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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ALON] 기분 좋은 인연의 연속, 연출가 유희성.배우 조정은 [No.104]

글 |정세원 사진 |김호근 2012-05-23 6,830

 

 

조정은이 뮤지컬 배우의 길에 들어서는 데 결정적인 힘을 보탰고, 그녀의 가능성에 무한 신뢰를 보내준 유희성 연출가. 두 사람이 연출과 배우로 만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이들이 함께할 때면 기대 이상의 시너지를 만들어낸다.
조정은에게 여우신인상과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로미오와 줄리엣>과 <피맛골 연가> 역시 유희성 연출의 손끝에서 나온 작품들이다. 오랜 세월 기분 좋은 인연을 쌓아가고 있는 두 사람을 함께 만난 곳은 예술의전당이다. 유희성 연출이 조정은의 가능성에 매료된 곳이며, 또한 조정은이 자신의 꿈을 향해 첫발을 내딛은 곳이기도 하다.

 

 

 

인연의 시작


>> 조정은
  예술의전당에 잔디 마당이 생겼네요? 제가 단원이었을 땐 그냥 돌바닥이었던 것 같은데…. 그땐 연습한다고 이 앞마당을 열심히 뛰어다니곤 했어요. 단원 오디션을 보던 날에도 떨어진 줄 알고 이곳에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나네요.
>> 유희성  그때 오디션은 잘 봤어. 문제는 네가 학생이었다는 거지. 정은이가 입단 시험을 보러 왔을 때 제가 연기감독으로 재직하고 있었어요. 서울예술단원들 중에 계원예고 출신이 꽤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정은이 칭찬을 참 많이 했거든요. 비록 ‘대학 졸업자’라는 입단 자격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어떤 친구인지 궁금해서 일단 오디션을 보자고 불렀죠. 
기자  그런데 마음에 드셨군요.
>> 유희성  네, 원칙대로라면 서류 심사에서 불합격시켜야 했지만 어떻게든 합격을 시키고 싶었어요. 그때 정은이가 ‘On My Own’을 불렀는데 내추럴하면서도 싱그러운 보이스 컬러가 그렇게 욕심이 나더라고요. 마치 레아 살롱가의 노래를 듣는 것 같았어요.(웃음) 따뜻하면서도 알맹이가 있는 소리에 반해서 ‘눈 딱 감고 한 번만 밀어주자’고 설득을 했죠. 다행히 다른 분들도 정은이의 가능성을 높게 보셨더라고요. 
기자  이런 사정을 알고 있었어요?
>> 조정은  1년쯤 후에 들었어요. 원래는 자격 미달로 떨어졌어야 했는데 전문대 졸업한 걸로 치고 들어오게 됐다고요. >> 유희성  제가 억지를 좀 부렸어요. 그때 정은이가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 중이었는데, 단원은 2년제 대학 졸업자도 지원 가능했거든요. 그래서 이수한 학점만 보면 전문대는 졸업하지 않았냐고 주장을 했던 거죠.(웃음) 학생 신분으로 서울예술단원이 된 건 정은이가 처음이었고 아마 그 후로도 없을 거예요.
기자  굉장히 파격적인 출발이었네요. 그런데 졸업하기도 전에 서울예술단 시험을 볼 생각은 어떻게 했어요?
>> 조정은  음, 학교 생활이 재미없었어요. 계원예고 다닐 땐 친구들과 늘 뮤지컬 얘기를 하면서 보냈는데 당시 동국대 연영과에는 뮤지컬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일단 휴학을 하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고교 은사님이신 박기원 선생님께서 서울예술단 얘기를 해주셨어요. “오디션에서 떨어지면 원서 값 줄게” 하시면서요. 그렇게 인연이 닿아 오디션을 봤고 감독님 덕분에 합격하게 된 거죠.

 

 

가능성에 날개를 달아주다 


기자  입단 과정만큼이나 파격적이었던 것이 <로미오와 줄리엣> 2002년 초연의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일이었어요. 입단한 지 일 년 정도밖에 안 된 새내기 배우였잖아요.
>> 조정은  네. 감독님 덕분에 여우신인상도 받았고, 또 뮤지컬 배우로 계속 가도 되겠구나 스스로 확인할 수도 있었고요. 사실 그때 제가 한참 방황하고 있었어. 과연 이 길이 내 길이 맞나 하고. 단체의 특성상 무거운 주제의 작품들을 많이 공연하기도 했지만, 기회가 올 것 같으면서도 안 왔거든요. (김)선영 언니가 제 동기였던 이유도 있었어요. 실력 있고 인지도까지 있는 배우를 두고 저한테 기회를 주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로미오와 줄리엣> 오디션에서도 떨어지면 내가 능력이 없는 거다, 예술단을 나가서 아나운서 시험을 보든 유치원 선생님을 하든지 하자’고 마음을 먹었죠. 다행히 기회가 왔고 아쉽게 리허설은 많이 못했지만 줄리엣으로 무대에 올랐어요.
>> 유희성  정은이가 무대에 섰을 때 모든 스태프들이 넋을 놓고 봤던 기억이 나요.(웃음) 그때 참 예뻐 보였던 게, 연기에 대한 욕심만큼이나 본인 스스로가 하드 트레이닝을 참 열심히 했어요. 앞마당을 뛰어다니면서 체력도 키우고. <로미오와 줄리엣>은 정은이의 첫 주연작이기도 하지만 제가 처음으로 연출한 뮤지컬 작품이기도 하거든요. 정은이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있던 찰나에 연출을 맡게 되면서 적극 추천을 했어요. 인지도는 없을지 몰라도 내가 생각하는 줄리엣의 이미지에 꼭 맞는 배우라고, 공연 횟수를 적게 해서라도 무대에 세우고 싶다고. 물론 선영이도 잘했지만 좀 더 어리고 여성스럽고 싱그러운 느낌을 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덕분에 줄리엣의 대명사가 됐죠.
>> 조정은  사실 그때 선영 언니는 줄리엣 오디션 안 보고 캐플렛 부인 하겠다고 했어요.(웃음) 결과적으로는 언니와 함께하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지만요. 옛날 얘기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한번은 감독님이 선영 언니와 비슷하게 하라고 디렉션을 주신 적이 있었어요. 처음 하는 연기인데도 고집은 또 있으니까 누군가와 똑같이 하는 게 싫었나 봐요. 똑같이 되지도 않고 다른 감정인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뒷문으로 걸어 나가버렸어요. 감독님이 디렉션을 주고 계시는데 말이에요!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감독님이 화내시는 모습을 봤어요. “너 어디가!”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셨는데, 저도 지지 않겠다며 “화장실 가요!” 하고 소리를 지른 거 있죠. 지금 생각해도 너무 웃긴 것 같아요. 밖에 나가서는 엉엉 울었지만 어쩌자고 그랬는지.(웃음)

기자  유희성 연출님의 버럭 장면은 상상이 안 되는 걸요. 그렇지만 정은 씨에 대한 연출님의 기대가 얼마나 컸는지 알 것 같아요.
>> 조정은  와이어리스 타고 나간 제 목소리를 처음 듣게 해주신 분도 감독님이세요. <바람의 나라> 때였는데, 화요비가 노래하면 뒤에 서서 깃발 들고 서 있는 역할이었거든요.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하면서 얼마나 약이 올랐던지.(웃음) 그땐 코러스나 앙상블들은 대부분 녹음된 음원을 사용해서 와이어리스 찰 기회가 없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감독님이 부르시더니 와이어리스를 채워주시는 거예요. 갑작스럽긴 했지만 정말 좋았어요. 와이어리스 타고 나가는 내 목소리를 듣는 게 어떤 느낌인지 처음 알았죠.
>> 유희성  그땐 살아 있는 현장성보다는 좋은 소리를 들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커서 녹음을 많이 했어요. 그래도 어떻게든 정은이의 가능성을 시험해보고 싶어서 화요비와 선영이 언더스터디로 두고 주연 배우 없을 때 리허설을 시키곤 했죠. 그땐 얼터나 언더스터디 개념도 불명확하던 때라 그냥 뒤에서 혼자 연습해야 했는데도 기특하게 잘 해냈어요. 정은이 소리는 와이어리스에 쏙쏙 빨려 들어가는 소리라 전달력이 굉장히 좋거든요. 연습실에서 듣는 것보다 무대 위에서 와이어리스를 통해 듣는 소리가 더 예쁜 배우 중 한 명이죠.

기자  그렇게 아끼던 배우가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는 서운함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 같아요.
>> 유희성  많이 서운했죠. 물론 <미녀와 야수>의 벨은 이미지나 소리가 정은이와 꼭 어울리는 역할이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나가는 것보다는 단체 생활을 병행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어서 말리기도 했어요. 일단 오디션부터 보고 나서 결정하자며 준비를 도왔는데 결국 그만둘 수밖에 없더라고요.
>> 조정은  자의 반 타의 반이었어요.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도 아쉽고 불안한 마음이 있었는데, 막상 공연을 시작하니 그만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혼자서 7개월 공연을 했는데 도저히 예술단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 유희성  돌이켜 생각해보면 참 용기 있는 도전이었어요. 관 단체에 있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지만 예술가라면 혼자서 스스로를 책임지고 모든 것을 해보는 독립군 정신도 필요하니까요. <스핏파이어 그릴>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선 바로 영국 유학을 떠난 것도 역시 기특한 도전이었죠.

기자  당시에는 좋은 배우를 무대에서 볼 수 없게 됐다는 생각에 참 많이 아쉬워했던 것 같아요. 연출님 말씀처럼 <스핏파이어 그릴>의 펄시를 통해 이미지 변신을 꾀한 직후의 선택이라 더 뜻밖이었고요.
>> 유희성  저도 그렇고 많은 분들이 같은 마음이었을 거예요. 정은이 부탁으로 추천서까지 써주긴 했지만 과연 바람직한 선택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정은이 생각이 맞았던 거죠. 이렇게 성숙해져서 돌아왔잖아요.

 

 

십 년 만의 재회 

기자  <로미오와 줄리엣> 이후 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작품이 <피맛골 연가>였어요. 홍랑으로 다시 만난 배우 조정은은 줄리엣이었던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을 것 같은데요.
>> 유희성  마음 씀씀이나 성격은 그대로였지만 자아가 옹골져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예전에는 시키는 대로 따르는 편이었는데 이제는 이성적으로 계산하고 깊이 있게 고민하는 모습이 상당히 알차져 있었어요. 창작뮤지컬이라는 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작업이다 보니 고민도 많고 마음도 급했을 텐데 다행히 서로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좋은 시너지가 생긴 것 같아요.
>> 조정은  감독님이야말로 정말 한결같으세요. 어떤 위치에 계셔도 저는 늘 처음에 사용했던 ‘감독님’이라는 호칭을 쓰거든요. 감사한 건 제가 성격이 단순해서 한 가지밖에 생각을 못하는데 그걸 다 지켜보시고 디렉션을 주신다는 거예요. 배우의 의견을 묵살하거나 당신 생각을 강요하시지도 않고요.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연출이 실은 상당히 외롭고 힘든 직업이잖아요. 악역을 도맡아 하시면서도 혼자 끝까지 남아서 작품 고민하시는 모습을 보면 뮤지컬을 정말로 좋아하시는구나 싶었어요.
기자  <피맛골 연가>는 관객과 평단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고, 정은 씨한테 여우주연상 수상의 기쁨까지 안겨주었어요. 그러고 보니 배우 조정은에게 상을 안겨준 두 작품 모두 유희성 연출님의 손끝에서 나온 뮤지컬이네요.
>> 조정은  감독님과 함께한 순간순간들이 제가 오랫동안 꿈꿨던 일들을 이루어가는 것 같아 신기할 때가 많아요. 배우로 처음 뵙고 뮤지컬의 꿈을 키웠고, 제 첫 번째 오디션의 심사를 해주셨고, <태풍>에서는 아빠와 딸로 같이 무대에 서고, 배우와 연출가로 만나 여우신인상과 여우주연상을 받고…. 이 길을 확신할 수 있는 점들을 감독님과 함께 찍어가는 것 같아 더 의미가 깊어요. 시상식 때도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상을 받으러 무대에 올라갔는데 바로 눈앞에 감독님이 계셨던 것까지도 드라마틱했어요.
>> 유희성  저 또한 정은이한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모든 것이 정은이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작품 속에서 배우가 차지하는 부분이 얼마나 큰지, 좋은 배우를 만나는 일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알고 있거든요. 지금 이렇게 뮤지컬 연출가의 길을 걷고는 있지만, 뮤지컬 연출 데뷔작이었던 <로미오와 줄리엣>을 빛내준 정은이가 이 길을 순탄하게 갈 수 있도록 주춧돌 역할을 해준 셈이에요.
기자  <피맛골 연가>의 홍랑 역은 처음부터 정은 씨를 염두에 두셨던 건가요?
>> 유희성  그럼요. 설득하느라 힘들었어요. 평소에 나를 믿고 따르긴 하지만 작품에 대한 개인적인 성향이 있으니까요. 정은이가 여성스럽고 얌전하고 약간 공주 같으면서도 참한 여자 주인공 이미지를 부담스러워하는 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지만, 한복 입혔을 때의 고운 자태를 포기할 수가 없더라고요. 정은이가 한 작품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이었다고 생각해요.
>> 조정은  내 안에 월이가 있는데 자꾸 홍랑을 보여달라고 하셔서 많이 힘들었어요.(웃음) 홍랑의 고운 자태는 다 감독님께 배운 거예요. 연습할 때 직접 연기를 보여주시곤 했는데 정말 잘하세요. 한국적인 매무새가 좋으셔서 눈빛부터 손끝 하나하나까지, 치마만 두르면 그냥 홍랑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였다니까요.
>> 유희성  나야 오랫동안 한국적인 것에 관심이 많아서 이것저것 공부하다보니 자연스럽게 몸에 밴 거죠. 정은이는 많이 어색해했지만 늘 그랬듯 잘 해낼 거라 믿고 기다려줬어요. 워낙 어렸을 때부터 봐왔기 때문에 저는 정은이 안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게 무궁무진하다는 걸 알거든요.
기자  그럼 지금까지 정은 씨 안에서 몇 가지 색깔을 꺼내 보였다고 생각하세요?
>> 유희성  음, 백 개 중 세 개? 앞으로 월이도 끄집어내야 하고 같이 해보고 싶은 작품들이 많아요. 청강대 뮤지컬 스쿨 원장을 맡게 돼서 당분간은 작품을 많이 하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섹시하면서도 강인하고 표독스러운 그러면서도 로맨틱한 클레오파트라를 정은이를 통해 만나보고 싶어요.
>> 조정은  클레오파트라요? 저한테 그런 면이 있을까요.(웃음)
기자  서울뮤지컬아티스트 페스티벌에서 은태 씨와 부른 ‘Dangerous Game’ 반응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클레오파트라에 앞서 알돈자로 변신한 정은 씨 모습이 기대가 되는데요.
>> 유희성 강하고 거친 모습보다는 정은이만의 색깔을 덧입힌 알돈자를 만나고 싶어요. <스핏파이어 그릴> 할 때 일부러 거친 소리 만든다고 고생을 많이 한 걸로 알거든요. 목도, 몸도 상하지 않게 조심하고.
>> 조정은 아직 아무 계획을 안 세우고 있어요. 대본만 보고 음악과 가사만 따라서 연기해보려고요. 조정은이라는 필터를 통해서 나오는 알돈자가 어떤 모습일지 저도 무척 궁금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 104호 2012년 5월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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