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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맨 오브 라만차>의 산초 [No.78]

글|박민정 |일러스트레이션|권재준 2010-03-29 6,202

광인의 따뜻함   

 

 

남들은 쉽게 하는 일도 주인님은 몹시 힘들어했어요.
악수를 할 때 손을 힘차게 흔드는 것이라든지, 재기발랄한 유머로 분위기를 띄우는 일에는 영 재능이 없었죠.”
산초는 마치 알론조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회상에 잠겼다. 생각만으로도 마음을 가득 채우는 그런 존재를 간직한 사람만의 여유가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 주인 말이에요. 자아가 단단하지 못해서 미쳐버렸던 거 같은데… 뭐가 좋아서 그렇게 쫓아다녔어요?”
“미쳤다…, 오, 물론 광기가 있긴 했죠. 하지만 큰일을 치른 사람 중에 나처럼 평범한 인물이 오히려 드물걸요? 난 그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시골 청년이죠. 위험 앞에서 몸 사릴 줄 알고 내 분수도 정확히 알아요.”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당신처럼 자기 객관화가 잘 된 사람이 성숙한 인간 아닌가요?” 
“그런데 난…,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두렵게 느껴졌어요. 그들은 상식을 벗어난 듯 보이는 사람들에게 몹시 가혹하거든요.”
“그렇다면 미친 알론조가 평범한 사람들과 달리 일상적인 기준으로 당신을 평가하지 않을 것 같아서 좋아했던 거예요?”
산초는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남들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와 소통하기 원하는 사람들의 내심에는 일종의 이기심이 숨어 있는 것일까. 산초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잣대에 억압당해 있던 사람들이 반대로 ‘미친’ 사람의 무한한 관대함을 기대하는 경우가 그렇다. 미친 사람 앞에서는 격식이나 예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
“악수나 미소 같은 그런 예의에 대한 엄격함이 두려웠던 게 아니에요. 저처럼 평범한 인간들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봐주지를 못해요. 누군가 좀 튀는 행동을 하면 속으로 그에 대해 이런저런 평가를 하고 계산을 하지요. 그게 두려워서 진짜 소망에 대해서는 입도 벙끗 못한다니까요.”
“알론조는 어땠어요?”
“주인님은 누구보다도 내 말을 잘 들어줬지요. 하지만 주인님이랑 소통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필요한 게 있어요. 주인님이 대화 중에 딴생각에 빠진다고 화내선 안 돼요. 얼른얼른 대답하지 않는다고 다그쳐서도 안 되죠. 주인님은 종종 마음속의 소리 때문에 외부 세계의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요. 마음의 소리와 외부 세계의 소리를 혼동하기도 하고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어리석은 사람들이 몰려온다고도 하고….”
“그런데 뭐가 좋았다는 거지요? 당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했어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대화를 나누는 게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더군요. 정답을 구하려는 게 아니거든요. 사실 정답이랄 게 뭐 있겠어요? 헌데 마누라한테 내가 불안하다고 말하면, ‘불안한 게 아니라 불만인 거겠지!’라며 꾀병을 부린다고 나무라지요. 하지만 주인님은 마술처럼 내 불안을 잠재우는 다정한 말을 건네지요. 익숙해진 것 같아요. 주인님이 바라보는 세상에. 어쩌면 그것은 주인님의 환각과 오류가 만든,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눈앞의 현실을 제대로 보려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늘 꿈만 꾸고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은 우울해지기 쉽지만 자신이 뭘 원하고 있는지 예민하게 이해하고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사람들은 행복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다. 따뜻하고 달콤한 것을 마시고 싶다든지, 좋아하는 사람과 산책을 하고 싶다든지, 낮잠을 자고 싶다든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작은 소리도 잘 듣는 사람이 먼 훗날의 막연한 꿈만 꾸는 사람보다 더 행복할 듯하다.
“당신이 알론조를 정말 좋아했다면 무조건 따라 줄 것이 아니라 그가 무엇을 원했는지, 왜 미칠 수밖에 없었는지를 정확히 알았어야 했어요. 이루지 못한 소망은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 안에 남아 자유를 억압하고 마음을 병들게 하거든요.”
“자꾸 그렇게 꼬치꼬치 따지지 말아요. 난 그냥 주인님이 좋아요. 구구절절 이유가 길어지다 보면 그건 변명이 되고 말거든요.`
산초의 주인을 향한 무조건적인 애정이란 어떤 것일까. 상대를 더 이상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그보다는 그 사람의 가치관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에서 우러나오는 조건 없는 애정인 것일까.
“하지만 당신 주인은 너무 나약하잖아요! 거울의 기사들이 다가왔을 때 그렇게 주저앉다니요.”
“자꾸 약하다 약하다, 말씀하시는데 뭐 그렇게 강해져야할 필요 있어요? 강해져야 한다는 강박 따윈 그냥 버리고 이대로 약한 채로 있으면 큰일 나요?”
산초는 ‘약하다’는 내 말이 어리석게 느껴졌는지 갑자기 버럭 화를 냈다. 늘 벙글벙글 웃던 그가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주인님이 미치기 전에는 그저 매사에 비판적인 완벽주의자에 지나지 않았죠. 하지만, 사사로운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린 후에 정말 더 자유롭고 관대해졌어요. 자유는 누군가 내게 허용하는 게 아니라, 내가 열렬히 구할 때 찾을 수 있는 거잖아요. 내 마음속에도 주인님처럼 미쳐서 돌진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을 거예요.”
산초는 알론조를 자신과 다른 특별한 인물로 묘사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 둘은 어쩐지 닮은 구석이 있었다. 두 사람은 모두 무모해 보이는 것에 대해서 끝까지 애정을 쏟을 수 있는, 변함없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현실과 타협하는 것이 철드는 것이기라도 한 양, 자신이 어떨 때 행복한지 알지 못하고 소망을 품는 일조차 구차하게 여기는 대부분의 어른들과는 다른 사람이다.
“주인님이 제 어린 시절을 회복하게 해준 것 같아요. 나이가 든 후 줄곧 내 소망을 모른 체하는 일에만 익숙해 있었는데 이젠 솔직하고 자유롭게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게 됐거든요.”
산초는 더 이상 심각하게 생각할 게 없다며 단순하고 명쾌하게 웃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는 변함없이 그렇게 웃을 수 있을까. 각박한 삶이, 그의 마음속에 비관적인 생각이 들어설 여지를 주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다. 뒤뚱뒤뚱 흥얼거리며 자리를 뜨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니 아무것도 두고 온 것이 없는데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는 긴 여행의 끝자락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77호 2010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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