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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PERSONA] 내가 길들인 그대에 대한 책임, <마이 스케어리 걸>의 황대우 [No.70]

글 |박민정 2009-08-05 6,624

 

 

‘당신이 건넨 사과 한 알 때문이지요.’ 황대우를 바라보며 속으로만 속삭였다. 내가 온 기척을 느끼지 못한 그는 시선을 먼 곳에 두고 입술은 꾹 다문 채 상처 받은 사람의 모습으로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결코 평범할  수 없었던 여자 ‘미나’를 사랑했던  그를 위해 나는 오늘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 너그러운 상담자? 냉철한 조언가?  아니면, 그저 그의 기이한 연애담에 귀기울이는 사람? 내 역할을 결정하기도 전에 그와 눈이 마주쳤고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다. 그리고 준비한 질문과는 무관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한다.

“왜 그녀에게 사과를 줬어요?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동을 줬다면 끝까지 책임을 줘야 하지 않아요?”  “마침 내게 사과가 있었고, 또 마침 그녀는 배가 고팠죠. 여름밤의 산은 쌀쌀했고, 내겐 그녀에게 벗어줄 자켓이 있었던 거죠.” 황대우의 담담한 목소리에는 아무 의도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미나를 만나기 전처럼 연애에 무관심한 대학 영어 강사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듯 보였다.
“사실 난 그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그녀를 이상화하고  신비화시켰죠. 내 희망사항이 그녀를 청순하고 지적인 여자로 만들었던 겁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주, 자신의 욕망에 들어맞던 이상적인 이미지가 기대를  저버릴 때 실망하곤 한다. 황대우 역시 속을 알 길 없던 여자 미나가 베일을 벗게 됐을 때 깊은 상실감을 느꼈다. 그는 미나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녀가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기에는 함께 한 시간이 너무 짧았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라고 하지만 난 이제 내 감정을 도무지 믿을 수 없습니다. 강렬한 감정이야 뭐, 생겼다가 사라져 버릴 수 있는 거죠.” 이별을 잘하는 사람이 사랑도 잘한다고 하는데 황대우는 첫사랑이 남긴 트라우마 때문에 영영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좀더 시간이 지나면 잊게 되겠지요. 전 섬세하지만 또  단순한 놈이기도 해요. 사실,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이 뭐 있겠어요? 단잠 자고 일어나면 섭섭한 일도, 공포스러운 일도 그럭저럭 잊혀지죠.”
사랑의 실패를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실패한 원인을 찾고 사랑의 의미를 배우는 것이다.  다행히 황대우는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처음에는 ‘정상적’이며 ‘무난한’ 자신의 삶을 미나가 뒤흔들어 놓았다고 생각했지만 미나를 만나기 전에도  자신이 그다지 평범하지 않았음을 이제 알게 된 것이다.
“내가 서른이 넘도록 연애를 못한 이유요? 나 자신과 화해하지 못했거든요. 흔히 자기애를 가진 사람과 이기적인 사람을 혼동하곤 하는데 그 둘은 비슷하기는커녕 정반대의  개념입니다.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황대우는 미나의 눈에 어린  망설임과 희망, 불안이 어디서 온 것인지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사랑에 빠진 그 순간의 기쁨에 겨워 행복한 시나리오를 구상하기에 분주했을 뿐이다.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이탈리아로 함께 떠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누차 말하지만, 난 그녀를 잘 알지  못한 채 그녀에게 반했어요. 상대에 대한  책임감이나 존경심은 그를 잘 알 때나 생기는 거죠.”
“정신 차리고 보니, 내가 알던 그녀가 아니었다, 이 말씀인가요?”
내 질문에 기분이 상했는지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상대방이 누구인지 면밀히  파악하고 사랑에 빠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나를 미워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붙잡을 수도 없었던 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미나 씨에 대한 제 감정을 단순하게 말하기 힘들군요….”
“제가 보기인 당신이 아직 그녀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그렇지 않다면 경찰들이 찾아왔을 때 왜 그녀를 숨겨줬어요? 이미 그녀는 당신이 생각했던 그런 여자도 아닌데!”

“난 당당한 사람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나 봐요. 피 묻은  삽과 잘린 손을 증거물로 들이대며 다그쳐도 그녀는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며 소리쳤지요. 그녀의 살인이 정당방위인지 아닌지, 나는 아직 알 길 없지만….”
한 차례 격렬한 폭풍이 자나간 후, 그의 눈빛은 좀더 밝아진 듯했다. 수많은 고전을  탐독하는 것보다 다른 누군가를 발견하고, 다가섬으로써 그 자신의 깊이를 더한 것인지도 모른다.
“언젠가 그녀를 다시 만날 것 같아요. 이탈리아의 한 광장에서든, 어디에서든… 마지막  인사를 제대로 못해서인지… 어쩐지 영영 이별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군요.”
‘그녀가 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아요?’라며, 우연에 의지하는  그의 우유부단한 태도를 지적하고 싶다. 사람들은 자주 그날이 마지막 만남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한 채 ‘곧 만나’라며 손을 들어 흔든다. 그리고 훗날, ‘그날이 마지막일 줄 몰랐다’고 회상한다.
“왜 대꾸가 없습니까? 제 태도가 구태의연하다고 생각합니까?”
“잠깐 그렇게 느끼기도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억지로 적극성을 발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그냥, 가장 당신답게 사랑할 수 있을  때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황대우는 빙그레 웃으며 주머니 속에서 사과를 꺼내 한 입 깨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후 두 시 강의에 늦지 않으려면 점심을 대충 때워야 한다.  그에게 특별한 인연을 선물했던 사과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문득, 사과를 가지고 다니는 그의 오래된 습관이 앞으로  그에게 어떤 우연을 선사할지 궁금해졌다.


※이 글은 필자가 캐릭터와 인터뷰한 상황을 가상으로 꾸민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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