단한 신상 정보를 써야했어요. 마흔이 될 때까지도 직업이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배우라는 말이 감히 나오지를 않아서, 그때 방송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냥 방송인이라고 썼어요. 마흔을 넘기고 생각을 해보니 내 위로 선배가 몇 분 안 계시더라고. 연극은 우리말과 우리 몸짓으로 하는 거니까, 로렌스 올리비에가 와도 못하는 거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이제는 나도 당당하게 우리나라의 배우라고 말해도 되는 거구나 싶었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학교만 갓 졸업하고도 자기가 배우라는 이야기를 쉽게 하는 것 같아서 참 다르다 싶은데 좋게 생각해 보면 배우이고 싶은 마음이겠거니 하죠.


긴 세월 무대에 서면서 연극의 주 관객층과 그들의 성향이 바뀌는 것을 느끼셨습니까?
우리가 젊어서 연극을 할 때는 관객들이 보통 이화여대생들이었어요. 우리나라 연극에 큰 공로를 세운 영문학 교수님들이 계시는데, 연세대 오화섭 교수, 고려대 여석기 교수, 이대의 김갑순 선생님, 이분들이 연극과 관련된 과제를 계속 내시니까 대학생들이 계속 공연을 보러 오는 거예요. 그 덕분에 우리가 먹고 살았지.(웃음) 그런데 그 학생들이 결혼하고 아기 낳고 나서도 계속 연극을 보러 오느냐 하면 안 그렇다고요.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그게 사는 게 바빠서가 아니라, 우리 연극이 퇴보를 해서 그래요. 이 동숭동도 너무 많은 소극장이 있어요. 소극장이 많아서 바람직한 것은 연극으로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다는 건데 이런 실험을 너무 엉터리로, 기초도 없이 막 하면서 티켓 값은 또 멀쩡한 공연만큼 받으니까 한두 번 실망한 관객들은 점점 발길을 끊게 되는 거예요. 이건 너무너무 분한 노릇이에요.


무대에서 어떤 일을 더 하고 싶다는 꿈이 있으세요?
있어요. 어떤 작품이나 배역을 하고 싶다는 건 아니에요. 연극계에 내 선배가 장민호 선생님, 백성희 선생님 두 분밖에 안 계세요. 며칠 전에 두 분 나오시는 <3월의 눈>을 봤는데 사실 나는 인사차 갔어요. 나도 늙었지만 더 연세가 있으신 노인 분들이니까 잠깐 나오시겠거니 했는데 진짜 깜짝 놀랐어요. 난 정말 쇼크를 받았다고. 야, 저걸 다 어떻게 하실까, 배우로서 참 존경스럽다, 나도 저 나이에 저럴 수 있을까 생각을 했어요. 난 벌써 은퇴할 생각을 하는데. 물론 이어령 선생 말씀대로 배우에게는 은퇴랄 게 없어요. 그냥 죽을 때까지 하는 거지. 소리 나는 데까지. 여튼 내가 수술 받고 다시 깨어났을 때 생각했던 게 정말로 사람들의 뇌리에 남을 수 있는 작품 딱 두 편만, 한 편은 너무 아쉬우니까 두 편만 더 했으면 좋겠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그 후로 두 작품 이상을 했어.(웃음) 그게 다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 <봄날>은 내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죠. 그런데 마지막으로 뭐를 보여주고 싶으냐 하면, 요즘은 리얼리즘 연극이라는 게 좀 부족해요. 단적으로 말하면 잘 모르는 것 같아. 100석도 안 되는 소극장에서 자연스럽게만 하면 리얼리즘 연극인가, 뭐 그런 것도 나름 리얼리즘이기도 하겠지. 그런데 무대 위의 사실이라는 건 우리 일상의 사실과는 다른 거예요. 근본적인 것이 다르다는 게 아니라, 아까도 이야기를 했지만 관객을 통해서 사실적으로 전해져야 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다고. 게다가 큰 무대에서 연기를 할 때는 발성도 있어야 하는데 그러면서 사실적으로 들리기 위해서는 정말 고도의 기술이 필요해요. 그걸 후배들한테 한번 보여주고 끝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어요. 창작극이 있으면 더 좋고, 안되면 인간의 바탕에 있는 고유의 정서를 그려낸 번역극으로라도 그런 공연을 하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91호 2011년 4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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