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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BIOGRAPHY] 거침없는 붓질처럼 살다 간 기인 - <칠칠> 최북 [No.228]

글 |김주연(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 2023-10-17 1,461

 


모든 기인이 다 예술가는 아니지만, 예술가 중에는 유독 기인들이 많다. 조선 후기에 활동했던 화가 최북 역시 조선 미술사에서 기인 중의 기인으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그를 따라다닌 수많은 호와 별명만큼이나 다채로운 면모를 지녔으나 어느 하나의 이름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다 간 최북의 삶을 들여다본다. 
 

 

수많은 이름과 별칭들


최북의 본관은 무주이며 1712년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조선 숙종 때 태어나 영조 때 많은 활약을 펼쳤던 최북의 인생은 그 자체로 드라마틱하거나 격동적인 사건으로 점철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지만 그는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으로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간 예술가다. 최북에게는 유난히 이름과 별칭, 별명과 호가 많다. 원래 이름은 최식埴인데 어느 날부터 그는 자신의 이름 ‘식’자를 이루는 글자 중 두 획을 골라 스스로를 ‘최북北’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이마저도 두 개의 획으로 쪼개어 ‘최칠칠七七’이라 칭했다. 자신의 이름도 가장 핵심 획만 남긴 채 나머지는 다 버리고, 그나마도 더 잘게 쪼개어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듯 최북은 삶과 그림에 있어 핵심만을 중요시하는 인물이었고 그 외의 부가적인 격식이나 권위, 겉치레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예술가였다. 또한 스스로를 ‘칠칠’이라 칭하는 데서 그가 자신을 위대한 화가나 유명한 예술가가 아니라 그저 그림을 그리고 다니는 부족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본적으로 최북은 모든 껍데기와 허식, 허위를 싫어하고 본질에 가까운 삶을 살고자 했던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최칠칠 외에도 그에게는 메추라기 그림을 잘 그려서 붙여진 ‘최메추리’, 산수화를 잘 그려서 얻은 ‘최산수’, 양반들이 자신을 ‘거기’라고 부르는 것을 비꼬기 위해 지은 ‘거기재居其齋’ 등 다양한 명칭이 있었고 스스로 자신의 별칭을 만들어냈다. 그 어떤 이름에도 그가 속하거나 매이는 법은 없었으나 최북의 인생을 가장 잘 담아낸 이름을 굳이 고르자면 그의 호 중 하나인 ‘호생관毫生館’을 꼽아야 할 것이다. ‘붓 하나로 먹고사는 이’라는 의미의 이 이름처럼, 그는 평생 어떤 기관이나 어떤 양반 가문, 어떤 권위에도 기대지 않은 채 붓 하나로 세상을 누비며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다 가고자 했다. 당대 조선의 화가들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뉘었는데, 취미로 그림을 그린 사대부들과 도화원과 같은 관청 소속으로 그림을 그린 전문 화가들, 그리고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자기 힘으로 그림을 팔아 생활한 화가들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 등장한 이들 ‘프리랜서’ 화가들은 스스로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린 뒤 맘에 드는 이에게 팔거나 양반들의 주문을 받아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하곤 했는데, 안정적인 수입이 없다 보니 생활 자체가 들쑥날쑥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최북은 비록 불안정하더라도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 살아가는 ‘호생관’의 삶의 택했고 죽을 때까지 그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삶과 죽음


삼십 대부터 화가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최북은 산수화, 인물화, 영모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그가 그림을 팔려고 내놓을 때면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으며, 그의 유명세를 탐내어 ‘최칠칠’이란 필명을 사용하는 가짜 화가들도 있었다고 한다. 또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뒤에는 일본인들에게도 명성이 자자해서 그의 그림을 사러 오는 일본인도 있었다고 하니, 화가로서 그의 재능과 명성은 확고한 위치를 자리매김했던 것이 분명하다. 지금도 전해지는 그의 대표작 「표훈사도」 「한강조어도」 「추경산수도」 등에서 그의 거침없는 화필과 담대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재능과 별개로, 최북은 남다른 언행과 기행으로 더 유명세를 치렀다. 최북은 한평생 술을 끼고 살았고, 술값이 모자라면 집안의 가재도구는 물론이거니와 그림을 그릴 종이 두루마기까지 팔아 술을 마실 정도로 애주가였다. 또 여행을 좋아하여 조선 산수를 두루 섭렵하였는데 특히 금강산을 아끼고 사랑했다. 한 번은 금강산의 절경과 술에 흠뻑 취한 최북이 “명인은 명산에서 죽어야 한다”라며 갑자기 연못에 뛰어들었다가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한 적도 있었다. 그의 기행 중 클라이맥스는 바로 자기 눈을 찌른 사건이다. 어느 양반 가문에서 최북에게 그림을 요구하며 까다롭게 굴자 그는 단번에 이를 거절했고, 이에 분노한 양반이 그를 위협하자 “남이 내게 손대기 전에 내가 나를 손대겠다”라며 그 앞에서 자신의 눈 하나를 찔러버렸다. 이후로 애꾸눈 화가가 된 최북은 한쪽 눈에만 안경을 끼고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그의 꺾이지 않는 자존심과 무모하리만치 담대한 성격을 엿볼 수 있는 일화다. 

한평생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 그림을 그려 팔며 자유로운 인생을 살았던 최북은 화가로서의 명성과 인기에도 불구하고 말년까지 가난하고 궁핍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림을 판 돈이 들어와도 오는 족족 술값으로 나가버리니 재산이 모일 리가 만무했다. 어느 날 밤, 며칠을 굶다가 그림 한 점을 팔아 술을 사 마신 최북은 한양 시내 어느 눈구덩이에서 얼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시기에 대해서는 49세에 죽었다는 설도 있고 72세에 죽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어찌 되었건 한평생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술과 그림만으로 살다 간 기인 예술가의 삶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예나 지금이나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은 정신의 자유를 이야기하긴 쉽지만, 실제 삶에서 이를 실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어디에도 묶이지 않은 채 바람처럼 살다간 최북의 삶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예술가의 행보라 할 수 있다. 그의 괴짜 같은 삶과 기행보다 우리가 더 주목해야 할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참고 자료 『스스로 자기 눈을 찌른 기인 화가 최북』, 신현배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228호 2023년 9월호 게재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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