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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MOMENT] 소나기처럼 짧고 강렬했던 <소나기> [No.68]

글 |박병성 사진 |서울시뮤지컬단 2009-05-27 8,681

황순원의 『소나기』를 처음 읽은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중학교 교과서에 실렸던 것도 같고, 그 이전인 것도 같다. 하지만 소설 『소나기』가 주었던 감동의 파장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한순간 찾아왔다 떠나버린 첫사랑과 소녀의 죽음을 그려가는 내내 가슴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올랐다.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에 대한 향수는 많은 이들이 공유하고 있는 감성이다. 오랜만에 다시 『소나기』를 들었다. 입에 붙는 문장 하나하나가 감칠맛나고 그 속에 담긴 의미들이 첫 문장부터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소년의 심리 묘사나, 상황 묘사는 마치 문장으로 그림을 그린 것 같다. 뮤지컬 <소나기>는 원작의 소년, 소녀를 고등학생으로 설정하고 내용도 각색했지만 장면 곳곳에서 소설의 문장을 떠올리게 한다. 하긴 그 누가 만든다고 해도 원작의 문장이 갖는 아우라를 벗어나긴 힘들 것이다.

 

 

 

 

저쪽 갈밭머리에 갈꽃이 한옴큼 움직였다. 소녀가 갈꽃을 안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천천한 걸음이었다. 유난히 맑은 가을 햇살이 소녀의 갈꽃머리에서 반짝거렸다. 소녀 아닌 갈꽃이 들길을 걸어가는 것만 같았다.

>> 처음 말을 건네게 된 소년과 소녀, 까치발로 소녀가 사라진 곳을 바라보는 소년이 보이는 것 같다. 소녀가 아니라 한옴큼의 갈대가 걸어오는 듯한 무언가 비현실적인 느낌. 하늘이 빙빙 돌고, 어질어질 하고 갈대가 움직이는 듯한, 사랑은 그렇게 현실감을 놓아버리면서 시작된다. 뮤지컬에서는 버스를 놓치고 함께 학교를 가는 장면에 갈대 장면을 넣었다.

 

 

 

 

 

“여기 참외 맛있니?”
“그럼, 참외 맛두 좋지만 수박맛은 더 좋다.”
“하나 먹어봤으면.”
소년이 참외그루에 심은 무우밭으로 들어가, 무우 두 밑을 뽑았다. 아직 밑이 덜 들어 있었다. 잎을 비틀어 팽개친 후 소녀에게 한 입 건넨다. 그리고는 이렇게 먹어야 한다는 듯이 먼저 대강이를 한 입 베물어낸 다음 손톱으로 한 돌이 껍질을 벗겨 우적 깨문다.
소녀도 따라 했다. 그러나 세 입도 못 먹고,
“아, 맵고 지려.”
하며 집어던지고 만다.
“참 맛없어 못 먹겠다.”
소년이 더 멀리 팽개쳐버렸다.

>> 산으로 놀려간 소년과 소녀가 무우 밑둥을 베어먹는 모습이 그려진다. 소년과 소녀의 짧지만 가장 행복했던 연애의 순간이다. 덜 익은 무우는 소년과 소녀의 풋내 나는 사랑을 비유한다. 소녀보다 더 멀리 던지는 소년의 심리도 놓치지 않는다. 뮤지컬에서는 무우 대신 참외를 따는 것으로 설정을 바꿨다. 지금 10대나 20대들은 무우를 먹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모를 것이다. 한번 먹어 보시길.

 

 

참 먹장구름 한 장이 머리 위에 와 있다. 갑자기 사면이 소란스러워진 것 같다. 바람이 우수수 소리를 내며 지나간다. 삽시간에 주위가 보랏빛으로 변했다.
산을 내려오는데 떡갈나뭇잎에서 빗방울 듣는 소리가 난다. 굵은 빗방울이었다. 목덜미가 선뜻선뜻했다. 그러자 대번에 눈앞을 가로막는 빗줄기.
비안개 속에 원두막이 보였다. 그리로 가 비를 그을 수밖에.
그러나 원두막은 기둥이 기울고 지붕도 갈래갈래 찢어져 있었다. 그런대로 비가 덜 새는 곳을 가려 소녀를 들어서게 했다. 소녀는 입술이 파랗게 질려있었다. 어깨를 자꾸 떨었다.

>> 너무나 순수해서 세상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랑은 서서히 비극으로 치닫는다. 소나기 오기 전 풍경을 묘사한 이 문장은 아무리 읽어도 이 이상으로 더 잘 묘사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뮤지컬에서도 가장 공을 들인 장면이 바로 ‘소나기 장면’이다. 실제 무대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나면 비온 후의 시원한 공기가 객석의 분위기를 바꿔 놓는다.

 

 

 

“저 오늘 아침에 우리집에서 대추를 땄다. 낼 제사 지낼려구…….”
대추 한 줌을 내어준다.
소년은 주춤한다.
“맛 봐라,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심었다는데 아주 달다.”
소년은 두 손을 오그려 내밀며,
“참 알두 굵다!”
이날 밤, 소년은 몰래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밭으로 갔다.
낮에 봐두었던 나무로 올라갔다. 그리고 봐두었던 가지를 향해 작대기를 내리쳤다. 호두송이 떨어지는 소리가 별나게 크게 들렸다. 가슴이 선뜻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굵은 호두야 많이 떨어져라, 많이 떨어져라, 저도 모를 힘에 이끌려 마구 작대기를 내리치는 것이었다.  
                               

>> 소나기를 맞고 며칠째 소녀가 보이지 않는다. 며칠 후 파리해진 소녀가 개울가로 나왔다. 그동안 아팠던 소녀가 내민 대추. 소녀를 위해 동네에서 가장 맛있다는 덕쇠 할아버지네 호두를 따는 소년. 마음을 졸이면서도 소녀를 위해 더 좋은 호두를 주려는 소년의 마음이 짚이는 듯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주고 싶은 마음은 시대가 달라져도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설에서는 끝내 호두를 주지 못한다. 뮤지컬에서는 소녀가 대추를 주는 장면으로만 원작의 느낌을 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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