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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No.73] 가난한 보헤미안들의 사랑의 찬가 <렌트>

글 |박병성 2009-11-02 8,029

<렌트>에는 이전의 뮤지컬들과 구분되는 특별한 점이 있다. 뮤지컬들이 무대 위에 판타지를 생산해냈다면, <렌트>는 동시대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감성으로 풀어냈다. 브로드웨이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관객층의 노령화가 <렌트>에서는 문제되지 않았다. 랩을 좋아하고 빠른 전개에 익숙한 MTV 세대를 뮤지컬 공연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렌트>는 푸치니의 대표작인 오페라 <라 보엠>을 기반으로 한 작품이다. 이야기 전개나 캐릭터 구성은 비슷하지만 가난하고 젊은 예술가들의 고민이 좀더 가깝게 다가온다.

 


보헤미안에 의한 보헤미안의 삶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을 뉴욕의 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로 만들자는 구상을 처음 한 것은 조나단 라슨이 아니었지만, 작곡가로 참여했던 라슨은 끝까지 이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렌트>는 7년여의 작업 끝에 관객들과 평단의 열광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는 드레스 리허설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 조용히 생을 마쳤기 때문에 생전에 성공의 기쁨을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의 삶이 불행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렌트>의 정신 ‘No  Day, but Today(내일은 없어, 오직 오늘뿐)’처럼 그 역시 하루하루에 충실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1830년대 파리를 배경으로 한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은 지금까지도 대중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라 보엠> 역시 순수 창작물이 아니라 앙리 뮈르제(Henry Murger)의 자전적인 소설인 『보헤미안의 생활(Scenes de la boheme)』을 토대로 만들었다. 뮈르제의 소설은 1845년부터 1848년까지 잡지 『르 코르세르』에 연재되었는데 1830년대 파리에 사는 가난한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소설 제목에서도 대략적인 이야기의 줄기가 드러나듯 보헤미안의 기질을 가진, 즉 세속적인 가치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운 예술가들의 생활이 주요 이야기이다. 이 책의 이야기에는 실제 뮈르제의 생활이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로돌포(<렌트>의 로저)는 자신을 모델로 한 인물이고, 절친한 마르셀(<라 보엠>의 마르첼로, <렌트>의 마크)은 실제 두 명의 예술가를 조합한 것이다.
오페라 <라 보엠>의 첫 장면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대본을 태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난한 예술가들의 극빈한 삶이 잘 반영된 장면인데 뮈르제의 생활 역시 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기 위해 바리에르가 뮈르제의 다락방으로 찾아갔을 때 그는 아프지 않았지만 침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좀더 이야기를 진척시키기 위해 카페로 나가자고 하자, 뮈르제는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이유를 털어놓았다. 하나밖에 없는 바지를 친구가 빌려가서 친구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다. 참으로 ‘라 보엠’스러운, 혹은 ‘렌트’스러운 일화가 아닐 수 없다.
<라 보엠>은 푸치니가 작곡하고, 그의 콤비인 루이지 일리카와 쥐세페 자코사가 대본을 썼다. 푸치니는 뮈르제의 원작을 그대로 따르기를 원치 않았다. 오페라의 내용은 소설 속에 액자형으로 담겨 있는 에피소드인 ‘프랑신느의 토시’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한지붕 아래 살고 있는 가난한 조각가 자크와 재봉사 프랑신느는 안타까운 사랑을 나누다 프랑신느가 죽음을 맞게 된다. 푸치니는 ‘프랑신느와 토시’를 중심으로 하고 소설 속의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첨부해서 <라 보엠>의 이야기를 엮었다. 오페라에서 미미가 죽는 장면은 소설 속에서 프랑신느가 자크에게 차가운 손을 맡기고 죽어가는 장면을 오버랩시킨다.

 

시대를 넘어서는 보헤미안 정신
원작자인 뮈르제는 가난한 보헤미안이었다. 푸치니 역시 그러한 삶을 모르는 이가 아니었다. 푸치니는 스물두 살에 밀라노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었는데, 이는 음악경연대회에서 우승해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그의 가계는 지속적으로 등록금을 지불하기에 충분히 넉넉한 살림이 아니었다. 첫 해는 장학금으로 해결하였으나 나머지 2년은 장학금 없이 스스로가 해결해나가야 했다. 이때의 경험은 푸치니가 <라 보엠> 속의 인물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원작 소설의 로돌포가 뮈르제 자신을 모델로 한 인물이었듯, 뮤지컬 <렌트>의 예술가들 역시 이 작품을 만든 라슨 자신이 투영된 인물이다. 뮈르제가 로돌포(로저)에 가깝다면 라슨은 마크와 좀더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전기 플러그가 없어서 긴 전깃줄로 집안 전체를 휘감아야 했고, 5층 건물 꼭대기 방에 집을 얻었던 그는 친구들이 오면 열쇠를 던져 전해주기도 했다. 또한 마크처럼 자신의 여자친구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긴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에이즈에 걸린 동료 예술가들을 따라 에이즈 환자 모임에 가기도 했고, 에이즈로 친구를 잃기도 했다. <렌트>에는 라슨 자신의 삶이 투영되어 있다. 뮈르제, 푸치니, 라슨, 이렇게 시대는 다르지만 각각 가난한 창작자들의 삶이 투영된 작품들은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소설로, 오페라로 다시 뮤지컬로 탄생했다.
오페라 <라 보엠>은 로돌포와 미미를 중심으로 하고, 마르첼로와 무제타를 주변 인물로 구성했다. 뮤지컬 <렌트>도 오페라와 비슷한 인물 구성이다. 시인인 로돌포는 무명가수 로저로, 재봉사인 미미는 밤무대 댄서로 파격적인 변화를 겪고, 화가인 마르첼로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 마크로, 가수인 무제타는 행위예술가 모린으로, 철학자인 콜리네는 MIT 공대 교수인 콜린스로 변한다. 그리고 인정 없는 집주인 브누아가 한때 함께 동료였던 베니로 변하게 된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렌트>의 인물들은 동성애자이거나 HIV 양성반응자로 미래가 불투명한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오직 마크만이 그렇지 않은데 그로 인해 그는 언젠가 친구들이 모두 떠나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게 된다(라슨의 갑작스런 죽음은 마크가 가진 두려움의 실체를 보여주었다).
<렌트>에서 <라 보엠>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선 첫 장면부터 그렇다. ‘Rent’를 부르는 첫 장면에서 로저는 악보를 찢어서 커다란 드럼통에 넣는다. 이것은 오페라에서 로돌포가 자신이 쓴 5막 대본을 1막씩 나누어서 불에 태우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오페라를 가장 많이 연상시키는 장면은 미미와 로저가 만나는 신이다. 미미는 불을 빌려달라고 로저에게 와서 그를 유혹하기 위해 고의로 불을 끈다. 로저 역시 일부러 불을 끄고 미미가 잃어버린 마약을 찾지 못한 척 한다. 이는 오페라 <라 보엠>에서 로돌포와 미미가 만나는 상황과 거의 흡사하다. <라 보엠>에서 가장 유명한 곡 ‘그대의 찬 손(Che gelida manina)’은 열쇠를 찾다가 둘의 손이 닿을 때 부르는 곡이다. 로돌포는 이 곡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자세히 소개한다. 이어 미미가 자신을 소개하는 ‘내 이름은 미미’가 이어진다. 조나단 라슨은 이 과정을 드라마틱한 곡 ‘Light My Candle’에서 녹여낸다. 미미가 로저를 유혹하고, 로저는 미미에게 매혹당하지만 자제한다. 이 곡의 마지막 가사는 ‘내 이름은, 내 이름은, 미미(They call me, They call me, MiMi)’인데 이 부분은 오페라의 곡 ‘내 이름은 미미’를 떠올리게 한다.
미미와 로돌포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오페라에서는 미미가 죽어가자 콜리네가 자신의 코트를 팔아서 의사를 부른다. 뮤지컬에서 콜린스의 코트는 보다 중요한 소재로 사용된다. 콜린스의 코트는 엔젤과 그를 이어주는 주요 매개체로 콜린스는 불량배들에게 코트를 빼앗기고 엔젤을 만나게 된다. 엔젤이 벼룩시장에서 그것을 되찾아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다.
오페라 2막의 주요 무대인 보헤미안들이 모이는 카페 모뮈스는 원작자인 뮈르제가 가난한 예술가들과 함께 모였던 실제 존재하는 카페였다. 뮤지컬에서도 ‘라이프 카페’가 등장하는데 이곳 역시 라슨이 종종 친구들과 모여 작품을 구상하곤 하던 아직도 실존하는 카페이다. 뮤지컬에서 ‘라이프 카페’ 장면에서는 모린을 비롯한 친구들이 집주인 베니와 신사(그레이 맨)를 조롱하며 자신들의 자유로운 보헤미안 정신을 노래한다. 베니가 속해있는 중심 세계를 비웃기라도 하듯 모린과 조앤이, 엔젤과 콜린스가 키스를 나누고 모린은 엉덩이를 드러내는 퍼포먼스까지 한다. 카페에서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La Vie Boheme’이다. 뮈르제의 소설에서 예술가들이 모였던 ‘카페 모뮈스’, 그리고 라슨의 아지트였던 ‘ 라이프 카페’를 떠올린다면 보헤미안의 자유로운 기질을 발산하는 이 노래의 정신이 명확해질 것이다.

 

혼돈과 좌절, 오직 사랑뿐
<렌트>에서는 오페라 <라 보엠>의 등장인물들의 직업이 바뀌고, 음악가인 쇼나르에 해당하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며, 오페라에서 무제타의 애인은 그저 돈 많은 늙은 갑부로 조롱의 대상이지만, 뮤지컬에서 모린의 애인은 동성애자인 변호사 조앤이다. 조앤은 안정된 직업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지만 동성애자라는 측면에서 보헤미안에 속할 자격을 부여받는다. 미묘한 차이는 있지만 대략적인 인물들의 구도는 오페라와 뮤지컬이 상당부분 비슷하다. 그러나 담고 있는 메시지는 완전히 다르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이 자유로운 예술가들의 낭만적인 사랑을 다루고 있다면, <렌트>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삶은 좀더 절실하다. 이러한 절실함은 상당 부분 그들이 HIV 양성반응자라는 데 기인한다. 로저가 부르는 노래 ‘One Song Glory’는 죽기 전에 자신을 기억하게 할 곡을 작곡하고 싶다는 내용의 노래다. <라 보엠>에서 로돌포가 미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가난 때문이지만, <렌트>에서 로저는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볼 자신이 없어서 받아들이지 못한다. 로저는 닥쳐올 죽음에 쫓기면서 마지막 영광의 노래를 남기겠다는 일념으로 작곡에 매진한다. 그러나 그가 그토록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마지막 노래가 미미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된다. 1년 동안 방황을 하고 돌아와 작곡을 하는 로저 앞에 죽어가는 미미가 나타난다. 로저는 미미를 안고 자신이 찾은 마지막 노래를 들려준다. 그것은 미미에게 바치는 사랑의 노래 ‘Your Eyes’이다. “하루만이라도 너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널 다시 볼 수 있다면 꼭 할 말이 있어. 나 이제 알게 되었어. 니가 내 노래라는 걸. 니가 내 노래였다는 걸.” 이것은 로저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곡이자 미미에게 바치는 노래이다. 이 곡은 ‘그 어느 것보다도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는 메시지를 설파한다.
이러한 사랑에 대한 찬가는 <렌트>의 대표곡인 ‘Season of Love’로 나타난다. ‘오십이만오천육백 분의 시간을 무엇으로 셀 수 있을까?’ ‘날마다 마신 커피 수로, 아니면 해가 뜨고 달이 진 날 수로 셀 수 있겠지만, 사랑으로 세는 것은 어떨까?’ 이것이 <렌트>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오페라 <라 보엠>에서 로돌포와 미미의 사랑은 가난 때문에 죽어가는 안타까운 연인들을 그리지만, 뮤지컬 <렌트>에서의 사랑은 그보다 더 성숙해진다. 사랑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경과 선망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벼랑 끝에서 바라보았을 때 그래도 삶에서 가치 있게 남을 것은 사랑뿐이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오페라 <라 보엠>의 젊은 예술가들에게서는 보헤미안적인 자유에서 오는 천진함이 느껴진다. 그들은 일상의 가치와는 동떨어져서 가난이라는 현실적인 제약을 오히려 즐기면서 유유자적하는 삶의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렌트>의 인물들에게서는 존재론적인 고민에서부터 오는 자유를 느낄 수 있다. 그들의 자유는 초월과 체념 그 경계에 선 자들이기에 누릴 수 있는 자유이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렌트’라는 곡에서는 ‘지난해 집세도, 올해 집세도, 내년 것도 내지 않을 것’이라는 아나키스트적인 발언을 한다. 세계의 질서에서 가볍게 도약할 수 있는 태도가 <라 보엠>에서는 자유로운 보헤미안 정신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렌트>에서는 ‘어차피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렌트’라는, 우리는 이 세상을 잠깐 빌려 살다가 가는 존재라는 존재론적 고민에서 기인한다. 이러한 사고가 가능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위협을 실질적으로 느끼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세상 모든 것은 렌트일 뿐’이라는 생각은 염세주의적으로 흐를 가능성을 내포한다. 하지만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인물이 바로 엔젤이다. 엔젤은 이름처럼 연인인 콜린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베푸는 구원의 존재이다. 미미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도 엔젤로 인해서이다. 절대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엔젤의 존재는 ‘우리의 삶을 사랑으로 측정하면 어떨까’ 하는 무한 사랑주의의 실천자이다. 오늘을 충실히 사랑하며 살아가자는 <렌트>의 정신은 오페라 <라 보엠>의 낭만적인 사랑을 넘어서 보다 절실한 울림을 준다. HIV 양성반응자인 젊은 예술가들의 심정이 불안과 혼돈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젊은이들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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