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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cene Scope] 진화하는 무대 <빨래> [NO.97]

사진제공 |여신동(무대디자이너) 정리 | 배경희 2011-10-18 8,925

한 연극평론가는 <빨래>의 무대 디자인을 두고 ‘진득한 수고와 발품으로 완성된 디자인’이라 표현했다. 지금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공연을 하는 동안 매번 무대가 진화한 <빨래>. 하지만 여전히 하고 싶은 것이 남아 있다는 여신동 무대디자이너. 그에게 <빨래>의 무대 이야기를 들어보자. 

 

   2009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빨래> 초연 무대

 

‘색감으로 표현될 수 있는 정서를 보여주고 싶다.’ <빨래>의 무대 디자인을 맡게 됐을 때 첫 번째로 했던 생각이다. 내가 이 작품에 무대디자이너로 합류하게 된 건 상명아트홀에서 공연한 두 번째 시즌부터였는데, <빨래>와 인연을 맺게 된 건 그보다 훨씬 전인 대학 재학 중의 일이다. <빨래>는 학교 선배인 (추)민주 누나가 졸업 공연으로 준비하던 작품이었고, 당시 3학년이었던 나는 누나와의 친분으로 작업에 참여하게 됐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미술학과 학생 입장에서 <빨래>는 매력적인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무언가 만들고 싶다는 의욕이 왕성한 학생 때는 이미지적으로 예쁜 작품을 선호하기 마련인데 <빨래>는 드라마가 강한 작품이지 않나. 온전히 연출가 추민주에 대한 신뢰에 따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내가 이 작품을 만난 건 엄청난 행운이었지만.


어쨌든 내가 다양한 색을 사용하고 싶었던 까닭은 <빨래>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공연 대부분이 무대를 온통 회색으로 표현했던 것이 아쉬워서였다. 학창 시절 석관동에 살았던 경험에 따르면, 가난한 동네일수록 겉으로 보기엔 삭막해 보여도 안을 들여다보면 여타 동네보다 훨씬 다양한 색깔이 공존한다. 일단 별의별 직군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으니까. 또 우리 삶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는 고단한 서울살이 이야기라고 해도, 그 안에 행복도 있고, 사랑도 있지 않나. 그런데 그런 다양한 감정이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다. 게다가 이 작품은 판타지가 있는 뮤지컬이 아닌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에 우중충하고 구질구질할 것 같은 달동네 어디에서 즐거운 요소를 찾을 수 있을까? 그걸 시각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은 시작됐다.


자료 수집을 위해 후배 둘을 데리고 서울 모든 달동네 골목길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초연 당시 <빨래>의 부제는 ‘골목골목 뮤지컬’이었다). 그런 동네의 골목골목을 다녀 보면 아파트 촌과 다르게 재미있는 요소가 많다. 빨랫줄에 널린 색색깔의 빨래들, 중구난방으로 칠해진 페인트, 어설프게 두른 띠 벽지, 여기저기 붙여진 스티커들…. 그런 풍경이 이미지적으로 다가왔고, 거창하게 말해 디자인의 영감이 됐다. 별별 사람들이 모여 사는 모습의 다양성을 시각적으로, 알록달록한 색감으로 보여주는 것, 이것이 미술적인 컨셉이라 할 수 있겠다.

 

   2006 상명아트홀

 

   2008 원더스페이스


<빨래>에서 또 다른 과제는 소극장이라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높이감이 확실히 느껴질 수 있도록 하는 거였다. 지상과 지하, 더욱이 지하방과 옥상이라는 높이 차이가 있는 공간으로 나뉘는데 땅을 파서 지하를 만들 수는 없지 않나. 물리적인 높이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공간 구조에서 어떻게 하면 옥상으로 느껴질 수 있을지 고민했다. 우리가 옥상이라고 느끼는 것은 하늘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늘이 주는 느낌을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중요했던 것 중 하나가 하늘이다. 드라마 상에서도 마지막엔 털털 털어버리면서 해소되는 느낌을 준다. 달동네에서 해소의 공간은 옥상이다. 옥상에서 바라보는 하늘, 또 동네를 내려다봤을 때의 해소감. 따라서 하늘이 분명하게 존재해야 하고, 하늘에서 알 수 있는 시간의 변화가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빨래>는 매 시즌마다 무대 디자인을 새로 했고 지금까지 다섯 번 디자인을 했는데 각각의 공연마다 좋아하는 요소들이 있다. 첫 번째 공연에서 색감을 살렸다면 두 번째 공연에서는 무대의 전환을 시도했다. 대극장에서 가능한 장치 전환을 소극장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간판 위에서 내려오고, 벽채들도 좌우로 움직이는 등, 다양한 변환으로 트랜스포머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공간에서 어떻게 그걸 운용했는지 모르겠다. 세 번째 공연에서는 단순한 세트 전환이 아닌 무대의 드라마적인 전환에 집중했다. 전환 자체가 하나의 액팅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그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시즌을 꼽자면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때의 공연이다. 그동안의 작업들이 집약된 포트폴리오 같아 마음에 든다. 그리고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연강홀 공연에서 사용한 대도구들은 제작소에서 따로 제작한 것이 아닌 진짜다. 전봇대, 문틀, 간판 등 도구들을 전부 달동네 폐허에서, 또 영화 소품에서 구해 온 거였다. 제작소에서 제작하면 가짜처럼 보여 이질감이 생길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생활에서 쓰이는 오브제를 무대로 가지고 왔을 때 오히려 낯설게 보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렇듯 시즌마다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고 해도 아쉬움은 여전히 있다. 한 연출가에게 “네 무대는 시적인 감성이 부족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무대를 여백 없이 꽉꽉 채워 놓아서 관객에게 상상해 볼 여지를 주지 않는다는 것이리라. 지금은 풍경 재연에 그치지만, 앞으로는 좀 더 이미지화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다. 사막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 사진을 봐도 어떤 정서가 느껴지는 것처럼 빈 무대에 빨래줄이 걸려 있고 뒤로는 하늘이 펼쳐져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무대를 비워서 표현해보고 싶다. 배우를 살려주고 드라마의 정서를 무대로 끌어오는 것, 드라마와 미술을 밀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2010 학전그린 소극장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7호 2011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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