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피처 | [연출노트] <버지니아 울프> 일렁이는 물결을 따라

글 |홍승희(연출가) │ 정리: 이솔희 사진 |할리퀸크리에이션즈 2024-05-23 2,282

뮤지컬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에 활약한 영국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생에 ‘소설 속 세상에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의 이야기’라는 상상력을 더한 창작 뮤지컬이다. 본인이 창작한 소설 속 세계에 빠진 뒤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소설을 완성해야 하는 애들린 버지니아 스티븐, 애들린의 소설 속 인물로, 애들린을 만난 뒤 자신의 인생을 바꿀 기회를 꿈꾸는 조슈아 워렌 스미스 두 사람이 등장하는 2인극이다.  

 

<더 라스트맨>의 김지식 작가가 원안을, 권승연 작곡가가 대본 및 음악 작업을 담당했다. <레미제라블> <위키드> <오페라의 유령> 등 유명 뮤지컬의 국내 연출을 맡은 홍승희 연출가가 작품을 이끌었다. 이번 <버지니아 울프> 초연은 무대 세트를 적극 활용해 공간을 표현하고, 감각적인 조명 연출로 관객의 몰입을 돕는 것이 특징이다. 홍승희 연출가의 연출 노트를 함께 펼쳐 보자.

 

 

 

기억나네요. 처음 이 작품을 하기로 한 뒤 권승연 극작∙작곡가와의 첫 미팅이 새벽 3시까지 갔던 그날이. 작가님에게 만나자마자 물었습니다. “작가님은 왜 이 작품을 썼나요?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나요?” 작가님이 대답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의 문학 업적도 유명하지만, 항상 자살, 정신병 등의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오는데, 거기서 작가님은 그녀의 자살이 정신병 때문이 아닌 온전한 자기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요.

 

그녀의 전기를 다루거나 문학을 다룬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좋았어요. 뻔하지 않은 이야기라서. 그러나 그녀의 죽음, 그녀의 선택, 온전한 자신을 유지하다…. 처음에는 꽤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이 작품을 위해 그녀의 작품을 읽고, 조사하고 공부하다 보니 저 또한 버지니아 울프의 팬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이 작품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접하고 생각난 건 ‘물’과 ‘책’이었습니다. 책장이 넘어가는 것이 꼭 물결 같다고 느껴졌어요. 자신이 쓴 소설 속으로 빠진 한 여인. 그 사람은 다시 그 책(물결)을 타고 돌아갈 수 있을까? 그녀는 왜 여기로 왔을까? 왜 ‘조슈아’라는 인물을 만나게 된 걸까? 이런 질문에서 연출과 이야기를 풀자고 생각했습니다.

 

애들린은 조슈아를 통해서, 조슈아는 애들린을 통해서 그들의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책장처럼 한 장면, 한 장면 넘기며 보는 재미가 있었으면 하고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저희 작품은 소설 속인지, 현실인지, 허구인지, 실재인지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은 장면들도 있습니다. 감정선과 이야기의 전개가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분리되어 있는 것 같지만 장면 하나하나를 연결해 보면 이해가 되고 흥미로울 것입니다.

 

 

Prologue; Turning Page

무대 세트가 책의 페이지라고 생각해 봤습니다. 세트가 열리고 닫히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고 머물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스토리가 있죠. 그 안의 세상은 물에 젖어 있는 듯한 느낌으로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원래는 물이 군데군데 더 젖어 있는 걸 표현하고 싶었지만, 디자인적으로 지금은 무대 끝 선에만 그러한 요소가 있습니다.) 무대는 여러 개의 세상을 그리고 장소를 나누기 위해 여러 레벨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바이올린의 음악과 함께 영상으로 ‘버지니아 1941년 3월 28일 실종되었다.’라는 신문 기사가 보입니다. 책이 한 장 한 장 지나가면서 빗방울이 거세지면, 물의 파동과 함께 장면은 런던 거리로 변합니다. 그렇게 작품은 시작됩니다.

 

애들린은 자신이 쓴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책 속 세상으로 빠지고 조슈아라는 청년에게 발견됩니다. 이때 애들린은 마치 책장 사이에서 ‘뿅’하고 나타나듯이 파도(물살) 영상과 함께 세트 사이로 등장합니다. 1장부터 5장까지는 애들린이 조슈아를 만나 새로운 소설을 쓰게 되는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애들린과 조슈아의 캐릭터를 보여주며, 온전히 둘의 드라마와 관계에 집중하고, 소설 속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데 주력하였습니다. 애들린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해 글을 다시 쓰기로 하고, 조슈아는 애들린에게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바꿔 달라고 요청하죠.

 

 

6장 M08. 혼란

소설 속 세상, 자기가 쓴 세상이 현실과 똑같이 존재해서 신기하고 기뻤던 애들린. 그러나 런던 시내에서 우연히 발견한 댈러웨이 부인의 장례식에서 그녀가 비참하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애들린이 쓴 소설 속에서 댈러웨이 부인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도록 만들었는데, 소설 그 이후의 댈러웨이 부인의 삶이 매우 불행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애들린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들이 여전히 여기 소설 속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투영되어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동시에 작가가 꿈인 조슈아는 런던 매거진에 자신의 글이 선정되어 부푼 마음으로 편집장을 만나러 갑니다. 하지만 이내 편집장의 이야기를 듣고 혼란이 오기 시작합니다. 조슈아는 지금까지 자신이 쓴 글이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쓴 것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면서, 결정적으로 자신의 글이 선정된 것이 내정자들의 사고로 인한 것이라는 말에 혼란이 가중됩니다. 내가 원했던 기회이지만, 그리고 애들린에게 내 인생을 바꿔 달라고 요청한 것도 자기 자신이지만 과연 이게 내가 바랬던 것인가? 무대에서는 세트의 레벨을 사용해 이 둘이 느끼는 혼란한 세상을 표현했습니다.

 

 

 

8장 M09. 고해

버지니아 울프가 무신론자라는 정보는 우리가 조사해 보면 알게 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왜 그녀가 무신론자가 되었을까?’라는 질문에서 가상의 내용으로 이 장면을 만들었습니다. 3번 넘버 ‘글과 나’, 그리고 5장에 나오는 트라우마 장면에 창문을 자세히 보면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프레임이 있습니다. 그 십자가가 이번엔 그녀를 덮칩니다. 책을 연상시키는 세트 뒤쪽에서 오는 조명. 그 빛으로 만들어진 하얀색 십자가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점차 핏빛을 연상시키는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을 통해 신을 향한 그녀의 증오심을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멀리서 들리는 신의 목소리와 그를 거스르며 울부짖는 애들린. 이 장면을 만들 때 영화 <드라큘라>가 생각났습니다.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치고 전쟁에 나가 싸워 이기지만 아내가 죽음을 맞게 되자 신에 대한 배신감을 느낀 드라큘라 백작이 십자가에 칼을 꽂으면서 신에게 반항하는 내용이 담긴 작품이죠. 드라큘라 백작에게 피가 확 끼얹히고 흡혈귀가 되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이 장면은 애들린의 악몽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악몽에서 빠져나올 때 조슈아가 들어와 그녀를 안아줍니다.

 

 

9장 M10. 세인트 아이브스의 여름

세인트 아이브스는 버지니아 울프가 가족과 매년 여름에 놀러 가던 곳이자 그녀가 가장 행복해 했던 곳입니다. 사실 『댈러웨이 부인』 소설 속이기에 세인트 아이브스라는 공간도 없어야 하지만, 이곳이 존재하는 이유는 애들린의 긍정적인 면모가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영상에 공을 들여 평화로운 마을의 석양, 그리고 야경을 표현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영상에는 많은 색깔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세피아톤 아니면 블랙 앤 화이트가 대부분이죠. 그런데 이 장면에는 비교적 다채로운 색감을 사용했습니다. 아름다운 석양과 해가 떨어지기 직전 오묘한 색감, 높은 절벽에서 바라본 아름답고 평화로운 마을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이 모습을 보며 애들린은 위로를 느끼는 동시에, 어릴 적 바닷가에서 놀던 때를 떠올리며 깨닫습니다.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모든 게 다 나 자신이라는 걸.

 

 

13장 M15. 내 이야기의 결말은

공연 중 일부 장면에서 빅벤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세상을 떠난 날인 3월 28일을 상징하기 위해 장면마다 3번, 2번 혹은 8번의 종소리가 울립니다. 극 중 중요한 부분에서는 빅벤의 종소리를 장면을 전환하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이 장면은 그녀가 죽음을 선택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다시 돌아갈 때가 되었음을 알립니다. 버지니아 울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디 아워스>에서 니콜 키드먼(버지니아 울프 역)이 물 속으로 들어간 그 강가가 저에겐 너무나도 평화로워 보였습니다. 그 평화로움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애들린은 빈 책을 완성했고, 그 빈 책을 채우는 사이 그녀는 모든 것을 받아들였으며, 이제 깨닫고 나아갈 시간입니다. 우리의 삶을 정리하는 시간, 그리고 깨닫는 시간. “이 결말이 최고는 아닐지라도 괜찮아. 내가 선택한 나의 결말.” 마침표도 쉼표도 그녀의 의지대로 선택한 삶. 책 사이로 들어온 그녀는 다시 책 사이로 홀연히 사라집니다.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