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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ZOOM IN] <신의 손가락> 안데르센 동화 같은 삶 혹은 동화를 만들어낸 삶 [No.225]

글 |김주연(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 2023-07-04 985

 

 

유년 시절 우리의 감성과 상상력을 사로잡으며 이야기의 세계로 끌어준 동화 중 대다수는 덴마크의 동화 작가 안데르센의 작품이다. 평생 130여 편의 동화를 쓴 안데르센은 다채로운 이야기만큼이나 흥미롭고 극적인 삶으로 유명하다. 가난한 제화공의 아들에서 전 유럽을 대표하는 작가가 되기까지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 여정을 살짝 들여다본다.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의 주인공

 

1844년 안데르센은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25년 전에 나는 작은 짐 꾸러미를 하나 들고 코펜하겐에 왔다. 그때 나는 가난한 이방인 소년이었다. 그런데 오늘 나는 식탁에서 왕과 여왕을 마주하고 앉아 함께 코코아를 마신다.” 이 짧은 문장에서 알 수 있듯 안데르센의 삶은 그 자체로 한 편의 낭만적인 성공 스토리다. 안데르센은 1805년 덴마크의 작은 마을 오덴세에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11살 때 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던 다정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마음 둘 곳을 잃고 방황하던 안데르센을 사로잡은 것은 연극과 극장이었다. 순회공연을 온 극단의 화려한 무대와 박수갈채에 깊이 매혹된 안데르센은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코펜하겐을 향해 떠났다. 무일푼으로 코펜하겐에 도착한 안데르센은 뭐든지 시켜달라며 극장을 찾아가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것은 차갑고 엄중한 현실이었다. 배우를 하기에는 볼품없다는 평가를 받았고, 노래를 부르려 하자 변성기가 찾아왔으며, 무용수가 되고자 했으나 팔다리에 힘이 없고 재능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다. 모든 꿈이 산산이 부서졌지만 평생 자신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준 콜린 가문과 인연이 닿아 삶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됐다.

 

안데르센이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아본 코펜하겐 왕립 극단 감독 요나스 콜린은 그를 학교에 보냈고, 졸업 후에는 대학 진학도 도와주었다. 이때부터 안데르센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배우나 가수가 아닌 작가를 꿈꾸게 되었다. 안데르센은 극작가로 성공하길 바랐지만, 오히려 소설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특히 1835년 발표한 자전적 소설 『즉흥시인』은 그의 출세작이자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같은 해 첫 번째 동화집을 선보이며 동화 작가로 등단한 안데르센은 거의 해마다 크리스마스에 맞추어 새로운 동화집을 발표했고, 유럽에서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안데르센의 동화집을 주고받는 것이 하나의 유행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평생 130여 편의 동화를 발표하며 자타 공인 ‘동화의 왕’으로 우뚝 선 안데르센은 결혼하지 않은 채 생의 대부분을 창작과 여행으로 보냈다. 나이가 들어 건강이 악화된 후에는 요양 생활을 하다가 1875년 조용히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장례식은 덴마크 정부가 국장으로 치르는 가운데 수많은 애도객이 몰려 외로웠던 작가의 마지막 길을 성대하게 장식해 주었다.

 

 

수많은 인연 속에서도 고독했던 삶

 

안데르센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지만 유럽 각국의 문인과 예술가, 귀족과 왕족에 이르기까지 사교계 인사들과 다양하게 교류했다. 그중에는 찰스 디킨스, 빅토르 위고, 하이네와 리스트 등 당대 유럽을 대표하는 인물도 포함되어 있었다. 수많은 인사와 친분을 이어갔으나 그의 개인적인 삶은 매우 외롭고 고독했다. 안데르센의 자서전에는 평생 아름답고 헌신적인 관계를 꿈꾸었으나 늘 이루지 못한 사랑과 실연으로 괴로워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사춘기 시절부터 안데르센은 여러 여성(때로는 남성)에 대해 사모와 애정의 감정을 느꼈으나, 대부분은 좋은 친구나 동료, 지인으로 남기를 원했다. 이로 인해 안데르센은 끊임없이 상처받고 절망해야 했다. 하지만 이들과의 인연은 어떤 식으로든 안데르센의 창작에 깊은 영향과 영감을 주었다. 특히 안데르센의 첫사랑인 리보르그 보이트, 평생 각별한 사이를 유지했던 스웨덴의 성악가 예니 린드, 그리고 자신의 후원자인 콜린가의 아들 에드바르는 그의 삶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나이팅게일』은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유명했던 오페라 가수 예니 린드를 생각하며 쓴 글이라고 알려져 있다. 안데르센이 사랑했던 이들과 그의 작품 간의 긴밀한 관계는 그의 자서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안데르센은 평생 세 번에 걸쳐 자서전을 썼는데 그 덕분에 많은 독자가 그의 작품에 얽힌 다양한 맥락과 배경, 영감을 준 사건이나 장소, 인물의 관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를 무대 삼은 작가

 

안데르센은 평생 세계를 돌아다닌 여행가의 삶을 산 것으로도 유명하다. 첫사랑에 실패한 안데르센은 독일에서 실연의 아픔을 치유했고, 생의 절반을 유럽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살았다. 그가 가장 자주 찾았던 나라는 독일과 이탈리아였으나 때로는 발칸과 그리스, 콘스탄티노플 등 당시 유럽 사람들이 잘 찾지 않은 미지의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안데르센이 살았던 19세기에 여행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언제 어디서 강도를 만날지 몰랐고, 마차 사고나 배의 난파, 그리고 콜레라를 비롯한 전염병까지 숱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안데르센도 여행 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걱정으로 잠 못 이루었지만, 일상의 권태와 고통에 유달리 예민했던 그에게 여행은 삶의 위안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여행은 최고의 스승이자 정신을 다시 젊어지게 만드는 샘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국적인 풍광과 다채로운 삶의 모습은 안데르센의 오감과 정신을 자극했고,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는 왕성한 창작욕으로 새로운 작품을 써 내려갔다. “나의 무대는 온 세상입니다”라는 안데르센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마음은 언제나 먼 곳에 대한 동경과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이러한 끝없는 호기심과 열정이야말로 그가 다채로운 인물과 이야기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할 것이다. 또한 세계를 무대로 이야기를 펼쳐낸 그의 상상력은 덴마크를 대표하는 작가를 넘어, 누구나 공감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작가로 만드는 데도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 『안데르센 평전』, 재키 울슐라거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5호 2023년 6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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