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최고의 화제작인 <프랑켄슈타인>에 이어 뉴욕 단독 콘서트, 자신의 이름을 건 뮤지컬 콘서트,
그리고 두 디바 차지연, 박혜나와 함께하는 콘서트
리사는 올해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배우임에 틀림없다.
최근 소속사를 옮기고 뮤지컬 활동에만 매진하고 있는 리사는 무엇에 홀린 듯 쉬지 않고 무대와 무대 사이를 뛰어다니고 있다.
그런 행보 끝에 만난 것은 뜻밖에도 댄버스 부인이다.
경쾌한 에너지로 가득한 그녀가 표현하게 될 ‘레베카 마니아’ 또는 ‘집착과 강박의 화신’ 댄버스 부인은 어떤 모습일까.
또 하나의 피해자, 댄버스 부인
“그래서 질문이 뭐였죠? 또 까먹었네, 크크.” 리사와의 대화는 한창 진행되다 옆길로 빠지기 일쑤였다. 그리고 그녀는 별거 아니라는 듯 유쾌하게 웃으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레베카> 연습을 마친 후 저녁 만남이었지만, 그녀는 이제야 하루를 시작하는 것처럼 밝고 생기 넘쳐 보였다. <보니 앤 클라이드>의 보니가 리사의 맞춤옷처럼 느껴졌던 건, 이런 밝음의 에너지가 서로 공명했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엔 고집 세고 도발적이지만 젊은 여성의 매력이 느껴지는 공통점이 있었다. 반면 댄버스 부인은 어둡고 육중한 카리스마의 중년 캐릭터다. 과연 이런 궁극의 ‘마담 블랙’과 리사가 어울릴 수 있을까.
이런 물음표에 대한 리사의 반응은 “잘할 수 있어요!”라는 자신감에 찬 일갈이다. “댄버스 부인이 저에게 안 어울리는 건 아니에요. 전에 했던 역 중 에비타도 비슷했거든요. 둘 다 노래도 강렬하고 기가 센 여자들이니까요.” 그래도 <레베카>에서 댄버스 부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초연 당시 이를 훌륭하게 소화해냈던 옥주현과 신영숙은 이번 공연에서도 여전히 높은 기대를 받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처음 댄버스 부인을 맡게 된 리사는 부담을 느낄 만하다. 이미 모범 답안이 된 두 캐스트와 차별화된 캐릭터를 구축해야 하니까.
리사가 찾은 해법은 기본부터 충실하게 파헤치는 것이다. “책을 읽어봤더니 뮤지컬로 만들어야 되는 부분들을 잘 끄집어냈더라고요. 주축 멤버 외에도 많은 캐릭터들이 보이고, 그들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게 재미있었어요. 저는 원래 아예 밝거나 어두운, 극단적인 걸 좋아하는데, 이 작품은 안 그런데도 흥미롭더라고요.” 문제는 역시 인물 해석이다. 결국은 댄버스 부인을 어떤 사람으로 보느냐가 리사만의 노선을 결정짓는다. 리사는 댄버스 부인의 광기보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환경에 초점을 두고 있다. “댄버스 부인은 상자 안에서 키워진 사람 같아요. 그 안에만 있으니까 상자 밖 세상은 모르는 거죠.” 이 해석에서 상자는 레베카다. 그래서 자신을 지탱해주던 세계가 무너지니 모든 게 불안해지고 흔들리는 인물이 바로 댄버스 부인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요즘에 그런 사람들이 많잖아요. 사회가 정해놓은 통념이나 관습이 있고, 거기서 벗어나면 불안해하는 사람들. 댄버스 부인도 맨덜리에서 레베카를 만나지 않았다면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잘 살았을 거예요.”
그래서 리사가 그릴 댄버스 부인의 핵심은 ‘연민’이다. “알고 보면 안타깝고 불쌍한 사람이에요. 왜 그녀가 여기저기 분노를 내뿜다 파멸을 초래하는지를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을까요. 무섭기보다는 사실 여리고 단순한 사람이에요.” 이렇듯 리사는 <레베카>를 ‘악녀’나 ‘광기’보다 ‘환경’에 초점을 맞추고 본다. ‘레베카’라는 인물이나 ‘맨덜리’라는 곳은 모르는 타인에게는 아름다운 사람이나 지역에 불과하지만,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는 사람에게는 지옥이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강하지만 여린, 가해자 같지만 동시에 피해자이기도 한 댄버스 부인을 그리고 싶어요. 그게 표현이 잘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리사가 개인에 미치는 환경의 영향력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바로 자신이 그런 경험을 거쳐온 사람이기 때문이다. 원래 밝고 유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녀지만 가수 활동 당시에는 그런 성격을 마음껏 내비치지 못했다. “당시 낸 앨범들이 다 비련의 주인공 같은 컨셉이었어요. 거기에 충실하다 보니 밝은 모습은 자제하고 정적인 모습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죠. 마음이 불편하면 댄버스 부인처럼 딱딱해지는 거예요. 싫은데 가식적으로 웃을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가수보다 배우 활동에 매진하는 요즘의 리사는 한결 표정이 편안해졌다. 코믹한 표정까지 자유자재로 짓는 모습에 이제는 자제해야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다. “(임)혜영 씨가 저랑 친해지면 안 되겠다고 그러대요. 공연 도중에 웃음 터질 것 같다고요. (웃음)”
지금만 할 수 있는 것들을 위해
올해 리사에게 일어난 가장 큰 신변의 변화는 뮤지컬 배우 전문 매니지먼트사로 소속사를 옮긴 것이다. 그동안 가수 전문 기획사에 적을 두고 ‘가수 겸 배우’라는 호칭으로 활동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나름 열심히 했지만 원하는 대로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일이 안 풀리니까 댄버스 부인처럼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고, 막 불 지르고 싶더라고요. (웃음)”
지금은 웃으며 말하지만 당시의 긴 공백 기간은 커다란 고통이었다. 우울증까지 생길 정도로 괴로운 나날이었다.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라며 몸서리를 치는 리사에게 지금의 바쁜 일정들은 고마운 시간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팬들 사이에서 한지상과 더불어 ‘소처럼 일하는 배우’로 불리게 했던 최근 스케줄의 배경이다. “꾸준하게 주어지는 모든 일들이 감사해요. 쉬는 것 자체를 별로 안 좋아하기도 해요. 적당한 휴식은 필요하지만, 너무 길어지면 감이 떨어지거든요.”
힘든 시간을 겪은 끝에 마련한 새 보금자리에서 그녀는 확실히 한결 편안해 보인다. “세상을 움직이고 주관하는 건 결국 신의 영역이니까요. 그래서 이제는 정말 마음이 편한데, 감사하게도 다 잘 풀리는 것 같아요. 회사에서 다른 분야 일도 적극적으로 도와줄 계획이고 전시회도 일 년에 한 번은 하면서 많은 분들께 저의 에너지를 전해드리고 싶어요.”
이렇듯 지금 리사의 의욕은 충만하다. 마치 그동안 쓰지 못하고 축적해둔 에너지를 다 쓰겠다는 듯, 앞으로 다양한 활동을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친다. “도전을 좋아해서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보고 싶어요. 나이 들면 못 맡을, 지금밖에 못하는 역할들이 있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전하면서 배우로서든 인간으로서든 업그레이드됐으면 좋겠어요.” 그녀가 스스로에게 내린 이런 ‘채찍질’의 기한은 5년이다. “어차피 나중에는 쉬기 싫어도 쉬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마흔 살이 될 때까지는 이런 속도로 계속 달리고 싶어요.”
리사는 여전히 욕심이 많다. 물론 다재다능한 예능인으로서 다방면에서 활동을 해보고 싶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리사의 욕심은 좀 다르다. 단순한 물욕이나 명예욕보다는 다양한 경험에 대한 순수한 갈망에 가깝다. 그건 탐욕이라기보다 본능이다. 아직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한 갈증이다. “전에 뉴욕에 살 때 한 노부부를 만난 적이 있어요. 그분들은 굉장히 많은 경험을 하셔서 젊은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시는 분들이었는데, 그런 풍부한 경험치가 그분들의 여유로움의 밑바탕 같더라고요. <레베카> 초연 배우들도 그래서 지금 저렇게 여유롭잖아요. (웃음) 저도 열심히 달리면 언젠가 그런 멋진 할머니가 될 수 있겠죠.”
리사가 가요계 생활을 하면서 얻은 교훈 중 하나는 진정한 행복에 관한 것이다. 돈과 명예를 다 얻었지만 속은 다 썩은 사람들을 보면서 깨달은 교훈이다.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삶의 방향이 정리가 됐어요. 부와 명예도 물론 감사한 것이지만, 더 중요한 건 무대 위와 무대 뒤의 모든 동료들이 저로 인해 빛이 나고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저 혼자만 잘되면 외로울 것 같으니까요.” 그래서 그녀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기운을 전파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좋은 건 이처럼 성숙해진다는 점이다. 리사는 만약 인생의 계단이 100개가 있다면 자신은 이제 3개 정도 올랐다고 겸양한다. 그리고 남은 계단을 다 오르고 죽고 싶다는 욕심을 내비친다. 그래서 그녀는 이제 조급해하지 않는다. 일단은 댄버스 부인의 계단을 잘 넘긴 후 다음으로 <지킬 앤 하이드>의 ‘루시’를 차근차근 통과할 계획이다. “뮤지컬뿐만 아니라 제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다 계단이에요. 그런 인생의 계단들을 진실되게 다 걸어보고 싶어요. 이런 욕심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저를 살게 하는 에너지니까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32호 2014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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