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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믿거나 말거나, 뮤지컬 ‘JCS’

글 | PIRIRI | 사진제공 | 설앤컴퍼니 2015-04-14 5,797

“우리는 예수보다 유명하다”

1966년 비틀즈의 존 레논은 기자회견장에서 돌발적인 발언을 한다. 보수적인 종교 단체의 항의는 기본이고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일어났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비틀즈는 앞으로 콘서트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콘서트는 엄청난 수입을 보장하는 사업이었으니 사태가 매우 심각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비틀즈는 존 레논의 발언으로 큰 위기를 겪을 거라 예상되었지만, 그들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개인적으로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가 공연될 때마다 1966년 존 레논의 문제적(?) 발언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연이어 1960년대, 록 음악,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 같은 단어들이 꼬리를 물며 생각나곤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통하는 상징적인 존재는 결국 비틀즈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면 황당하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한국에서 일부 기독교인들에게는 신성 모독 작품이고, 일부 비 기독교인들에게는 찬양의 성극으로 폄하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즉 이 작품을 감상하는 기준점이 암묵적으로 종교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뮤지컬은 상업 예술이고, 감상하는 절대 불변의 방식은 없다. 한 번쯤 다른 태도, 다른 관점으로 이 작품을 보는 것도 재미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글은 이런 잔재미를 위해 쓰여진 글이니 너무 심각하게 읽지 마시길 바란다. 또한 이 글은 개인적 추론과 상상임으로 논리적 근거가 빈약할 수 있으니 이 점도 미리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역사를 소재로 상상력을 발휘한 픽션 또는 팩션”

“기독교도인데, 죽어서 하늘나라에 갔더니 붓다가 있으면 어떻게 되는 건가?” 시시껄렁한 농담 같은 이 문장의 주인공은 18세기(?) 유럽의 어느 유명 철학자이다. 신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으로 어떻게 알 수 있으며,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이성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을 안다고 하지 마라. 대충 이런 의미였던 것 같다. 유럽은 중세를 지나면서 이런 생각들이 쌓여 죽음 이후의 세계보다는 현재 나의 삶, 즉 실존적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에 도달했던 것 같다. 이런 흐름은 샤르트르를 비롯한 일련의 실존주의 철학자들과도 닿아 있어 보인다.

20세기 들어서 세계 1차, 2차 대전이 있었다. 참혹한 전쟁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 온 유럽인들은 국가의 변두리에서 삼류 시민으로 가난하게 살아가는 현실과 마주치게 된다. 민족, 국가, 이념 등 거대한 이데올로기에 사람들이 휩쓸려 갔지만 결국 전체주의와 파시즘으로 귀결되는 과정을 지켜 본 사람들은 더욱더 실존적인 문제와 개인주의, 자유주의, 인류 공존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는 바로 이런 시대적, 정신적 배경 속에서 탄생하게 되었다. 이 작품이 발표된 1970년대 초 유럽에서는 기독교를 맹목적 신앙이 아닌 하나의 문화로, 전통적(또는 보수적) 사고방식으로 보는 사람이 많았다. 따라서 이 작품을 따라다니는 오래된 편견, 즉 예수를 신이 아닌 인간으로 묘사함으로써 신성 모독을 의도했다는 것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왜냐하면 당시 많은 유럽인들은 카톨릭과 기독교 같은 종교를 하나의 문화로 바라보았고, 종교 자체에 관심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유럽은 중세 시대 일 천년 이상 예술이 기독교 소재로 꽉 차 있었다. 따라서 이십대의 패기만만한 웨버와 팀 라이스가 종교적 이슈를 가지고 작품을 만들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물론 그들이 기독교 부흥의 역사적 소명(?)으로 일부러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사람들을 다시 교회에 나오게 하려고 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적절한 추론이 아니라고 본다. 그렇다면 웨버와 라이스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들은 팩션을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팩션은 역사적 사실, 실존 인물의 이야기에 상상력을 가미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 것이다. 예수의 마지막 7일은 중요한 종교적 테마이지만 동시에 역사적 사실이다(기적과 부활을 제외하고). 두 천재들은 이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가미하여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고자 했다.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소재로 한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보았듯이 팩션에는 새로운 설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설정이 파격적일수록 재미는 극대화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그들 상상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예수가 신이냐 인간이냐는 아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 이 작품의 핵심은 예수와 유다가 공모자라는 설정이다. 인류에게 영원한(?) 교훈을 주기 위해 스승과 제자가 드라마틱한 죽음을 계획했다는 설정이야 말로 이 팩션의 출발이다.

예수는 모든 인류에게 사랑과 용서라는 메시지를 남기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다. (이런 결정의 배경에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이 남긴 교훈이 크다. 이것은 엔도 슈사쿠의 책을 읽어 보시기 바란다.) 그리고 가장 신뢰하는 제자 유다에게 특별한 임무를 부여한다. 예루살렘에 가면 나를 밀고하라. 유다는 예수의 숨은 계획을 눈치 채고 괴로워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매우 대담하고 파격적인 상상이라고 본다. 유대 민족이 아니라 인류에게 교훈을 남기려는 예수의 거대한 야심(?)과 그것에 반발하는 유다의 고뇌을 그린 이 작품은 이렇게 시작 되었다. 젊은 두 천재가 골방에서 이 불온한(?) 상상과 설정을 나누면서 재미있다고 낄낄거리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뮤지컬 역사상 가장 힘 있는 오프닝 곡으로 꼽힐 만한 ‘Heaven On Their Mind’는 예수의 계획을 눈치 챈 유다의 혼란과 절규로 가득 차 있다. 가사를 잠깐 인용해 보면 대충 이렇다.

 

“모든 게 분명 해

(중략)

왜 다 버리려 하나

왜 하필 이 선택인가

배신당해 죽어야 할 운명

(중략)

지저스 지금 여길 생각해봐

결국 빼앗긴 우리의 땅

짓밟힌 채로 피흘려 고통 받는 우리를

(중략)

지저스 우린 여길 지켜야 해

우린 이겨내고 살아야 해

당신 선택 멈추고 다시 한번 생각해

(중략)

메시아 따윈 잊어버려~

(이하 생략)


“과학기술의 발달과 수퍼스타의 등장”

두 번의 세계 대전은 아이러니하게도 과학 기술의 급속한 발달을 이루어냈다. 그 결과 1950년대 인공위성이 쏘아졌고 전 세계는 통신의 발달로 실시간적 교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패권국인 미국의 문화가 전 세계에 급속도로 퍼지게 되었고, 오늘날 영어 문화권의 확산에 일조하게 된다. 탈종교, 민족과 국가보다는 개인의 삶 중시,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전 세계의 교류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록 음악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1950년대 흑인 음악인 블루스에 비트가 가해져서 리듬 앤 블루스가 탄생하게 되는데, 리듬 앤 블루스에 백인 컨트리 음악과 여러 가지 음악이 더해지면서 록큰롤(Rock & Roll)이 나온다. 미국의 기성세대들(주로 백인들)은 이 시끄러운 음악에 질겁했지만 전쟁 이후 베이비 붐 세대는 록큰롤에 열광했다. 이것은 새로운 세대의 출현이었다.

대서양 반대편 리버풀은 미국에서 오는 선박들이 정박하는 도시로서 영국의 어느 도시보다 빠르게 미국의 문화들이 전파되었다. 비틀즈는 바로 이곳 리버풀 출신이다. 데뷔 앨범을 내고 영국에서 성공을 거둔 비틀즈는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얻는데, 문제는 인기의 수준이었다. 그 전까지 가수나 배우의 인기는 거주 국가 또는 동일 언어권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비틀즈의 인기는 종교, 인종, 국경을 넘어서 최초의 글로벌 팬덤을 이루었다. 지금은 흔한 일이지만 가는 곳마다 수만 명이 모여들고, 최초로 5만 석의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하고, 일거수일투족이 전 세계적 반향을 일으켰다. 오죽하면 비틀즈 현상이라는 말이 나왔겠는가. 이런 비틀즈를 보고 수퍼스타라는 말이 생겨났다. “우리는 예수보다 유명하다”는 존 레논의 말이 근거 없는 허세는 아니었던 셈이다. 어쨌든 웨버와 라이스는 ‘인류 최초의 수퍼스타는 예수 아닌가?’라고 상상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새로운 가상 역사극의 제목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라고 붙인 것이 그 증거이다.

 

“예술적 야심, 그리고 매우 상업적인”

비틀즈와 동시대에 활동한 영국 록 밴드 후. 1968년(?) 이 밴드는 최초의 록 오페라(또는 뮤지컬) 를 발표했다. 이 앨범의 특징은 기존 오페라의 양식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록 음악을 구현시켰다는 것인데, 말하자면 저급한 음악으로 불리던 록이 오페라의 형식과 융합해버린 것이었다. 그것도 매우 훌륭하게.  1960년대 록 음악은 당시 젊은 세대의 음악이었고, 기성세대와 자신을 구별 짓는 상징이기도 했다. 미성숙한 젊은이의 음악이 기존의 음악과 융합될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게 된 것이다.  동시에 보수적인 뮤지컬에서도 록 음악을 전면에 내세운 <헤어>(HAIR) 같은 작품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웨버와 라이스는 자신들의 발칙한 가상 역사극에 록 음악이 잘 맞으며 동시에 예술적 야심을 채우는 데도 적합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동시에 당대 최고 인기 엔터테이너인 록그룹 싱어(롹커)의 이미지가 새로운 예수와 유다 캐릭터에 어울릴 것이며, 동시에 상업적으로도 유리하다고 잔머리(?)를 굴렸을 것이다. 당시 젊은 관객들은 예수와 유다가 록커 이미지이고 동시에 비인간적인 가창력으로 록 음악을 부른다는 것에 매혹되었을지도 모른다.(초연의 예수는 딥퍼플의 이언길런이었다.) 2013년 한국 공연에서도 배우들은 어마 어마한 가창력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수퍼스타 씬에서 유다는 아이돌 복장을 하고 나온다. 지금 우리 시대에 가장 섹시한 엔터테이너는 록커가 아니라 아이돌임을 보여주는 씬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1970년 웨버와 라이스의 선택과 궤를 같이하며, 동시에 그들만큼 영악한 선택이다.

 

“예수, 사랑과 헌신의 아이콘”

1960년대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태어난 베이비 붐 세대가 문화적 주역으로 등장한 시대이다. 그들은 기성세대와 자신들을 완벽히 구분 짓고 싶었던 것 같다.(아님 말고) 이때 기독교를 재해석하는 일련의 흐름들이 있었다. 그 사례 중 하나가 일본 카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이다. 그의 대표작은 <그리스도의 탄생>, <예수의 생애> 등이다. 엔도는 ‘신의 아들 예수’를 연구하기 위해서 ‘역사적 인물 예수’, ‘인간 예수’를 쫓아가기 시작한다. 우선 역사적 상황과 당대 인물의 관계를 고찰하고, 각각의 인물들이 어떤 생각들을 했는지 살핀다. 그리고 상상력을 보태서 신앙과 신화에서 예수를 끄집어내고 역사적 실존 인물로 그를 복원해낸다. 그가 복원한 예수는 인간적 매력을 지녔고, 따뜻한 피가 흐르면서, 동시에 무서운 결단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 뮤지컬을 재미있게 감상하시길 원하는 분들은 성경을 읽지 말고, 엔도 슈사쿠의 <예수의 생애>를 읽어 보시기 바란다. 또한 그의 책은 비 기독교인들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으며,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준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가 엔도 슈사쿠에게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니다. 연도로 따지면 엔도의 책이 뒤에 서 있다. 그러나 당시 시대가 예수를 ‘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지만 ‘인간’의 나약함을 넘어선 위대한 인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예수가 종교적인 인물을 넘어서 비 기독교인에게도 수용될 수 있는 역사적, 인문학적 존재로 바뀐다는 점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유대 민족을 위해 이집트 민족의 신생아를 하루 밤에 다 죽인다. 솔직히 나는 이것을 잔인하다고 느낀다. 우리를 괴롭히는 자는 그 보다 더한 고통을 주겠다는 것인데, 이것이 어떻게 인류의 보편적인 구원 사상이 될 수 있는지 난 모르겠다. 그러나 엔도 슈사쿠가 기술한 예수의 정신은 사랑이다. 가난한 자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 그것이 한 위대한 인간이 죽음으로써 인류에게 남긴 것이다. 어떻게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 같이 무식한 무신자에게도 이런 감동을 주었으니, 엔도 슈사쿠가 교황 바오로 6세에게 훈장을 받았다는 것이 이해가 된다.

 

“들리는 대로, 느끼는 대로”

신성하고 숭고한 대상을 사람들이 존경하기는 쉬워도 엔터테이닝하기는 어렵다. (전문 용어로 즐기기는 어렵다…) 예수를 소재로 했으니 당연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복잡한 상징들도 많이 있다. 한마디로 코에 걸면 코걸이요, 귀에 걸면 귀걸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호하게 만든 이유가 있다고 본다. 싸가지 없는 이십대 딴따라 웨버와 라이스라고 할지라도 예수의 진정성을 훼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정성을 너무 강조하면 사람들이 신성하게 받아들일 것 같고, 파격을 강조하자니 품격이 사라질 것 같아 두려웠을 것이다.

두 사람의 제작 동기에는 상업적인 목표가 분명히 있다. 팩션이지만 진정성과 감동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원작자들의 이 모호한 줄타기가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이 정답을 말하는 것이라면 선전 도구로 전락하기 쉽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이 아직까지도 공연되고 있으며, 시대에 따라 다양한 버전으로 연출되고 있다는 것은 원작의 진정한 힘을 대변하고 셈이다.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열어 놓은 이 작품을 굳이 한 방향으로 볼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다. 그러니 당신이 기독교인이건, 비기독교이건 느끼는 대로 즐기면 될 것이다. 다만 당신의 생각을 나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추신

예술작품에 나이가 있다고 할 때 100년 뒤에도 젊음을 유지하는 유일한 뮤지컬은 이 작품밖에 없을 것이다. 조지 루카스는 시저가 살았던 로마 시대를 소재로 스타워즈를 만들었다. 이 작품 역시 시공간을 바꿔서 계속 공연될 것이다. 최근 해외에서 제작된 아레나 버전 역시 그 중 하나이다.  2013년 한국 버전 공연은 원작의 상상력을 그대로 복원하면서도, 우주 저편 어느 별일지도 모르는 공간 설정을 보여준다. 탁월한 선택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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