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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Audition] <엘리자벳> 오디션 [NO.91]

글 |김영주 사진제공 |EMK뮤지컬컴퍼니 2011-04-13 5,100

세기말의 황후를 찾아서

 

지난 5년 동안, 국내 공연 성사에 대한 기대 섞인 루머가 제작사의 이름만 바꿔가며 몇 번이나 돌았던 <엘리자벳>이 드디어 한국 공연을 위한 오디션을 시작했다. 2012년 2월, 한남동에 새로 문을 여는 쇼파크(가칭)에서 <조로>에 이어 한국관객들과 첫 만남을 갖게 될 <엘리자벳>은 당대 전 유럽 왕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손꼽혔으나 비극적인 운명을 살다 간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벳을 독특한 관점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영미권의 뮤지컬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관념성이 강한 캐릭터에 드라마틱한 역사적 배경이 더해져서 열성적인 마니아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텍스트를 분석하게 하는 흡인력과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지금까지 유럽의 주요 도시와 일본에서 공연을 한 이 작품의 주요 배역은 기술적으로나 캐리터 면에서나 요구 되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배우가 많지 않을 정도로 음악적으로 상당히 까다롭다. 또한 전형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비해 배우에게 해석의 여지를 넓게 두기 때문에 작품 분석능력에 따라서 그 결과물이 천차만별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캐스팅의 중요성이 특히 두드러진다. 지난 3월 7일부터 나흘에 걸쳐 진행된 이번 오디션에서 각 배역에 요구된 사항들을 보면 한국의 뮤지컬 배우 풀 안에서 맞춤인 임자를 찾기가 결코 쉽지 않겠다는 우려와 함께, 이런 조건을 충족시키고 최종 낙점을 받는 배우들은 누구일까 하는 호기심을 자극했다.


<엘리자벳>의 음악감독으로 이번 오디션에 참석한 김문정 음악감독은 “일단 주연급들에 대해 가창력이 굉장히 요구되는 작품”이라고 운을 뗐다. 특히 이 작품의 두 남자 주인공 중 한 사람이자, 극을 이끌어 가는 사회자 역할을 하는 황후 시해범 루케니의 경우 오디션 공지부터 심상치 않은 조건이 걸렸다고 일러주었다. “연출을 맡은 로버트 요한슨이 루케니 역으로 오디션을 보는 배우들에게 요구한 조건에 아주 재미있는 표현이 있었는데 ‘하이 록 테너’라는 말이었다. 고음역대를 소화하는 테너 중에서도 특별히 높은 음을 낼 수 있어야 하고, 소리가 고급스러우면서도 록적인 발성도 같이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냐고 묻는다면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일단 작품에 필요한 이상적인 음색이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캐스팅을 할 때는 사람에 따라 그 조건을 조절을 할 수도 있지만 일단 기준을 그렇게 정해놓고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루케니 역은 음악적으로 뿐만 아니라,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카리스마까지 갖추어야 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캐스팅이 쉽지 않은 배역이다. 김문정 감독은 “상상하기로는 박은태 같은 목소리에 임춘길 같은 노련함을 가진 배우가 떠오르는 역할”이라고 말했다.

 

타이틀롤인 엘리자벳 역에는 매력적인 여배우들이 대거 오디션을 지원했다. 누가 봐도 타고난 여왕이라고 수긍할 수 있을만한 우아함과 아름다움, 당당한 태도와 함께 예민하고 불안정한 정신을 함께 보여주어야 하는 난해한 캐릭터인 만큼 표현하는 배우의 입장에서나, 지켜보는 관객의 입장에서나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엘리자벳 역은 자칫 잘못하면 나라 돌아가는 꼴은 아랑곳 하지 않고 호강에 겨워서 칭얼거리는 자아도취에 빠진 공주님으로 보일 수 있다는 위험요소를 안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고뇌를 설득력 있게 형상화하고 표현하면서,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어야 한다. 천진난만하고 몽상가적인 기질이 있는  10대 후반의 귀족영양에서 국정에 직접 개입하는 젊은 황후,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마는 말년의 모습까지 모두 소화해 내야하는 어려운 역이다. 뮤지컬에서 보기 드문 섬세하고 다층적인 심리와 까다로운 고음역대의 노래를 모두 소화해낼 수 있어야 하는 이 역은 여성 캐릭터가 작품의 중심에 서는 경우가 드문 우리 뮤지컬계에서 여배우들에게 귀한 기회일 것이다. 무대에서 ‘퍼스트 레이디’의 위엄을 보여준 적이 있거나 실력과 외형적인 조건이 잘 맞아떨어지는 여배우에게 기회가 갈 것으로 보인다.

 


이 작품의 또 다른 남자주인공으로, 독특한 세계관의 중심에 있는 캐릭터가 바로 의인화된 죽음, 토드다. 죽음을 뜻하는 독일어 토트(der Tod)의 종성을 발음하기 쉽게 바꿔서 이름으로 삼았다. “토드 역에는 섹시한 카리스마와 존재감, 음색과 외모를 모두 갖춘 배우가 필요하다.”는 김문정 감독의 말처럼 인간이나 단순한 영혼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압도적인 존재를 인격화한 캐릭터라는 점에서 무대 위의 배우가 관객들에 대해 설득력을 얻기 위해 갖춰야 할 것들이 매우 까다로운 역할이다. <엘리자벳>이라는 작품을 단순한 로열패밀리 잔혹사가 아니라, 세기말의 시대, 인간의 심연에 깃들어 있는 어두운 면에 대해 들여다보는 독특한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역할인 만큼 막중한 임무를 짊어져야 한다.


엘리자벳의 남편이자 사촌 오빠, 대제국의 황제이자 불운한 가장인 프란츠 요제프 역에는 한없이 부드러운 리치 바리톤의 풍부하고 고급스러운 목소리가 필요하다. 다행히 어렵지 않게 적임자를 찾은 배역이기도 하다. 가부장적이고 딱딱한 지배자면서도 엘리자벳에 대한 사랑만큼은 누구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인물이다. 그 아버지와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비운의 황태자 루돌프 역은 주역급 캐스팅 중에 가장 난항을 겪고 있다. “누가 봐도 껴안아주고 싶은 미소년이고 불안한 청년이면서도 군인으로 길러진 사람다운 풍모도 갖춰야 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와 외국인 연출이 원하는 게 좀 달랐다는 점도 재미있었다. 연출이 원하는 루돌프는 키도 크고 엄격하게 키워져서 반듯한 느낌이 있어야 했는데 아직 적임자를 찾지 못했다.”


김문정 감독은 현재 엘리자벳 역으로 캐스팅이 유력한 한 베테랑 여배우가 이번 오디션에서 보여준 태도에 대해 후배들이 귀감으로 삼을 만 하다고 찬사를 보냈다. 역할에 대해 완벽하게 이해를 하고, 지정곡을 곧바로 무대에서 부를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준비해왔을 뿐만 아니라 오디션장에 들어선 그 순간부터 지금 저 사람이 맡고 싶은 배역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게 의상과 헤어, 메이크업까지 공을 들인 모습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미 최고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오디션이라는 절차를 대충 얼굴을 보여주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과 배역의 첫 만남이라는 측면에서 예의를 지킨다는 것이다. 반면에 많은 배우들이 이 작품에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고 준비해오지 못한 것 같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표했다. 작품의 대략적인 분위기에 맞는다고 생각하거나 그냥 평소에 자신 있게 부르는 곡이 아니라, 이 작품에서 구체적으로 원하는 배역과 자신의 접점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게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 한 가지 난제는 앙상블 캐스팅이다. “연출가도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이 작품의 앙상블은 대사와 솔로파트, 그리고 이름이 있는 배역까지 함께 겸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경험이 부족하고 어린 배우들로 앙상블을 꾸려서는 작품의 깊이와 에너지가 만들어질 수가 없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그럴만한 기량이 되는 배우들이 앙상블을 겸하는 것에 대해 난색을 표하기도 하고, 또 제작사 입장에서는 그런 급의 배우들을 앙상블로 캐스팅하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울 수 있어서 그 조율이 쉽지는 않다”


공연까지 1년가량 일정이 남아있는 작품이 대규모 오디션을 진행하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1년 후의 스케줄을 미리 묶어둬야 하는데도 출연을 원하는 배우들의 수가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그만큼 작품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모짜르트!>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지만 아직까지 국내에서 빈 뮤지컬의 입지는 그리 크지 않다. 천재 작곡가 모차르트에 비해 오스트리아 황후 엘리자벳은 한국인들에게 친숙한 인물도 아니다. 그런 만큼 작품 자체의 힘과 배우들의 역할이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공연인 것이다. 작곡가 실베스타 르베이로부터 ‘한국에서 <엘리자벳>을 공연한다면, 김문정 음악감독이 작업을 해주었으면 한다’고 지목을 받을만큼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지만, 김문정 음악감독에게도 쉽지 않은 작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어느 작품이나 마찬가지지만, <엘리자벳>에는 대강 속임수로 해결할 수 없는 노래들이 많다. 곡마다 요구하는 음색이나 음역, 음량이 분명해서 만약 우리 배우가 그만큼 해낼 수 없다고 쳐도 얼렁뚱땅 편법을 써서 그 부분을 넘어갈 수가 없다. 가령 ‘밀크’ 같은 노래에서 루케니는 반드시 악보상 최고음까지 정확하게 소리를 내야하고, 그러지 않으면 그 곡의 에너지와 의미를 살릴 대안을 찾을 수 없다. 편하고 듣기 좋은 음악도 있지만 고민하고 갈등하고 형이상악적인 의미가 실린 곡들은 아주 까다로운 음악이다.” 이 작품이 어째서 어려운지에 대해 설명하는 이야기였지만, 거꾸로 이 작품이 얼마나 흥미로운지에 대해 말하는 것으로도 들렸다. 1년 후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엘리자벳>이라는 작품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겠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91호 2011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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