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던 여자를 지키지 못한 남자.
그녀를 보호해 주지 못했다는 절망에 죽지 못하는 삶이라는 저주를 택하는 남자.
간절한 기다림 끝에 그녀를 다시 만나 비로소 자신의 심장의 위치를 알게 되는 남자.
사랑을 위해 전부를 바치는 드라큘라를 연기할 사람, 그는 김준수다.
무대 위에서 애절한 사랑을 전할 줄 아는 그 남자 말이다.
“드라큘라는 누구보다 멋있고 심장이 뜨거운 남자예요”
아까 촬영하면서 계속 흥얼거렸던 노래는 뭐예요?
아, <드라큘라> 노래. ‘Loving You Keeps Me Alive’라는 곡이에요. 맨 처음 들었던 <드라큘라> 노래가 이건데, 이 노래 때문에 <드라큘라>를 하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멜로디에 반했지만 지금은 가사 때문에 이 노래를 좋아해요. 가사가 정말 애절해요.
그 노래의 어떤 가사를 제일 좋아해요?
그댄 내 삶의 이유, 나를 살게 하는 첫사랑.
<드라큘라> 출연 소식에 대한 주위 반응은 뭐였어요?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것 같은데.
네, 공연 관계자 분들한테도 어울리는 캐스팅이라는 말,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반응이 신기했어요. <엘리자벳>에서 ‘죽음’ 할 때만 해도 저와 판타지적인 역할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별로 없었거든요. 오히려 다들 어리둥절해했죠. 심지어 제 팬들도요. 죽음 역을 하고 나서 판타지적인 역에 어울리는 이미지가 생긴 것 같아요. 감사하죠. 내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게 연기했나보다 하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하고요.
연습은 어땠어요?
지금까지 외국인 연출가와 몇 번 작업해 봤지만, 배우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연출가는 데이비드 스완이 처음이에요. 우리 팀 배우들이 워낙 베테랑이라 그랬는지 모르지만요. 저도 연출님이랑 작품 얘기 많이 했어요. 사실 그 전엔 저한테 먼저 ‘네 생각은 어떠냐’고 물어보는 경우는 잘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엔 자꾸 제 생각을 물어보니까, 긴장도 많이 됐지만 재밌었죠. 아, 이번 연습은 테이블 리딩 기간이 진짜 길었어요. 대사 톤이나 말투 같은 사소한 부분까지 이야기하느라 테이블 리딩을 거의 보름 정도 한 것 같아요.
테이블 리딩이요? 사실 오늘 인터뷰에서 연습에 많이 참여할 수 없는 상황을 극복하는 김준수만의 방법이 있냐고 물어보려고 했거든요.
아이돌이 연습에 잘 안 나올 거라는 건 편견이에요. 물론 바쁜 스케줄 때문에 연습에 많이 참석 못하는 아이돌도 있겠죠. 저도 연습을 못 나갈 때가…, 아니다, <모차르트!> 초연하고 <엘리자벳> 때 빼고는 연습실에 잘 나갔어요. 이젠 저희 회사에서도 뮤지컬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무리한 일정으로 작품을 안 잡아요. 자신감이 생길 만큼 연습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아무리 좋은 작품이어도 안 하죠. 저도, 저희 회사도, 나름대로 자존심이 있으니까.
드라큘라는 많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 인물이잖아요?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400년 동안 기다린다는 설정, 어떻게 그 마음에 다가갔어요?
드라큘라가 일상에서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는 아니라서 처음엔 막연했어요. 죽지 못하는 영생의 삶을 산다는 게 어떤 기분일까, 상상이 잘 안 됐죠. 그런데 장면 연습이 시작되니까 슬슬 감이오더라고요. 저는 연습실에서 직접 연기해보면서 감을 잡아가는 타입이거든요. ‘드라큘라와 미나의 과거를 설명하는 장면이 많지 않은데, 어떻게 애절한 사랑을 전달하지?’ 저를 내내 괴롭혔던 고민도 연습실에서 처음 ‘마의 1막 10장’ 노래를 부르던 순간 풀렸어요. 그 노래가 아까 얘기했던 ‘Loving You Keeps Me Alive’인데, 노래를 부르는 순간, 느낌이 확 왔어요. ‘그댄 내 삶의 이유, 나를 살게 한 첫사랑’ 이 말을 하는데, 의도하지 않아도 눈물이 뚝뚝 흐르더라고요.
우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김준수는 무대에서 정말 잘 울잖아요. <디셈버>에서 지욱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을 부르는 1막 엔딩 장면에선 신기할 정도였어요. ‘어떻게 저렇게 꺼이꺼이 울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지?’ 하고요.
그땐 음악의 영향이 컸어요. 장면도 장면이지만, 음악이 나오는 순간 뭉클하면 눈물이 나와요. 음악 없인 그렇게 못 울 거예요. 목멘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게 힘들긴 하지만, 그게 뮤지컬의 묘미인 것 같아요. 노래 부를 때 느껴지는 감정을 고스란히 표현할 수 있는 거요. 뮤지컬에선 감정이 격앙돼서 호흡이 거칠어지고, 설령 발음이 뭉개지더라도, 그게 그 신의 감정을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면 용인되는 면이 있잖아요. 하지만 가요 프로그램에서 그렇게 노래를 부르면, 그건 그냥 못 부르는 게 되죠. 그래서 지금은 뮤지컬 무대에서 노래 부르는 게 더 재미있어요.
<드라큘라>에서 가장 큰 두려움을 주는 존재는 누구예요?
무서운 사람은 없어요. 제가 워낙 센 존재니까. 반 헬싱이 저를 처치하는 방법을 알지만, 저한테 인간은 게임이 안 되죠. (웃음) 저를 두렵게 하는 건, 인간이 아니라 미나를 간절히 원하는 제 자신이에요. 미나를 마주친 후 살인을 저질러 사람 피를 마실 만큼 욕망에 휩싸이게 되거든요. 아, 저희 작품 드라큘라는 동물 피만 마시며 살아가요. 동물 피는 겨우 허기를 달래주는 정도지만, 살인을 피하려고 사람 피를 안 마시죠. 그런데 젊고 멋있는 모습으로 미나 앞에 서고 싶은 마음에 다시 사람 피를 마시게 되는 거예요. 미나를 제 옆에 두기 위해선 그녀를 드라큘라, 그러니까 괴물로 만들어야 하는데, 처음엔 그조차도 갈등해요. 그러다 내 사랑의 선택이 정말 그녀를 위한 것인가 생각하게 되죠. 결국엔 이 여자를 위해 내가 죽어야겠다고 마음먹게 되고요. ‘사랑해요 그대, 그대를 사랑해요, 그대를 위해 내가 떠날게요.’ 제 마지막 대사가 이거예요.
미나를 드라큘라로 만들면,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계속 같이 있을 수 있는데요?
물론 미나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죠. 하지만 저는 드라큘라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알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이 그 고통을 겪게 하고 싶지 않은 거죠. 저만 죽으면 미나는 본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그녀를 위해 죽음을 택하는 거고요.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건 정말 위대한 사랑 아닌가요? 드라큘라는 누구보다 멋있고, 심장이 뜨거운 존재에요. 그게 관객들에게 느껴지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제 마음을 몰라준다고 투정 부리면 안 돼요”
드라큘라가 살인을 하지 않기 위해 굶주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김준수의 삶과 맞닿는 부분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연예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선 본능을 억눌러야 할 때가 있잖아요.
연예인으로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뭔가를 참고 견뎌야 할 때가 많으니까. 특히 드라큘라가 느꼈을 배고픔이요, 저는 뭔지 알 것 같아요. 살이 쉽게 찌는 체질이라 연예인이 된 후로는 음식을 양껏 못 먹거든요. 어쩌다 가끔 ‘오늘만큼은 내가 나에게 상을 줘야겠다!’ 싶을 때 말고는. (웃음) 그리고 또, 연애하는 것도 쉽지 않고, 마음 편히 밖을 돌아다니기도 힘들죠. 이런 건 아주 단편적인 얘기에 불과해요. 그래서 한때는 이 일을 함으로써 얻는 것보다 포기해야 하는 부분이 더 많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떤 삶을 살든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이젠 제가 누리고 있는 게 어떤 건지, 그 고마움을 알죠.
인간을 위해 살인을 참지만, 누구도 그 마음을 몰라주는 것, 그게 드라큘라를 더욱 외롭게 할 거예요. 지나친 비약일지는 몰라도, 김준수가 지금 무대에 서기 위해 무엇을 참고 어떤 노력을 하는지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일에서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하다고. 그런데 저는 결과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특히 제 직업은 정말로 결과가 중요하죠. 제 팬들은 제가 노력하는 과정을 봐주지만, 저를 객관적으로 보는 대중들은 결과물로 저를 판단하니까요. 그런 게 좀 힘들긴 하죠. 그런데 이건 제가 자진해서 하는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몰라준다고 투정 부리면 안 돼요. 모든 사람들이 제 마음을 알아주길 바라는건 욕심인 것 같고요.
나도 뮤지컬 배우가 다 됐네, 하고 느낄 때는 언제예요?
너무 사소한 이야기라서 ‘뭐야, 시시해’ 하고 공감 못 할지 모르겠지만, 제가 감히 뮤지컬 배우가 됐구나 하고 느낄 때는 연습실에서 아무렇지 않게 대사하고 노래할 때예요. 불 다 켜진 연습실에서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연습하는 게, 어떤 땐 무대 위에 서는 것보다 더 떨리는 거 아세요? 뮤지컬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연습하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좀 창피했거든요. 공연처럼 연습하는 배우들이 신기하고 부러웠는데, 어느 순간 제가 그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디셈버> 때도 그랬지만, <드라큘라> 때는 진짜 하나도 안 창피했어요. 음산한 목소리로 ‘환영합니다’ 이런 것도 뻔뻔하게 잘하고. (웃음) 나도 뮤지컬 배우들처럼 작업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구나, 뿌듯했죠.
김준수는 지나간 일을 마음에 담아둘 타입은 아닐 것 같은데, 그래도 뮤지컬을 하면서 후회했던 순간이 한 번쯤은 있지 않을까요?
네, 후회는 잘 안 해요. 어떤 선택을 하기까지 엄청난 고민을 하지만요. 일단 결정을 하고 나면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고 하는 편이죠. 그렇다고 무조건 좋은 면만 보려 한다는 건 아니에요. 근데 <디셈버>는 출연 기사가 뜨고 나서도 계속 고민했어요. 전작이 <엘리자벳>이었는데, <디셈버>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니까, 뭐랄까, 벌거벗겨지는 느낌의 뮤지컬 같았어요. 또 제가 그 전에 했던 작품들과 달리 대사가 많아서 부담이 컸죠. 그래서 홍보 팀 누나에게 전화해서,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출연을 번복하면 내게 어떤 타격이 오지?’ 하고 물어봤어요. 주관적인 생각 말고, 아주 객관적인 이야기를 메시지로 보내달라고 했죠. 전화를 끊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메시지가 왔는데, 뮤지컬에서 오랫동안 닦아온 이미지를 한 번에 추락시키는 어떤 여러 타격들…, 바로 다시 대본을 폈죠. 에이씨, 한 번 하고 파이팅을 외치면서. (일동 웃음) 그런데 <디셈버>를 하길 참 잘한 것 같아요. 대사에 대한 두려움도 없애주고, 제게 많은 무기를 장착하게 해줬죠.
공연 기자로 일하다 보면 이런저런 후일담을 듣기 마련인데, 김준수에 관한 얘기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말은 조연으로 출연할 뻔했을 때 비중이 작다고 좋아했다는 거예요. 농담이었을지 몰라도, 그 말을 듣고 김준수는 자신감이 대단한 사람이구나 생각했어요. 분량이 많든 적든 그게 뭐 어때서, 나는 나, 김준수인데? 하는 느낌이었다고 할까.
음, A와 B라는 배역이 있다고 했을 때, A보다 B의 비중이 더 크니까 B를 하자, 이런 계산으로 역할을 고르진 않아요. 내가 맡을 역할의 노래가 좋고, 이걸 하면 뭔가 보여줄 수 있겠다 하는 마음이 드는 역할을 하고 싶죠. 비중은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 안 해요.
한 해에 한두 작품만 하는 이유도 있겠죠?
뭘 계산하고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단순히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거죠. 지금 잠깐 반짝 소모되고 말려는 건 아니니까, 앞으로 10년 후, 또 20년 후에도 잘할 수 있게 천천히 나아가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1호 2014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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